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대체 정체가 뭐지?
단순히 자유가 좋아서 미등록 에스퍼로 지낸다는 말 자체가 수상했다. 로한의 외형을 생각하면 못해도 20대 후반. 그 나이까지 가이드 없이 생존하는 건 어려웠다.
센터는 가이드에겐 보호를 약속하고, 에스퍼에겐 혜택을 제공했다. 원하는 수준의 임무만 수행하면 평생 먹고 놀 수 있는 월급이 보장되었다.
에스퍼의 생존에 필수적인 가이드 역시 센터가 아니면 구하기 힘들었다. 운 좋게 가이드로 발현한 평민을 센터보다 먼저 발견했다 하여도 한계가 있었다.
A급 이상의 에스퍼를 감당하는 가이드는 많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우연히 센터에 들키지 않았으며, 하필 미등록 에스퍼에게 발견될 확률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니, 애초에 마물을 마음대로 부린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지.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는 존재다.
[……반테. 반테? 듣고 있어?]
“어…… 미안 잠시 고민 중이었어.”
[보통 놈은 아닌 것 같은데. 일단은 조심해.]
“고마워. 그럼 조만간 보겠네.”
[이번에 돌아가면 오래 쉴 거야. 임무 3개를 연달아서 했더니 죽겠다.]
올해 초에 임무에서 복귀한 테아로트는 반테온을 따라 폐광에 합류했었다. 그리고 센터에 돌아오자마자 마을 복구 작업까지 자원해서 활동하고 있었다. 반테온과 델로즈의 매칭률이 발표된 그날 밤 바로 습격당한 마을로 돌아갔다고 들었다.
왜 시키지도 않은 고생을 사서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게 왜 복구 작업에 자원했어. 머리가 복잡하면 센터에서 정리할 것이지.”
[……그렇네. 내가 바보 같았지.]
“뭐, 새삼스러울 건 없지.”
반테온의 놀림에 발끈하는 테아로트와 짤막한 대화를 나눴다. 연락 두절이 길어지면서 걱정했는데, 생각보다는 멀쩡한 것 같았다.
이제 슬슬 대화를 종료하려는데, 테아로트가 질문했다.
[그럼 넌 이제 쉴 거야?]
“아니. 독방에 가보려고.”
[뭐?]
볼륨이 커진 테아로트의 목소리가 단말기를 뚫고 울렸다. 먹먹해진 귓가를 눌렀다. 목청만 큰 녀석 같으니라고. 테아로트는 멈추지 않고 질문을 쏟아냈다.
[그놈을 보러 가려고? 그 무뢰한을? 그런 놈이 뭐가 좋다고?]
“예뻐서 보살피려고 가는 건 절대 아니고. 해야 할 이야기가 있어서.”
밤중에 미쳐 날뛴 놈에게 단단히 해줄 말이 있었다.
***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는 당번으로 보이는 경비병이 버티고 있었다. 센터 제복에 몇 가지 보호구를 갖추고 각을 잡고 일자로 서 있었다. 잔뜩 경계 중인 경비병에게 다가가자 반테온을 먼저 알아보고 인사했다.
“겨, 경례! 어서 오십시오!”
“수고가 많으십니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명단만 작성해 주십시오.”
경비병은 잔뜩 긴장한 태도로 반테온이 움직이는 동안 굳어 있었다. 군인이 아니기에 굳이 경례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조차 잊은 것 같았다.
경비병은 반테온이 명부 작성을 마치자 델로즈가 갇힌 독방의 열쇠를 챙겨 길을 안내했다.
징계를 받은 사람을 가두는 독방은 모두 지하에 있었다. 아주 옛날, 인권을 중요시하기 전엔 감옥으로 쓰던 공간이라고 한다. 몇 번의 리모델링으로 멀끔한 외형을 갖춘 센터와 다르게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어둡고 침침했다.
발을 들이자 환기가 되지 않아 퀴퀴한 냄새에 절로 코를 막았다. 혼자 있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편의성을 위해서라도 절대로 피하고 싶은 공간이다.
주로 비어있는 방을 스쳐 지나가자 위쪽 번호판에 불이 들어간 문이 보였다. 뒤따라오던 경비병은 서둘러 문에 걸린 자물쇠를 열었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철문이 열리자 그 안에는 수갑을 찬 델로즈가 얌전하게 앉아있었다.
방문을 예상했는지 놀라지도 않고 여유롭게 앉아 반테온을 노려봤다. 낡은 방 안에 수갑을 찬 모습이라니. 제법 어울린다 생각하며 반테온은 맞은편에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델로즈와 반테온 사이에는 보안을 위한 얇은 쇠창살이 한 겹 더 있었다. 이런 고철 덩어리가 델로즈를 막을 리 없을 텐데.
뒤에서 지키고 선 경비병이 서둘러 설명했다.
“수갑은 에스퍼의 힘을 제어하는 재질로 되어있습니다. A급에게는 제대로 작동하는 걸 확인했습니다. S급에게도 어느 정도 효과를 보긴 했습니다만, 사실 그 이상은 제대로 작동하는지는 모릅니다.”
하긴. 아무 효과도 없는 걸 SS급에게 채울 리는 없었다. 반테온은 경비병을 향해 상냥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번에 데이터로 남기면 되겠네요.”
그 말에 델로즈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시험 대상처럼 취급하는 것에 감정이 상한 듯했다. 그래도 미동도 없이 앉아있는 걸 보면 수갑이 어느 정도의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둘이서만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두 분만 말입니까?”
어젯밤 일어난 소동을 알고 있는 경비병은 괜찮냐는 눈빛으로 반테온을 바라봤다. 그런 걱정을 안심시키듯 여유롭게 웃어주자, 경비병의 얼굴이 금세 얼굴이 붉어졌다.
경비병은 자신의 허리춤에 달린 얇은 지시봉을 주섬주섬 풀어서 내밀었다.
“혹시나 모르니 이걸 가지고 계십시오. 오른쪽 벽에 있는 비상 버튼을 누르셔도 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 인사에 송구스럽다며 몸을 비비 꼬던 경비병이 떠났다. 델로즈의 눈매가 절로 가늘어졌다. 웬일인지, 또 남자를 꾀냐는 비아냥이 나올 만도 한데 입이 붙어버린 것처럼 조용했다.
드디어 둘만 남게 된 좁고 어두운 공간에서 단 두 사람은 조용히 서로를 바라봤다. 평소보다 더 풀어 헤친 셔츠와 가벼운 복장으로 수갑을 차고 있는 델로즈는 길들지 않은 야수 같아 보였다. 그 모습이 취향인 사람도 있으나 반테온은 그저 속으로 혀를 찼다.
아무리 혼자 있는 공간이라고 하나 저렇게 흐트러지다니. 뭐, 지금은 기분이 좋으니 사소한 부분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반테온은 손을 가볍게 들어 흔들었다.
“안녕? 그렇게 좋아 보이지는 않네.”
“올 줄 몰랐는데.”
“그렇게 헤어졌으니 인사라도 제대로 해야지.”
평소 단답형으로 대답하던 반테온이 웃으며 대응하자 델로즈의 눈이 가늘어졌다.
“넌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그럴지도.”
“놀리려고 여기까지 온 건가?”
놀리다니. 그것도 애정과 관심이 있는 상대에게 하는 것이다. 반테온이 델로즈의 모습을 보고 즐겁긴 했으나 이 불편한 곳에 굳이 찾아와 놀릴 정도의 열정은 없었다.
반테온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다리를 꼬았다. 그 행동에 맞춰 델로즈의 시선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놀리러 온 건 아니야. 보고 싶어서 온 것도 더 아니고.”
날이 선 눈빛으로 바라보는 모습에 어젯밤 상황이 떠오른다. 저런 얼굴로 반테온을 사납게 몰아세웠다. 어제의 일을 떠올리자 기분이 다시 가라앉았다.
“어제 고백이라 하긴 그렇지만, 어쨌든 비슷한 말을 들었으니 답이라도 줄까 싶어서.”
맨정신이라고 했지만, 어젯밤 델로즈는 마치 취한 사람처럼 정신이 나간 채 연인이든 정식 매칭이든 상관없다는 끔찍한 소리를 내뱉었다. 제정신으로 뱉은 말은 아니겠지만 확실히 해두는 것이 좋겠지.
“델로즈.”
호흡을 한 번 멈추고 입을 열었다.
“너도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니겠지만, 이건 미리 알아둬야 할 것 같아서 말해두는 거야.”
“…….”
“앞으로 장난이라도 연인이니, 매칭이니 하는 기분 나쁜 이야기는 자제해주면 좋겠어.”
사방에 둘러싼 돌벽에 살벌하게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에게 차이는 기분이 좋진 않을 것이다. 그런 말이 듣기 싫으면 처신을 잘했어야지. 스스로 판 무덤이다.
“재미있군. 그 이야기를 하러 여기까지 왔단 말이지?”
“겸사겸사.”
수갑을 차고 독방에 갇힌 우스운 꼴도 볼 겸해서 직접 찾아온 것이지만, 굳이 말로 표현하진 않았다.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 마음에 안 드는 건 서로 마찬가지잖아.”
“아니라면?”
삐뚜름한 말투가 돌아온다. 유독 낮은 음성이 돌벽을 치고 울렸다.
“…서로 장난칠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장난도 아니고, 빈말도 아니다. 네가 마음에 든다고 하면 뭐라고 대답할 거지?”
진지한 태도에 머리를 짚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이걸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반테온은 관자놀이를 누르며 고민에 잠겼다.
참아야 한다. 큰 소리를 내서 바뀔 것도 없고 피로도만 높아질 뿐이다.
델로즈의 반응은 아예 예상하지 못한 종류는 아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올 거란 우려도 했었다. 반테온 입장에선 미칠 것 같은 상황이지만, 그리 드문 현상도 아니었다. 조금 번거로워졌다고 생각하자. 마음을 달래며 사납게 노려보는 델로즈를 마주 봤다.
“너는 모르겠지만 가이드 자각 증후군이라고 부르는 증상이 있어. 처음 매칭한 에스퍼에게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지.”
“…….”
갑작스러운 말에 델로즈의 한쪽 눈이 찌푸려졌다.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지 파악하는 그에게 이어서 설명했다.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가이드에게 맹목적으로 집착하게 되지. 특징으로는 평소 전혀 관심 없던 사람에게 끌리거나, 갑작스러운 충동에 휩쓸리는 행동을 해. 어젯밤 너처럼.”
선생님 생활을 오래 한 반테온은 대수롭지 않게 학술적 내용을 읊었다. 가이드 자각 증후군은 특정 가이드와 관계를 지속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증후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