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에스퍼를 피하는 방법 (51)화 (51/112)

#51

한 걸음 뒤로 물러서자 델로즈가 성큼성큼 걸어 옆으로 다가왔다. 어두운 방에서 그의 금안이 반짝인다. 반테온의 얼굴을 뚫어지라 바라보고 눈을 마주치더니 단단한 입꼬리를 올렸다.

“나 없는 동안 재미가 좋았나 보던데. 얼마나 즐겁게 지냈으면, 독방까지 소문이 들리더군.”

델로즈가 들은 소문은 뻔하다. 반테온과 케슬란이 오늘 데이트할 거라는 이야기겠지.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만든 덫에 노리지도 않았던 두더지가 반응했다. 독방에 있는 델로즈가 어떻게 그 소식을 들었을까 고민했다. 답은 쉽게 나왔다.

이해하기 어려워도 센터에는 그를 따르는 자들이 존재했다.

SS급이라고 칭송하는 한심한 추종자도 생기고, 그와 함께 센터에 들어온 페턴도 있었다. 독방에 있는 그에게 반테온의 소식을 전해줄 사람은 많았다.

누구에게 들었든 결국 자신의 임시 가이드가 데이트한다는 소식에 분노하여 밤늦게 이 난리를 피운 것이다.

반테온은 이마로 내려온 앞머리를 쓸었다.

“그래. 방금까지 즐거웠지.”

“부정하지도 않는군.”

그 말에 코웃음 쳤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반테온이 조심해야 할 이유가 없다. 성인 두 명이 만난다고 문제 될 일도 아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위치를 망각한 ‘임시’ 에스퍼에게 감출 일도 아니다.

“딱히 숨길 필요도 없잖아.”

그 대답에 델로즈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전에 내가 한 말은 까맣게 잊은 것 같은데. 다른 에스퍼와 만날 생각하지 말라고 경고했어.”

“너야말로 잊은 것 아니겠지? 난 분명 네 제안을 거절했어.”

덩달아 자신의 취향이 아니니 알아서 마음 정리하라고, 독방까지 내려가 친절히 설명해주지 않았던가.

델로즈 주변에 일렁이는 붉은 기운이 흉흉하다.

명백하게 느껴지는 질투와 독점욕이 델로즈 주변에 넘실거린다. 독방에서 나온 후 반테온은 약을 신청하여 델로즈에게 보냈다. 챙겨 먹는지 확인할 수 없었으나 지금 상태를 보면 아마 쓰레기통으로 직행한 것 같다.

어서 저 한심한 녀석이 치료되어야 할 텐데. 약을 지어 보낼 순 있어도 강제로 먹일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전보다 더 예민해진 델로즈의 모습에 한숨을 쉬었다.

“그 꼬맹이는 까다로운 네 취향에 딱 들어맞나 보군.”

“그것도 네게 말할 이유는 없겠네.”

델로즈가 견제하는 케슬란도 이제 슬슬 정리할 예정이지만, 굳이 사실을 알려줄 필요는 없다. 반테온은 대답을 돌리고 팔짱을 꼈다.

“진심을 담아서 이야기하는데. 이렇게 행동하면 나중에 후회할 수 있어.”

정말로 나중에 벽을 부수고 싶을 정도로 수치스러울지도 모른다. 가이드 자각 증후군이 완치된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반응이었다. 가이드에게 과하게 집착했던 과거를 부끄럽게 여기며 숨기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어리고 철없는 에스퍼들이 자신의 과거가 낯간지러워 파고드는 귀여운 모습도 아니고, 덩치가 곰만 한 SS급이 부끄러워하는 꼴은 생각만 해도 거북하다.

반테온의 경고에도 델로즈는 낮게 코웃음으로 일관했다. 찾아왔을 때부터 묘하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계속하여 반테온을 바라봤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꼬맹이는 안 돼.”

대화가 계속 제자리를 맴돈다. 대체 케슬란의 어떤 점이 델로즈를 저렇게 자극한 것일까. 단순히 반테온 곁을 맴돈다고 싫어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네가 신경 쓸 사안이 아닌 것 같은데.”

“왜 그 뱀 같은 녀석을 만나고 있는 거지? 능력도 없으면서 사납고 음흉한 놈인데.”

델로즈의 입매가 비스듬하게 올라갔다.

“욕심이 눈에 보일 정도로 넘쳐.”

케슬란이 아무리 예상과 다른 구석이 있다 하여도 델로즈에게 부정적인 소리를 들을 인성은 아니다.

“케슬란의 진짜 성격이 어떻든 너보단 나으니까 설명할 필요 없어.”

“그런 건 굳이 되짚어 주지 않아도 잘 알고 있어.”

그리 답하는 델로즈의 미간은 잔뜩 주름져 있었다.

“넌 누구를 데려와도 나보다는 괜찮다 하겠지. 야만스럽지도, 징그럽게 크지도 않을 테니까.”

그답지 않게 자조적인 말투에 어깨를 으쓱였다. 징그럽다고 비하한 적은 없었는데 말이다.

“매정하게 생각하지 마. 내 취향은 확고한 편이야. 오랫동안 바뀐 적도 없고, 바꿀 필요도 없었어. 앞으로도 그럴 테니 미리 말해두는 것뿐이야.”

“그것참 고맙군. 신경 써줘서.”

씁쓸하게 말하는 모습에 더 머리가 아프다. 반테온은 손을 내저으며 귀찮다는 듯 이야기했다.

“……네가 그러지 않아도 이제 안 만날 거야.”

“그래?”

“어차피 정리할 생각이었으니까. 신경 쓰지 마.”

목소리가 한층 밝아진 델로즈가 천천히 다가왔다. 부끄러울 만큼 노골적인 감정 변화다. 델로즈가 조금씩 다가오더니 반테온의 얼굴에 닿을 듯 가까워진다. 갑작스러운 접근에 몸을 뒤로 빼며 주춤하자 단단한 팔이 반테온의 가운 자락 양쪽을 당겼다.

그의 손이 자각도 못 한 사이 벌어진 반테온의 가운 앞섶을 잡아 모았다. 상체가 따라 흔들릴 만큼 강한 힘이었다. 가운이 쇄골뼈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단단히 여며지고, 목까지 꽁꽁 싸매자 델로즈의 입술이 만족스럽게 휘었다.

“단단히 입고 다녀. 또 열 오른다.”

델로즈는 꽉 여며진 반테온의 옷깃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살벌한 표정과 다르게 소중한 것을 다루듯 조심스러운 손짓이다.

그 모습에 반테온은 머리를 손으로 지그시 눌렀다. 케슬란을 만나지 않겠다는 말에 거짓말처럼 달라지다니. 아주 중증이었다.

“제대로 치료받아. 델로즈. 서로를 위해 그게 최선이야.”

한심하게 내뱉은 말에 델로즈가 조용히 대답했다.

“넌 진심으로 내가 병을 앓는 중이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그래.”

“네가 나에게 바라는 건 그것뿐인가?”

“맞아. 빨리 나아서 원래대로 돌아왔으면 좋겠어.”

차라리 재수 없고 신경 긁는 안하무인일 때가 나았다. 최악이라고 생각했던 그때 상태보다 더 나빠지다니 감탄이 나올 지경이다.

소망으로 조금 더 바라자면 빨리 다른 가이드를 찾아서 떠나줬으면 좋겠지만, 여기서 그것까지 이야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반테온의 단호한 대답에 델로즈가 잠시 창밖을 바라봤다.

“내가 치료를 받으면 넌 뭘 해줄 거지?”

“뭘 해줘야 해?”

“응.”

뻔뻔하게 방에 쳐들어온 주제에 부탁까지 남긴다. 왜 그래야 하는지 되묻자 델로즈가 씁쓸한 표정으로 힘없이 웃었다.

“얌전히 독방으로 돌아가서 네가 원하는 대로 치료받고 끝날 때까진 사고 치지 않는다고 약속하지.”

“그건 당연한 일이야.”

“너희들의 상식이 내겐 당연하지 않다는 건 잘 알 텐데. 난 이대로 있어도 상관없어.”

센터의 규칙을 지킨다든지. 밤중에 초대받지 않은 곳에 방문하지 않아야 한다. 같은 기본적인 예의를 델로즈는 처음부터 이해하지 못했다. 그와 조난되었을 때 들렀던 마을을 떠올리면 당연했다.

고상한 예의를 지키면서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은 확실히 아니었지.

평민으로 살아왔으며 누구의 말도 들을 필요가 없는 SS급 에스퍼에게 브레이크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얼마가 걸리든 정해진 치료를 받고 나온다고 맹세할 테니, 너도 한 가지만 약속해.”

“일단 들어나 보자.”

“다음에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반드시 나를 불러.”

위험한 일이란 말에 인상을 썼다.

“네 주변에 잘 보이고 싶어서 안달이 난 다른 에스퍼 말고, 날 부르란 말이다. 임시라고 해도 내가 네 에스퍼니까.”

“…….”

침묵이 길어지자 델로즈의 미간이 깊어졌다.

“그 정도도 바라면 안 되는 건가?”

씁쓸하게 들리는 목소리는 어딘가 그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델로즈의 지적은 정확했다. 만약 반테온에게 위험한 일이 생기거나, 혹은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긴다면, 아마 테아로트나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할 것이다. 마지막까지 델로즈에게 연락이 가는 일은 없을 테지. 그 점을 정확히 지적한 말에 입을 닫았다.

생각해보면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다. 자신을 부려 먹어 달라는 말을 거절할 필요도 없다. 그저 독방을 탈옥하여 찾아온 사람의 부탁이 이런 하찮은 것이란 사실이 어이없을 뿐이었다. 고개를 돌려 벽을 바라본다. 시계는 어느덧 자정을 훌쩍 지나고 있었다.

밖에는 윙윙 울리는 경고음이 요란하다. 수색을 위해 돌아다니는 경비병들의 움직임도 활발하다. 다들 예정에 없던 수색에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모두 델로즈의 변덕 때문에 구르고 있는 사람들이다. 반테온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괜히 쓸데없이 다른 사람 고생시키지 마.”

“…….”

“좋아.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그땐 널 부를게.”

델로즈의 눈매가 부드러워지고 불길 같던 시선이 잦아들었다. 원하는 대답을 듣자 그대로 몸을 돌렸다.

“대신 정해진 시간 동안 얌전히 치료를 받는다고 약속해.”

“그건 확실히 지키지.”

창문을 향해서 나가던 단단한 등이 잠시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역광에 보이지 않는 표정으로 조용히 반테온을 응시했다.

“혹시 내가 오늘 밤 찾아온 사실이 알려지면 문제가 될까?”

갑작스러운 말을 이해 못 한 반테온은 고개를 기울였다. 세상 무서울 것 없이 살던 델로즈가 물었다곤 믿기 힘든 말이다,

문제가 생기는 걸 고민하기엔 늦었다. 그런 고민은 독방을 나오기 전에 미리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어이없는 질문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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