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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급 에스퍼를 피하는 방법 (44)화 (44/112)

#44

“읏…….”

본능적으로 어깨가 움츠러든다. 뒤통수부터 허리까지 순식간에 소름이 돋았다. 절로 파르르 떨리는 등 근육 너머로 델로즈의 넓은 손바닥이 느껴진다. 맹수에게 목이 물린 사람처럼 빳빳하게 굳어 숨을 완전히 멈췄다.

목에 고개를 묻은 델로즈는 영역 표시하듯 반테온의 목을 살짝 깨물었다. 반테온의 몸이 경직되자 만족스럽게 고개를 비비곤 천천히 떨어졌다.

그는 열기 가득한 금빛 눈동자로 반테온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명백히 화가 난 눈동자였다.

대체 누가 화를 낼 상황인데, 저렇게 바라보고 있을까. 반테온은 이를 악물었다.

“드디어 미쳤군.”

“이런 걸 좋아하는 것 같길래.”

아까부터 이해 못 할 말이다. 누가 이딴 강압적인 행위를 좋아한단 말인가. 정상이 아닌지는 알았으나 이 정도로 곱게 미쳤을지는 몰랐다.

저 까만 머릿속은 대체 어떻게 되었…… 아.

한 가지 기억이 머릿속을 스쳤다. 낮에 케슬란과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도둑 키스하듯 살짝 닿았다가 떨어진 행동에 반테온이 끌어안고 토닥였지. 지금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그걸 어디선가 델로즈가 보고 있었던 거다.

그제야 델로즈가 밤중에 찾아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떻게 봤는지 모르겠으나, 낮에 본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이 난리를 피우는 것이다. 그렇지만 대체 왜?

그의 입술이 닿았던 목을 손으로 꽉 잡았다. 아직 가라앉지 않은 열감이 싸하게 타고 올랐다.

“케슬란 때문에 이러는 거야?”

“앞으로 그 쥐새끼 같은 꼬맹이는 만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물론 망할 친척도.”

“왜 그래야 하지?”

“내가 보기 싫으니까.”

반테온과 델로즈는 지극히 비즈니스적인 계약을 했다. 분명 사생활에 참견할 권리는 양쪽 다 없었다. 이해되지 않는 행동에 혼란한 의문과 동시에 자신의 행동을 억압하는 델로즈의 행동에 분노가 치밀었다.

“그러기 싫다면?”

“막을 수밖에 없겠지.”

지금처럼 밤에 찾아오거나, 벽에 구속하고 행동을 제안하겠다는 말이었다. 몰래 찾아온 것만으로도 징계감인데 대놓고 가이드를 억압하겠다고 말하다니. 교육이 부족해도 한참은 부족하다.

물론 그의 말대로 힘으로 반테온을 억압하려 들면 반항하기 힘들었다. 이 좁은 방에서 반테온이 델로즈를 이길 방법은 많지 않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반테온이 느긋할 수 있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반테온은 경계가 느슨해진 델로즈의 시선을 피해 손바닥으로 벽을 쓰다듬었다. 매끈한 대리석 타일을 문지르자 작은 홈이 손가락 끝에 걸린다. 시끄러워지는 걸 싫어하기에 이것까진 참으려고 했는데 말이 통하지 않으니 다른 도리가 없다.

“지금이라도 사과할 생각은 없겠지?”

“당연하지.”

지은 죄도 모르고 뻔뻔하게 서 있는 델로즈가 보였다. 그 표정이 언제까지 유지되나 보자.

손가락으로 강하게 홈을 누르자 대리석 일부가 열리고 그 안에는 동그란 버튼이 나왔다. 반테온은 망설임 없이 그 버튼을 눌렀다.

-삐-! 삐-! 삐-! 삐-!

귓가에 시끄럽게 경고음이 울리며 벽에 달린 비상등이 빨간빛을 내며 반짝거렸다. 반테온의 방뿐만 아니라 건물 전체가 불에 달군 듯 시끄럽게 울렸다.

“무슨 일이야!”

다른 방 사람들이 다 복도로 뛰쳐나왔다. 문밖에서 복도를 달리는 발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예상도 못 한 상황에 델로즈의 표정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반테온이 누른 것은 가이드 숙소에 필수로 설치된 장치다. 만일의 사태에 방마다 마련된 경보기였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뒷걸음질 치면서 이쪽 벽으로 몸을 붙인 보람이 있었다.

잠시 후, 신호를 듣고 움직인 보안 요원들이 반테온의 방문을 쾅쾅 두들겼다.

“안에 계십니까!”

“반테온 님 괜찮으십니까?”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델로즈의 눈매가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힘이 빠지는 델로즈를 밀어내고 여유롭게 걸어 문을 열었다. 들어온 경호 요원들이 빠르게 방을 살폈다.

밤중에 한 방에 있는 가이드와 에스퍼, 사나운 기세의 에스퍼와 계속해서 울리는 가이드의 비상벨 소리.

방에 들어온 경호 요원은 그 모습을 보고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순식간에 델로즈를 에워싸고 반테온을 보호하듯 거리를 벌렸다.

“델로즈 님. 잠시 협조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

그의 잇새로 낮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말은 경호 요원이 아닌 반테온을 향하고 있었다. 자신을 향한 소리가 아님에도 살벌한 기색에 요원들이 주춤하는 기색이 느껴진다. 반테온은 느긋하게 옷차림을 살폈다. 델로즈가 무리하게 잡은 탓에 흐트러진 복장을 정리했다. 옷이 깔끔하게 정리되자 반테온은 고개를 끄덕이고 드물게 환한 웃음으로 손을 흔들었다.

처음 수풀 속에 쓰러진 델로즈를 만났을 때부터 그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상황도 시기도 놓쳐서 참았던 말이었다. 이제야 겨우 그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잘 가. 독방에서 에스퍼 윤리 교육 제대로 듣고 사람 좀 돼서 돌아오렴.”

가능하면 오래오래 머물면서 말이다.

입을 악물고 경비병의 인도에 따라 방을 나서는 델로즈의 표정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반테온은 대수롭지 않게 준비 중인 홍차와 차가운 물을 부어버렸다. 차 맛을 다 버렸다.

가이드가 좋다고 매달리는 에스퍼들은 질리도록 겪었다. 비상 버튼은 단말기 외에도 여러 곳에 설치해 놓았다. 이 정도 위협은 위협도 아니었다.

차라리 폭주를 막은 가이드를 알아내겠다고 센터를 엎을 때가 더 나을 지경이었다.

겨우 조용해진 방에 혼자 서서 그저 몇 주간은 가이딩 없이 휴가겠구나. 그런 생각에 만족스럽게 웃었다.

***

[하하하하. 그때 내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즐거운 상황은 아니었어.”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테아로트는 걱정스럽게 반테온의 안부를 물었다. 델로즈가 독방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다급히 연락한 것이다.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안부를 묻던 그는 반테온의 설명을 듣고 배가 터지게 웃었다.

마음대로 가이드의 방에 들어가 불필요한 접촉을 한 델로즈는 독방 15일 형을 받았다. 예상보다는 짧았다. 두 사람이 임시 매칭 상태였고, 당시 델로즈의 판단이 흐려진 상태였다고 결론 내린 재판관의 판결이었다.

판단력이 흐려지기는 무슨. 반테온은 속으로 비웃으며 몸을 기댔다. 살벌한 델로즈의 분위기에 겁에 질린 재판관들이 생존을 위해 타협한 결과였다.

[그래도 순순히 끌려갔나 보네? 한바탕 난동이라도 피웠을 줄 알았는데.]

3주 만에 연락이 닿은 테아로트는 걱정이 무색하게 평소와 같았다.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고 거칠긴 했어도 장난스러운 말투는 그대로였다.

“쪽팔린 줄 알면 따라가야지. 그래도 주제에 에스퍼라고 임시 가이드가 다른 사람이랑 있는 게 보기 싫었나 본데. 나중에 정신 차리면 이불 좀 걷어찰걸?”

[음…… 그럴까?]

뭐가 그럴까야. 센터를 오래 떠났더니 그 귀신같던 감도 죽었나 보다.

“그런데 넌 바빴어? 영 연락이 안 되더라.”

[그냥 조금 생각할 일이 있었어.]

평소 고민이라곤 없을 것 같던 테아로트가 생각하느라 연락이 끊기다니. 처음 있는 일이었다. 드디어 철이 드는 것일까.

“그거 드문 일인데? 그래서 생각은 이제는 끝났어?”

[뭐, 어차피 혼자 생각해도 답이 안 나올 일이었거든. 조만간 센터로 돌아갈 거야.]

테아로트는 후련한 듯 대답했다. 뇌까지 근육으로 된 줄 알았는데, 웬일로 제법 심각한 고민을 한 것 같았다.

“복구는 잘 진행되고 있어?”

[뭐 누가 거액의 기부금을 낸 덕에 호화롭게 하고 있지.]

테아로트의 말에 반테온은 가볍게 소리 내어 웃었다. 센터로 돌아온 반테온은 개인 자산을 털어 마을 복구 사업에 대대적으로 기부했다.

이미 일어난 인명 피해는 어쩔 수 없어도 살아남은 사람에게는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테아로트는 습격당하기 전보다 더 살기 좋은 곳이 될 거라며 너스레 떨었다.

[그리고 반테온 네가 봤다는 그 에스퍼 말인데…….]

테아로트의 말에 기댔던 몸을 세웠다. 단말기를 더 가까이 대고 집중했다.

“알아낸 건 있어?”

센터로 돌아오던 비행선 안에서 테아로트에게 로한에 관한 조사를 부탁했었다. 미등록 에스퍼와 접촉했다는 사실을 센터에 알리면 괜히 시끄러워질 것 같기에, 몰래 테아로트에게만 조용히 말했었다.

테아로트의 정보를 합해서 좀 더 확실해지면 상부에 보고할 예정이다.

등록되지 않은 상위 에스퍼가 왕국을 떠돌고 있으며, 마물 사태의 주범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테아로트의 말은 예상도 못 했던 내용이었다.

[그게 조금 이상해. 생존자들에게 물어봤는데 그런 사람을 봤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뭐?”

[금발이 있었다곤 하는데 네가 말한 대로 큰 키에 붉은 눈을 가진 사람은 없었어. 알다시피 붉은 눈은 드물어서 눈에 띌 텐데…….]

“……그러게.”

로한은 모자도 후드도 쓰지 않았었다. 신체를 감추기 위한 장치도 없었다. 그런데 아무도 보지 못했다니. 축제를 거니는 반테온과 델로즈의 주변엔 언제나 시선이 따랐다. 외지인이 많은 축제인데도 사람들은 주변 사람에게 관심이 많았다.

로한의 반짝이는 머리카락과 그 당당한 분위기는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단 한 사람도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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