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에스퍼를 피하는 방법 (52)화 (52/112)

#52

“문제는 이미 생겼지. 독방을 탈주했으니 다시 징계 회의가 열릴 거야.”

“아니. 나 말고 네게 말이야. 네 평판이라든가. 소문이라든가…….”

“나에게?”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자 델로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평판과 소문이라. 반테온은 처음부터 세간의 주목을 안고 태어났다. 그의 첫울음이 터지는 순간부터 신문 1면을 장식하지 않았던가. 인제 와서 소문을 신경 쓰기도 새삼스러웠다.

그걸 왜 델로즈가 걱정하는 거지? 질문의 의도를 알 수 없어 말을 멈추자 델로즈의 미간이 더 깊어졌다. 쯧 하고 작게 혓소리를 내며 그대로 몸을 돌려 창틀을 잡고 올라탔다.

까만 몸이 망설임 없이 밑으로 뛰어내린다. 바닥에 닿는 소리도 없이 조용하다. 창문으로 다가가 밑을 내려다보자 어느새 그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간 것일까. 이렇게 싱거운 약속만 남기고 사라지다니. 도무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며 창밖을 바라봤다.

멀리서 눈 아프게 반짝이던 붉은 등이 꺼진다. 요란하던 신호음도 동시에 멈췄다.

-찾았습니다!

먼 곳에서 경비원의 고함이 울리면서 희미하게 들린다. 그는 반테온의 방을 떠나서 그대로 독방으로 향했다. 이제는 진짜로 쉬어도 괜찮을 것 같다.

생각보다 긴 하루였다. 아침부터 데이트 준비로 부지런히 움직인 피로가 그제야 몰려들었다.

암막 커튼으로 창을 완전히 가리고 완벽한 어둠이 찾아온 침대 위에 긴장이 풀린 몸을 편안하게 눕혔다.

***

평소보다 늦은 기상 시간이다. 알람도 듣지 못했는지 이미 암막 커튼 사이로 밝은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깜빡. 깜빡.

테이블 위에 붉은 불빛이 반짝인다. 어제 바로 잠든 탓에 그대로 테이블에 방치된 단말기였다. 아직 몽롱한 머리를 털고 단말기를 잡아 쥐었다. 흐린 눈으로 화면에 띄워진 쪽지를 확인했다.

반테온에게만 개인적으로 전달된 쪽지는 오늘 오후 델로즈의 징계 위원회가 열릴 예정이니 참가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저번 징계 회의 땐 피해자와 가해자를 격리한다는 이유로 반테온이 참가하지 않았으나, 이번엔 대외적으로는 반테온과 무관한 일이기에 초대장이 왔다.

무심하게 단말기 화면을 톡톡 쳤다.

처음 징계받은 델로즈의 죄목은 가이드에게 무단 접근법 위반이다. 보통 1달의 독방형이 내려지는데, 델로즈는 15일로 그쳤다.

아직 성도 하사받지 않은 델로즈지만, 교육을 수료하고 가문을 받는 순간 에슬란테만큼 영향력 있는 존재가 될 것이다. 미리 줄을 대려는 사람들이 눈치껏 형량을 줄인 거다.

그나마 15일이 나온 것도 상대가 반테온이기에 나온 결과였다. 만약 피해자가 평범한 센터 가이드였다면 없던 일로 덮었을 것이다.

이번 탈출은 반테온이 엮이지 않았다고 생각할 테니, 더 가볍게 처리되겠지.

어제 소란을 생각하면 아예 모르는 척은 힘들 테고, 눈치를 봐서 슬쩍 일주일 늘리는 정도. 구색만 갖추고 델로즈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방향으로 정해질 것이다.

팔을 들어 스트레칭하며 몸을 일으켰다. 어디 SS급 눈치 보느라 무거운 엉덩이 들썩거릴 어르신들을 보러 가보실까.

반테온은 걸친 가운을 벗고 즐거운 구경을 하기 위해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

회의실 내부 좌석엔 사람들이 많이 앉아 있었다. 빈자리는 거의 없었다. 일반적인 징계 회의 때 1/3 정도 비었던 걸 생각하면 높은 참석률이다.

반테온은 주변을 여유롭게 살피며 지정된 자리에 앉았다.

“그럼 이번 징계의 대상자를 데려오십시오.”

잠시 후, 센터장이 징계 회의 시작을 알리자 회의장 한쪽에 준비된 문이 열렸다. 양쪽에 보안 요원이 붙은 델로즈가 그 속에서 느긋하게 걸어 나왔다. 전에 봤던 모습처럼 풀어 헤친 셔츠에 대충 흐트러진 머리였다.

그런데도 웅성거리던 소음이 모두 멈췄다. 수군거리며 서로 귓속말하던 사람들도 동작을 멈추고 델로즈를 바라본다. 확실히 인정하기 싫지만, 존재감 하나는 대단하다.

큰 체구 덕도 있겠지만, 양손에 찬 수갑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위압감이 느껴지는 분위기는 확실히 다른 이들에게 찾기 힘들었다. 반테온은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대며 다리를 꼬았다.

겉모습만 멀쩡할 뿐, 속은 이상하게 꼬이다 못해 머리도 멀쩡하지 않은 놈일 뿐이다.

“센터 교육생 신분인 SS급 에스퍼 델로즈의 위반 사항은 아래와 같습니다.”

센터장의 옆에서 비서관이 부지런히 델로즈의 행실을 읊었다. 처음 독방에 갇혔던 사유부터 독방 수감 중에 무단으로 탈출한 일을 이야기하며 추가로 덧붙은 항목도 읽었다.

“에스퍼 델로즈는 몇 시간 동안 사라진 행방을 아직 밝히지 않았으며, 반성하는 기미가 없음을 고려하여 주십시오. 그럼 의견 있으신 분 계십니까?”

그 말에 턱을 슬며시 쓸었다. 아직 탈출해서 반테온의 방을 찾아온 건 밝히지 않은 것이다. 물론 델로즈가 반성의 기미가 없다고 해서 형이 늘진 않을 것이다.

그 증거로 중앙에 선 델로즈의 태도는 여유롭기 그지없었고, 오히려 델로즈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델로즈의 편을 들어 형을 줄이고 눈도장을 찍어야 하는데, 저런 태도로 있으니 꺼낼 말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도 아직 갈아입지 못한 옷을 보면, 분명 탈출한 이유를 아침까지 추궁당한 것일 텐데, 대체 왜 입을 다물고 있을까.

‘혹시…….’

창문을 나가기 전, 그가 마지막으로 반테온에게 물었던 것이 떠올랐다. 설마 자신이 답하지 않은 이유를 마음대로 추론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처음에 방을 찾아와 행패를 부렸을 땐 오해받아도 상관없다고 하더니 뒤늦게 이목을 신경을 썼다. 홧김에 일을 치고 나서 진짜 불쾌한 소문이 돌기 시작하기 정신을 차린 것일까. 아니면….

‘설마 내가 싫어한다고 생각해서?’

갑자기 바뀐 행동의 이유는 그것밖에 없었다. 믿기 힘들어도 가장 유력한 가설이었다.

“……아직 에스퍼 델로즈는 교육생 신분으로 센터의 규칙에 적응하지 못했지 않습니까?”

“그래요. 애초에 교육받지 몇 달 되지 않은 사람을 독방에 넣는 것 자체가 과한 처사였습니다.”

“맞습니다.”

SS급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열심히 꼬리 흔드는 사람들의 모습은 제법 볼만한 구경거리였다.

어떻게든 델로즈를 두둔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주목받아 눈도장 찍기 위해 몸부림쳤다. 반테온은 어디 가서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는 분들의 재롱을 여유롭게 지켜봤다.

센터장은 특유의 사람 좋은 얼굴로 허허허 웃으며 말도 안 되는 변호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응?’

기분 탓일까.

델로즈를 보던 센터장의 시선이 반테온을 향했다. 아주 짧게 스쳐 지나간 시선의 의미를 알기도 전에, 센터장의 말이 나왔다.

“여기 계신 분의 뜻은 다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에스퍼 델로즈가 탈출한 사실로 추가 징계가 필요 없다는 의견이 많아 보이는군요.”

“아니 뭐, 아예 안 하는 건 아닌데…….”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그냥 조금 적당히만 진행하잔 뜻이지요.”

신나서 변호할 땐 언제고 이제 와 발을 빼기 바빴다. 델로즈에게 잘 보이고 싶으면서 총대는 메기 싫은 것이다. 징계 수위를 알고 싶어 기다리는 사람이 회의실 밖에 한 부대가 있었고, 가벼운 처벌을 받으면 불공평하다는 화살이 쏟아질 테니까.

델로즈에게 잘 보이고 싶기도 하고, 비난은 받기 싫고. 중간에서 줄타기하느라 바빠 보이는 모습이다. 그 중앙에 앉은 델로즈는 크게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오래도 쫑알거리네.”

한편의 희극 같은 상황을 남의 일처럼 바라보고 말했다. 델로즈는 지겨운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더니, 이내 팔짱을 낀 채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손에 달린 수갑이 잘그락거렸다.

아양 떨고 싶은 귀족들의 속사정을 모르는 델로즈는 몸을 등받이에 기댄 채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냥 며칠 더 독방에서 썩어야 하는지나 말해. 귀찮으니까.”

그 무례한 행동을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다. 그저 기분 나쁜 델로즈의 눈과 마주칠까 서둘러 시선을 돌리는 사람들밖에 없었다.

곤란한 사람들 사이에서 센터장만 여유롭게 웃으며 응대했다.

“허허허. 금방 끝내겠습니다. 그럼 판결을 내려도 되겠지요?”

그 말에 사람들의 고개가 격하게 끄덕였다. 센터장은 규칙이 적힌 두꺼운 책자를 넘겨 한 곳을 읽었다.

“독방에서 탈출한 자는 수감 기간을 두 배로 늘리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에스퍼 델로즈는 아직 교육받지 얼마 되지 않은 입장이기에 그 기간을 절반으로 정한다.”

역시.

센터장이 이야기하는 일수에 작게 웃었다. 예상대로 일주일 정도 늘려서 체면을 차리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면 3달은 갇혀야 할 텐데 3주로 해결하는 것이다. 권력이란 참 편리하다.

그 꼴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는 없지. 델로즈의 수감 기간이 늘어야 반테온의 자유도 길어진다.

센터장이 마지막 선포를 위해 두꺼운 재판 망치를 들어 올렸다. 나무판과 부딪히며 맑은 소리를 내기 직전 반테온이 손을 들었다.

“이의 있습니다.”

조용히 판결을 기다리던 사람들의 시선이 동시에 반테온을 향한다. 반테온은 그 많은 눈동자 중, 자신을 바라보는 델로즈의 금색 눈동자를 마주 봤다.

분명히 정해진 기간을 채우겠다고 약속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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