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흔히 ‘가이드의 지배력’이라고 부르는 영향 때문에 일어났다. 에스퍼가 가이드의 기운에 과하게 동기화하여 상대에게 과도한 친밀감과 독점욕을 보이는 증세였다.
서서히 친해지는 파트너 관계와 구분하기 어렵기에 갓 매칭 한 어린 에스퍼들은 일부러 가이드와 거리 두는 기간을 가지곤 했다.
남자라는 특정 성별을 싫어했던 델로즈의 갑작스러운 변화는 전형적인 가이드 자각 증후군의 증세이었다.
“잠깐.”
손을 들어 말을 멈추게 한 델로즈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미간을 짚었다. 움직일 때마다 손에 묶인 수갑이 찰랑거렸다. 제법 무게도 있어 보였다.
“그러니까 네가 하고 싶은 말이 그건가? 지금 내가 그 증후군이라는 걸 앓고 있을 뿐이다?”
“그렇지. 그것도 어린 에스퍼들이 걸리는 증후군을 지금 겪고 있는 거야.”
어깨를 으쓱한 반테온은 다시 설명을 이었다.
“가이드의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 쓰이기 시작하고, 시선을 떼기 힘들어지지. 일상에 피해가 생기면 치료를 받거나 가이드와 거리를 두라고 권장해.”
“거리를 두라…….”
조용히 읊조리는 말투엔 불편한 심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운 좋게 앞으로 15일 동안 마주칠 일이 없으니 이 기회에 고쳐보는 것도 좋겠지.”
관용을 베풀 듯 말하는 반테온의 태도에 델로즈의 한쪽 입술이 올라갔다.
“네 말은 지금 날 보고 환자라는 거군. 정신병이 생겨서 네게 반응한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야. 흔히 겪는 일이거든.”
델로즈는 처음부터 반테온에게 호감이 없었다. 아니, 거부하는 쪽에 가까웠지. 그런데 며칠 사이 태도를 바꾸고 끔찍하게 싫어하던 남자 가이드와 연인이 되어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기록에도 없는 빠른 속도였다.
가이드 자각 증후군을 기분 좋게 설명하는 반테온과 다르게 델로즈는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불편한 표정으로 무릎을 세워 팔을 얹었다. 맹수가 먹이를 노리듯 집요하게 반테온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반테온은 자기 생각이 맞았다고 다시 확신했다. 가이드 자각 증후군이 아니라면 자신을 저런 눈으로 바라볼 이유가 없지 않은가.
“제법 재미있는 가설이야.”
“사실에 기반한 진단이지.”
반테온은 끝까지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델로즈에게 되물었다.
“네 눈엔 지금 상황이 정상으로 보여? 그 델로즈가 남자 가이드에게 집착하고 매달리는 현실이?”
“…….”
“그럴 리 없겠지.”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지금까지 자신이 했던 발언을 생각하면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남자 가이드를 거부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건….”
혼란스럽게 흔들리는 델로즈의 눈빛을 보며 옅게 웃었다. 덩치만 컸지 아직 경험이라곤 없다. 산을 누비며 용병 일만 했던 사람이다.
진지한 연애 감정도 겪어본 적이 없겠지. 그러니 가이드에게 끌리고, 독점하고 싶은 마음을 진심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내가 치료를 받으면 달라질 거라 예상하는 건가?”
“그래. 약이라도 처방해줄까?”
“약이라….”
기세가 줄어든 델로즈는 잠시 고민하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사나운 말투지만 아까보단 기세가 많이 줄었다.
“약을 먹어도 상태가 그대로라면 그땐 어떻게 할 거지?”
“뭘 어떻게 해.”
허리를 편 반테온은 당당하게 고개를 들었다. 어찌 보면 처음 델로즈가 이상한 행동을 할 때부터 하고 싶은 말이었다.
“너 내 취향 아니야.”
반테온은 조금의 흐트러짐 없이 무덤덤한 태도로 대답해줬다.
델로즈의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뭘 그리 놀라는지 모르겠다. 당연히 자신이 선택하면 황공하게 받을 줄 알았던 걸까?
하긴 다른 가이드라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SS급 에스퍼의 관심에 무릎 꿇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걸 바랐다면, 상대를 잘못 골랐다.
반테온은 지금까지 SS급의 후광 따위 없어도 모든 걸 누리고 살았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지금까지 고수한 자신의 취향을 바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난 작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상대가 좋아. 물론 기본적인 예의와 상식은 있는 사람 중에서 말이야.”
반테온은 경비병에게 건네받은 지시봉을 들었다. 쇠창살 사이로 가느다란 지시봉을 넣어 천천히 델로즈를 향했다. 날카로운 막대의 끝이 델로즈의 가슴팍을 향했다. 단정하지 못하게 풀어 헤친 셔츠 사이를 지시봉으로 톡톡 두드렸다.
얇은 천이 지시봉의 움직임을 따라 팔랑거리고, 단단한 가슴 윤곽이 보인다.
“이렇게 단정치 못한 꼴로 다니는 야만인은 절대 아니겠지.”
“너…….”
항의하려고 입을 여는 델로즈를 기다리지 않고 일어섰다. 구겨진 복장도 깔끔하게 정리했다. 앉기 전과 똑같이 주름 하나 없는 완벽한 모습으로 델로즈를 내려다봤다.
“무슨 생각인지는 이해하겠는데, 알아서 적당히 정리해. 약도 잘 챙겨 먹고.”
그래야 앞으로 얼굴 붉힐 일 없이 편안하게 지낼 것 아닌가. 어차피 델로즈와 가이딩이 가능한 새 가이드를 찾거나, 지금의 상황을 해결하기 전까진 지겨워도 오래 봐야 하는 얼굴이다. 불편한 관계는 서로에게 마이너스다.
그대로 독방을 나서려던 반테온의 발걸음이 멈췄다. 아, 맞다. 이 말을 하는 걸 깜박했다. 반테온은 몸을 반쯤 돌려 사나운 델로즈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내 취향이 되긴 어려울 테니까. 허튼 기대하지 말고. 알겠지?”
마지막 관용으로 델로즈를 향해 화사하게 미소 지어 주며 독방을 나섰다. 두꺼운 철문이 쇳소리를 내며 닫히고 다시 자물쇠를 잠갔다.
저벅저벅. 단정한 구두 소리가 삭막한 복도에 울려 퍼졌다.
반테온의 실루엣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델로즈는 철문 사이로 작게 난 창문으로 그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꽉 쥔 손아귀 안에서 수갑을 이은 사슬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
며칠 참지 못하고 독방을 뛰쳐나오지 않을까 하는 고민과 다르게 델로즈는 조용히 그 안에 갇혀 있었다. 뒤늦게 철이 든 모양이라 생각하며, 반테온은 여유로운 생활을 즐기려고 결심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일은 그렇게 쉽게 흘러가지 않았다. 오늘도 방을 찾아오는 상자 더미에 숨을 내쉬었다.
그전에도 에슬란테를 향한 선물 공세는 심심찮게 있었다. 최근엔 정도가 심해져 단말기 알람을 꺼야 할 수준이다.
처음 반테온과 델로즈가 임시 매칭을 했다는 소식이 돌았을 땐, ‘남자 가이드에게 델로즈가 반응했을 리 없다.’, ‘단순히 매칭률 때문에 잠시 뭉쳤을 것이다’라는 현실에 가깝던 소문이 돌았다.
그런데 얼마 전 델로즈가 몰래 반테온을 찾아갔다가 쫓겨났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이제는 반대 소문이 돌았다. 델로즈가 반테온에게 구애하고, 반테온이 거절하고 있다는 제법 사실과 가까운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 소문을 믿고 누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지 빠르게 판단한 사람들이 바쁘게 선물을 구해 나르는 것이다. 귀찮게도 말이지.
반테온은 쌓인 상자들을 대충 옆으로 치웠다. 딱히 포장을 풀 마음도 들지 않는다. 어차피 조금 있으면 집안에서 나온 사용인이 거둬 갈 것이고, 꼬장꼬장한 장로들이 선물의 정성을 보고 알아서 판단하겠지.
“응?”
반테온이 선물 상자를 한쪽으로 치우던 중 의미심장해 보이는 상자를 찾았다. 방으로 보내진 수많은 선물처럼 고급스럽게 포장된 물건에 이상하게 눈이 갔다.
이유가 뭘까? 천천히 다가가 양손으로 상자를 들었다. 제법 묵직한 무게감이 길쭉한 모양은 위스키 상자와 비슷했다.
궁금한 마음에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예상대로 붉은 천에 포장된 술병이 있었다. 단단히 묶인 천을 풀다가 반테온의 손이 멈췄다. 포장을 풀고 보니 술병을 감싼 건 붉은색이 아니라, 검은색이었다.
‘이게 뭐지?’
반테온은 눈을 깜박이고 다시 들여다봤다. 역시 병을 감싼 천은 검은 벨벳이었다. 붉은빛은 천이 아니라 병에서 나고 있었다. 겉에 싼 천의 색이 달라 보일 정도로 환한 붉은색을 내는 액체라니.
천천히 병을 드니, 안에서 찰랑거리는 빛이 더 강해졌다. 그 움직임을 바라보던 반테온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이 기운은 어딘가 익숙했다. 분명, 에스퍼 주변을 맴도는 그들의 기운을 볼 때와 비슷한 움직임이었다.
이제는 사람이 아니라 물건에 담긴 기운도 볼 수 있는 것일까.
처음 센터에 왔을 때, 반테온은 자신과 같은 사례를 찾기 위해 도서관에서 긴 시간을 보냈다. 거대한 도서관을 모두 뒤지다시피 했으나 비슷한 문구 한 줄도 찾지 못했다.
한정된 사람만 출입이 허가되는 금서관을 가면 있을지 모르나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살아가는 데 불편함도 없었고, 괜히 금서를 뒤져서 주목받을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런 이유로 반테온은 자신의 능력에 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애초에 남에게 물어볼 성질의 능력도 아니었으니까.
병을 다시 포장하고, 처음과 똑같이 담아 상자 뚜껑을 닫았다. 역시 상자를 닿아도 은은한 붉은빛이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이것 때문에 상자에 눈이 갔다.
반테온이 뚜껑을 닫자 그제야 상자 앞면에 박힌 그림을 알아챘다. 세 가지 종류의 꽃이 반대편을 바라보고, 그 사이를 날카로운 가시 줄기가 감싸고 있었다. 입에서 절로 휘파람이 나왔다.
“실물로 보는 건 처음인데.”
반테온은 순수하게 감탄하며 꽃 그림을 바라봤다. 찔레꽃과 장미, 바람개비 꽃이 어우러진 그림은 음지에서 나름 유명한 ‘마담 레쏘’의 상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