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에스퍼를 피하는 방법 (53)화 (53/112)

#53

“에스퍼 델로즈가 독방에서 탈출하고 행적이 묘연했던 그 시간에 관해 이야기할 것이 있습니다.”

반테온의 말에 조용하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반테온과 델로즈가 임시 매칭을 했다는 걸 알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떤지 아는 자는 적었다.

둘의 사이가 좋을까, 나쁠까. 에슬란테에서 델로즈를 차지하기 위해 수를 쓴 것일까. 그렇게 높은 매칭률을 가지고 왜 임시 매칭만 한 것일까. 그런 의문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

오늘 반테온이 징계 회의에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비슷한 예상을 했다. 반테온이 자신의 에스퍼를 변호하러 왔을 것이다. 에슬란테가 나선다면 아예 추가 징계가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기대와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 반테온은 센터장에게 어제의 이야기를 차분하게 꺼냈다.

“델로즈가 탈출한 날 밤에 제 방을 찾아왔습니다.”

“세상에!”

“…….”

예상도 못 한 발언에 사람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몰래 수군거리던 대화 소리가 반테온의 귀에 들릴 정도로 커졌다. 델로즈가 반테온에 단단히 빠진 것이 분명하다는 추측이 사방에서 들렸다.

“혹시 에스퍼 델로즈의 상태가 나빠져서 반테온 선생을 찾아간 겁니까?”

“아닙니다. 에스퍼 델로즈에게 별도의 가이딩 요청은 없었습니다. 상태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밤늦게 찾아온 그는 그저…… 제게 다른 사람을 만나지 말라는 경고만 남기고 돌아갔습니다.”

“너…….”

여유롭게 기대 있던 델로즈가 허리를 세웠다. 낮게 으르렁거리는 모습에 여유롭게 웃어주며 다른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상황을 파악하느라 분주한 사람들을 훑어보고 마지막으로 센터장을 바라봤다.

델로즈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사실이 있다.

그는 반테온의 평판을 걱정해서 자신의 행적을 숨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반대다. 그날 밤 델로즈의 행동이 밝혀지면 곤란해지는 건 반테온이 아니라 델로즈다.

“에스퍼 델로즈의 명예를 위해 이야기하지 않았으나, 이렇게 된 이상 숨기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에스퍼 델로즈는 지금 심각한 ‘가이드 자각 증후군’을 앓고 있습니다.”

더 커질 수도 없을 만큼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강해지고 덩달아 감탄사가 터졌다.

“독방에 수용된 후 제가 약을 신청한 기록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어쩐지…….”

“뭔가 이상하다 싶었어.”

사람들의 고개가 끄덕여진다. 델로즈가 ‘가이드 자각 증후군’이라면 반테온의 데이트를 막기 위해 탈옥한 것을 바로 이해한 것이다. 어린아이들이나 겪을 증상에 남사스럽다고 중얼거리는 사람도 있었고, 처음이니 어쩔 수 없지 않냐고 두둔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들의 반응은 중요하지 않다. 반테온이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지금 한 발언이 사실입니까?”

“네. 회의에서 진실만을 말할 것을 맹세합니다.”

“무슨 생각이야.”

낮은 목소리가 회의장을 가득 채웠다. 사납게 일렁이는 델로즈의 위압감에 소란스럽던 사람들의 소리가 순식간에 멈췄다. 모두 델로즈와 반테온을 바라보며 숨을 죽인다. 이 넓은 공간에 두 사람만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에 어깨를 으쓱였다.

반테온은 모두 굳은 상황에서 홀로 느긋하게 손을 들어 센터장을 향해 격식 있게 예를 차렸다.

“센터장님. 현재 에스퍼 델로즈의 유일한 임시 가이드로서 발언해도 괜찮겠습니까?”

“허합니다. 말씀하십시오.”

“에스퍼 델로즈의 ‘가이드 자각 증후군’의 치료를 위해 에스퍼 델로즈를 한 달간 격리실로 보낼 것을 요청합니다.”

자리에 가만히 있던 델로즈가 몸을 일으켰다.

“뭐?”

“환자에게는 징계가 아니라 치료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규칙에 어긋나는 처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얼핏 들으면 델로즈를 변호하는 것처럼 들릴 것이다. 옛날에 감옥으로 쓰던 지하 독방보다는 깔끔하고 편의 시설을 갖춘 격리실로 보내는 것이니까.

하지만 반테온에게 델로즈가 독방에 있느냐 격리실에 있느냐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돌바닥보다 단단한 몸을 가진 놈인데, 독방에 갇혔다고 더 불편을 느낄 것도 아니다.

반테온에게 중요한 건 델로즈가 얼마나 오랫동안 자신과 떨어져 있느냐였다.

약속을 지킨다면 정해진 기간을 채우고 치료도 제대로 받는다고 했었지. 그렇다면 기간은 길수록 좋다. 독방에서 몇 주 더 있는 것보다 격리실이 확실하다.

“너 그러려고…….”

반테온이 말을 꺼낸 의도를 알아챈 델로즈는 당장이라도 달려오려는 듯 움직이다 자리에 멈췄다. 다행히 머리가 있으면 사고를 일으키면 안 되지. 어젯밤 맹세를 그사이 잊은 게 아니라면 말이다.

“허허허허”

센터장이 곤란하게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센터장이라면 지금의 상황을 이미 예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델로즈가 사라진 사이 반테온의 방을 찾아온 사실도 이미 알고 있는 듯한 반응이다. 그러면서 아닌 척하는 연기가 일품이었다.

하긴 저런 행동도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덕목이었다. 이 회의장에서 누구보다 그런 연기에 능한 반테온은 그 모습에 맞춰 송구스럽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이미 판결을 내린 상황에서 과한 요청을 드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충분히 이해되는 의견입니다.”

인자하게 휘어 있는 눈빛 가운데 반테온을 살펴보는 날카로운 심이 들어있다. 지금 저 느긋한 행동 뒤로 빠른 계산이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델로즈와 반테온, 누구의 편의를 봐주는 것이 좋을지. 어떤 판결을 내려야 자신에게 조금 더 득이 되는지.

센터장의 계산이 어떤 쪽으로 기울 것일까.

의견을 꺼낸 반테온은 용건을 끝내고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현명한 판단을 내려달라며 센터장에게 자신의 주장을 강조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런 저울질에서 반테온은 한 번도 진 적이 없었으니까.

“그럼 판결을 다시 내리겠습니다.”

긴장한 사람들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각자의 의자 손잡이에 팔을 올린 채 센터장의 판결을 기다렸다. 정작 당사자인 델로즈는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채 다른 쪽을 응시했다. 정확히는 폭로한 반테온 쪽을 더 뚫어지게 노려봤다.

“에스퍼가 독방에서 탈주하여 가이드를 찾아간 경우는 기질에 의한 특수 상황으로 판단하여 별도의 징계를 내리지 않겠습니다.”

처음 결정한 7일의 연장도 취소하겠다는 의미다. 놀라운 말에 사람들이 반응하기 전에 센터장의 말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가이딩을 요청한 것이 아니라 사적인 관계를 추궁한 점. 덧붙여 에스퍼가 가진 신체적 우위로 압박했다는 점을 고려하여 에스퍼 델로즈는 격리실에서 한 달간 ‘가이드 자각 증후군’ 치료받을 것을 선고합니다.”

역시.

센터장은 예상대로 반테온의 손을 들어줬다. 아니, 대외적으로 보면 독방행도 감해주는 것이니 양쪽에게 공평한 판정이다. 당사자인 델로즈가 앞에 놓은 책상을 걷어차고 일어났다.

원형으로 이뤄진 회의실에 델로즈 앞을 가로막은 나무 난간이 쓰러지는 소리가 울린다. 바닥과 높은 천장을 오가며 윙윙거리는 소리가 가라앉는 동안 델로즈의 시선을 오롯이 반테온을 향했다. 그 시선엔 놀라움과 분노, 미묘한 배신감이 얽혀 있었다.

배신감이라니. 그는 처음부터 반테온이 마음에 들지 않는 티를 냈다. 반테온이 델로즈를 꺼리는 만큼 그도 숨기지 않고 적대감을 나타냈다. 언제부터 서로 믿었다고 배신감을 느낀단 말인가.

“그럼 이상 에스퍼 델로즈의 징계 회의를 종료하겠습니다.”

-땅. 땅. 땅.

나무망치가 청아한 소리를 내며 판과 부딪쳤다.

델로즈 옆에서 경호를 위해 대기하던 요원들이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네 명이 붙어서 당기는 힘에도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것처럼 미동 없는 태도로 반테온을 노려봤다. 그의 힘이라면 센터에 있는 모든 에스퍼가 달라붙어도 기별도 가지 않겠지.

모든 걸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서서 강렬한 눈빛만 보낼 뿐이다. 여기서 소란을 피우면 반테온과 약속은 모두 사라지는 것이다. 어떤 사고도 치지 않겠다고 맹세했으니까.

그러게, 약속은 쉽게 하지 말아야지. 징계 기간을 얌전히 버티고 치료받기로 약속한 과거의 자신을 원망하렴.

반테온은 가벼운 걸음으로 출구를 향했다. 한 달간의 자유라. 데이트를 방해받고 하룻밤 고생한 것치곤 후한 보상이었다.

반테온이 회의장 문을 열려고 하는데 인자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센터장이 보였다.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할 일 아닙니까.”

두 사람 다 영혼 한 톨 담기지 않는 인사치레를 주고받았다.

“반테온 님. 바쁘지 않다면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센터에서 가장 바쁘신 분의 요청을 거절할 리가요.”

센터장이 눈짓하자 뒤에서 대기하던 보좌관이 길을 안내했다. 복도를 거치지 않고 센터장의 집무실로 직행하는 문이 열렸다. 번잡한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는 다른 참가자들과 다르게 한적하고 고요한 복도를 따라 걸었다. 이목을 피해 만남을 요청한 이유가 뭘까. 의문을 가지고 조용히 뒤를 따랐다.

저벅저벅

구둣발 소리가 밀폐된 공간에 울리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또다시 작은 문이 보였다. 부드럽게 손잡이를 당기자 반테온에게도 익숙한 센터장의 집무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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