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시간이 흘러 어두운 밤이 되자, 마지막으로 가고 싶다며 케슬란이 제안한 장소에 도착했다. 자동차가 멈추고 헤드라이트에 비친 건물을 보자 반테온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여기 괜찮으세요?”
“나쁘진 않네.”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케슬란에게 상냥하게 대답했다. 어쩐지 독실에 개인 공간만 찾아 안내한다 싶더니, 마지막 장소는 수도 외곽에 있는 조용한 바(Bar)였다.
도심과 살짝 떨어져 찾아오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을 위치. 노골적으로 호텔 아래 위치한 술집이라. 투명하게 보이는 의도가 귀여울 지경이다.
직원의 안내를 따라 사방이 까맣고 어두운 복도를 지나갔다. 사적인 만남을 위한 가게인지, 넓은 홀보다는 각각의 룸으로 이뤄져 있었다.
그중에서도 깊숙한 위치로 안내한 직원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메뉴판을 들고 왔다.
“선생님은 어떤 걸 좋아하세요?”
“음…….”
케슬란에게 주량이 괜찮냐고 물어보려던 반테온이 조용히 말을 넣었다. 저렇게 보여도 에스퍼다. 그것도 A급 에스퍼인 케슬란은 어지간한 술로는 취기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매번 귀여운 외형 때문에 잊을 때가 많았다. 반테온은 적당히 즐겨 마시던 술을 골랐다.
“난 이거면 충분해.”
“좋아요. 그럼 저는 …어… 단 종류가 뭐가 있지.”
메뉴판을 쥐고 열심히 고민하는 케슬란의 모습을 지그시 살펴봤다. 아무리 어른스러운 척을 해도 아직 미숙하다. 처음 보는 술 종류에 눈동자가 빠르게 돌아가는 머릿속이 훤했다.
데이트의 마지막까지 확실히 끌고 가려는 모습이 기특했으나 이런 것까진 어렵겠지.
반테온은 케슬란이 야무지게 쥐고 있는 메뉴판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순식간에 뺏긴 메뉴판에 케슬란의 눈이 동그래졌다.
“앗…….”
“오늘 데이트 준비하느라 고생했어. 여기선 내가 추천해도 될까?”
반테온의 제안에 놀란 케슬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너무 어색했나요?”
“이런 곳은 내가 더 익숙할 테니까. 좋아하는 종류가 있어?”
“사실 잘 몰라요…….”
케슬란의 목소리가 기어갈 듯 작아진다. 적당한 위스키와 단맛이 강한 샴페인을 골라 주문하자 잠시 후 술과 안주가 들어왔다. 양은 많지 않았다. 저녁으로 이미 배가 부른 상태에서도 충분히 즐길만한 정도였다.
케슬란은 반테온이 추천해준 달곰한 술을 양손으로 쥐고 홀짝거렸다. 처음 술이 도착했을 때, 패기 있게 반테온의 잔에 입을 댔다가 높은 도수와 쓴 뒷맛에 놀란 뒤로 자신의 잔만 꼭 쥐고 있었다.
어디선가 은은한 음악이 작게 들리고, 둘만 남은듯한 공간에선 이런저런 말도 편하게 나왔다. 연극에서 봤던 이야기, 두 사람이 센터에서 지냈던 이야기까지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저 선생님께 사과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요.”
“무슨 일인데?”
“선생님이 뭘 좋아하실지 몰라서…… 데이트를 준비하다가 제가 실수를 했거든요.”
케슬란의 말에 마시던 술잔을 잠시 멈췄다. 케슬란은 쭈뼛거리며 양손을 모으며 이야기했다.
“저희 오늘 약속이 이미 소문난 건 알고 계시죠?”
“그래.”
잔뜩 풀이 죽은 케슬란이 고개를 숙이자 동그란 정수리가 보였다. 술기운이 적당히 올라 붉어진 귓등이 반질거린다.
“조용히 알아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크게 소문이 날 줄은 몰랐어요.”
어딘가 찝찝하던 사실을 먼저 털어놓는다. 쌉싸름한 술잔을 기울였다.
유감스럽긴 했다. 평소 행실을 조심하던 케슬란답지 않다는 생각도 했었다. 게다가 단순히 데이트에 관련된 소문이 아니라, 두 사람이 정식 매칭을 할 것이란 소문까지 뒤따랐다.
케슬란 바이헤론의 가문은 A급 에스퍼를 배출한 곳답게 제법 이름난 편이다. 과연 이렇게 될 걸 예상 못 했을까. 어린아이의 과시욕이라 치부하기엔 과한 행동이다. 반테온이 아무 말 없이 술잔을 기울이자 기가 죽은 케슬란의 어깨가 더 움츠러들었다.
어차피 추궁한다고 답을 들을 수도 없을 테고, 괜히 술맛만 버리겠지.
“아니. 그럴 수도 있겠지.”
반테온이 관대하게 이야기하자 푹 숙인 얼굴에 화색이 돈다. 한껏 밝아진 표정으로 술잔을 들어 긴장한 목을 축였다.
어차피 케슬란에게 진심을 줄 생각도 없었고, 오늘도 하루를 즐기려는 생각밖에 없었으니까. 해명을 들어도 찝찝한 마음이 남는다면 오늘이 지난 후 멀어지면 그만이다. 따지자면 자신이 더 속물 아닐까.
“재미없는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케슬란.”
메뉴판을 쥔 케슬란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당황하며 동그랗게 눈을 홉뜨는 상대를 보며 웃었다.
초승달처럼 얕아진 눈매로 웃으며 바라보자 그의 뺨이 발개졌다. 어설프고 서투른 부분이 있으나 이런 의미를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어리진 않다. 슬며시 손가락으로 손등을 쓸다가 케슬란의 손목을 쥐었다. 여린 손목 안쪽 살을 손가락으로 훑자 얇은 손목이 파르르 흔들렸다.
“방은 잡았어?”
“네? 네…….”
그랬겠지. 아니면 이런 공을 들이고 차도 부르기 힘든 외진 곳에 올 이유가 없다.
홀린 듯이 대답하는 상대의 팔을 당겼다. 분명 상대는 A급 에스퍼인데 반테온이 끌어당기는 대로 팔이 따라온다. 눈앞까지 따라온 손가락 사이에 입술을 가져갔다.
촉 소리 나게 손가락뼈 위에 키스하고 고개를 들어 발갛게 익은 케슬란을 향해 웃었다.
“슬슬 올라갈까?”
“아…….”
순진한 척 얼굴을 붉히는 모습도 연기일 지도 모른다. 그래도 보기 귀여운 건 사실이니까. 이런 내숭은 싫지 않았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면 어떤가. 일단 오늘 밤은 즐길 생각이다. 적당히 취기가 오른 몸은 다른 자극을 원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케슬란은 힘이 풀린 발걸음으로 반테온의 옆에 붙었다. 주변에 에스퍼가 많은 반테온은 이 정도 알코올에 에스퍼가 취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 행동을 묵인했다.
어차피 올라가면 실컷 붙을 몸인데, 서두르는 모습에 설핏 웃음이 배어 나왔다.
-타닥. 타다닥.
방을 빠져나와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중 등 뒤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한두 사람의 소리가 아니었다. 여러 명이 내는 구둣발 소리는 점차 두 사람과 안내하는 직원을 향해 다가왔다.
“선생님, 가만히 계세요.”
뒤돌아보려는 반테온을 제지하고 케슬란이 등 뒤를 막아섰다. 조금 전 비틀거리던 발걸음이 거짓인 양 다가오는 발소리에 집중하며 자세를 갖춘다.
점차 소리가 가까워지자 몸을 돌려 정면을 확인한 반테온은 다가온 사람들을 확인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대로 풀리는 일이 없다.
“너희들. 대체 누구…….”
“케슬란. 진정해.”
반테온은 팔을 올려 케슬란의 어깨를 짚었다. 당황하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케슬란을 보고 쓰게 웃었다. 다 큰 성인 두 명이 합의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겠다는데, 왜 이리 방해가 많을까.
“반테온 님. 죄송합니다.”
어느덧 바로 앞까지 다가온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한목소리를 내며 허리를 숙였다. 반듯한 정장이 구겨질 정도로 허리를 90도로 숙여 인사를 건넨 자들이 다급하게 허리를 펴고 얼굴을 들었다.
“선생님?”
“우리 가문 사람들이야.”
데이트를 시작한 순간부터 뒤에서 몰래 감시하던 에슬란테의 경호원들이었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눈동자를 굴리던 케슬란의 입이 벌어졌다.
“아, 에슬란테의…….”
케슬란이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다가오는 덩치들을 살폈다. 몰래 경호가 붙었다는 사실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반테온이 자신을 믿지 못한다고 실망할지도 모르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반테온 정도의 인물이 A급 에스퍼와 홀로 동행할 리가 없지 않은가.
“무슨 일이야?”
“큰일 났습니다. 지금 당장 센터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대장으로 보이는 경호원의 말에 미간이 찌푸려진다.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모를 사람들이 아닌데, 굳이 센터로 돌아가자고 말하는 것일까.
“지금?”
“죄, 죄송합니다. 그 상황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인 경호원은 곁눈으로 케슬란을 바라봤다. 이미 분위기가 험악해지자마자 직원은 도망간 후였고, 복도에 남은 사람은 반테온과 케슬란뿐이었다.
“그냥 이야기해.”
“넵!”
몸을 바짝 세운 경호원은 군기가 든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방금 센터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오늘 저녁 9시 53분경. 독방에서 수감 중이던 델로즈 님이 탈출하셨습니다. 20분이 지난 현재까지 위치가 파악되지 않습니다. 현재 델로즈 님의 임시 가이드인 반테온 님에게 보호령이 떨어진 상태입니다.”
“뭐?”
“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델로즈 님이 방금 독방을 탈출하셨습니다!”
반테온의 반응이 없자 다시 길게 설명하려는 경호원의 말을 멈추고 못에 박힌 듯 자리에 굳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지금까지 얌전히 독방에 갇혀있던 델로즈가, 왜 며칠을 남기지 않고 독방에서 탈출했을까.
어디 갔기에 아직 발견도 되지 않고…….
“선생님…….”
등 뒤에서 반테온만큼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불안하게 떨리는 케슬란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반테온의 재킷을 손에 꽉 쥐고 있었다.
설마 돌아가는 건 아니겠죠? 이대로?
그런 애타는 눈빛을 보며 반테온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은 좋다. 반테온 역시 기다려 온 순간이었다. 하지만 타이밍이. 이 망할 타이밍이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