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실내로 들어서자 이미 반테온이 올 것을 예상한 것처럼 손님맞이가 끝난 모습이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방과 방금 준비한 것 같은 다과상까지.
그곳에서 풍기는 고즈넉한 홍차 향이 방을 채운다. 반테온은 안내에 따라 소파에 앉았다.
“차는 입에 맞으십니까?”
“훌륭합니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센터장답게 몇 번 독대한 반테온의 취향을 완전히 꿰고 있었다.
반테온의 취향에 맞게 우려낸 차는 만족스러웠다. 천천히 음미하는 동안 맞은편에 앉은 센터장이 은근한 눈빛으로 응시한다.
반테온은 마주 앉은 노인의 정보를 머릿속으로 읊었다. 왕국에서 유일한 S급 지능계 에스퍼. 이름만 남은 변방의 가문에서 태어나 기적이라 불리던 남자다.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인상 좋은 할아버지처럼 보이지만 가볍게 무시할 인물은 결코 아니다.
“오늘은 저도 놀랐습니다. 신속히 델로즈 님의 신체 수치와 호르몬 검사가 진행될 겁니다.”
충동을 자제하지 못하는 행동, 갑작스러운 태도의 변화, 기존과 완벽히 달라진 성벽까지. 모든 것이 증후군의 증상과 일치하니 결과는 듣지 않아도 뻔했다.
“지금까지 SS급의 기록이 없으니 판정까지 시간은 좀 걸리겠지요.”
“그렇군요.”
에스퍼는 등급에 따라 다른 종족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생체 수치가 다르게 나타났다. 지금 센터에 있는 기록 중 가장 높은 수치는 S급의 것이었다. SS급을 S급의 기준에 맞출 순 없으니 모든 수치를 꼼꼼히 기록하여 장기적으로 변화를 지켜봐야 했다.
필연적으로 결과가 나오는 시간이 남들보다 배로 걸릴 것이다. 겸사겸사 델로즈의 격리 기간이 길어지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데 말이다.
“사실 제가 반테온 님을 뵙자고 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묵묵히 수염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던 센터장이 눈을 뜨고 반테온을 바라봤다. 그리곤 서랍을 꺼내어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사진에는 작은 유리병 하나가 찍혀 있었다. 사진 속 형태를 유심히 살펴봤다. 얼마 전 반테온에게 선물로 들어온 마담 레쏘의 약병이었다.
‘사진으로는 보이지 않는군.’
혹시 이 병도 붉게 일렁이지 않을까 살펴봤지만, 다른 병과 별다른 차이는 없었다. 마담 레쏘의 문양이 박혔을 뿐, 투명한 빈 병에 불과하다.
“이 병이 뭔 줄 아십니까?”
“모릅니다.”
숨 쉴 시간도 없이 거짓이 튀어나온다. 센터장이 사진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반테온 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뒤쪽에선 제법 유명한 물건입니다. 마담 레쏘의 제품이지요. 여러 가지 효과를 내는 약품을 불법적으로 유통하고 있는 곳입니다.”
“이걸 왜 갑자기 보여주십니까?”
“델로즈 님이 습격당한 날 밤. 그분의 힘을 차단했던 약물이 여기 담겨 있었습니다.”
사진을 치우려던 반테온의 손이 멈췄다. 센터장은 사진 속 약병을 가리키며 SS급 에스퍼의 힘을 일시적으로 차단하고, 폭주에 이르게 만든 물건이라 설명했다.
“사실 센터의 기술을 총동원한다 하여도 SS급을 강제로 폭주시키는 건 불가능합니다. 아니, S급만 되어도 센터의 기술로 조절할 수 없죠.”
그 부분은 반테온도 계속 이상하다 생각했다. 당시엔 반테온이 처한 상황이 어려워 깊게 생각하지 않았으나, SS급이 너무 쉽게 폭주의 위험에 노출되었다는 생각을 했었다.
대충 살펴본 사진을 돌려주며 물었다.
“이 병에 에스퍼의 힘을 차단하는 액체가 담겨 있었단 뜻입니까?”
“그렇지요. 병을 수거하고 남은 방울을 조사하니 비슷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한 방울이면 A급 에스퍼가 혼절할 정도의 위력을 지녔습니다.”
인체 실험을 했다고 아무렇지 않게 토로한다. 반테온도 그런 부분에 예민하지 않았지만, 숨 쉬듯 자연스러운 언급에는 인상이 찌푸려졌다.
“대를 위한 희생 아니겠습니까?”
“센터장님의 판단이 그렇다면, 그렇겠지요.”
일개 센터의 구성원인 반테온은 모른 척할 테니, 알아서 책임지라는 말이었다. 그 말에 허허허 하며 소리 내 웃던 센터장이 고개를 숙여 반테온을 조심스럽게 바라봤다.
“사실 이런 말을 드리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상황이지요. 지식의 집약체라 불리는 센터에서 파악할 수 없는 성분이 나타났으니까요.”
“제 의사를 신경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인체 실험을 한다고 고발할 생각도 없었다. 센터장이라면 합법적으로 동의서도 받고 문제 될 구석 없이 철저하게 준비하고 실행했을 테니까. 반테온이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자 센터장은 의뭉스럽게 웃으며 지금까지 대화와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두 분 사이가 이 늙은이 눈에는 제법 좋아 보입니다.”
방금 격리실로 한 달간 보낸 모습을 봤으면서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반테온은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며 다리를 반대로 꼬아 앉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상대다. 센터장이 가볍게 내뱉는 말 속엔 많은 뜻이 숨어 있었다. 반테온이 예상하는 의미도 있을 것이고, 돌아오는 대답으로 더 깊은 내용을 파악하기 위한 함정이 있을지도 몰랐다.
반테온은 말을 돌려 대답했다.
“아직 임시 매칭 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말입니다. 보이는 것만큼 편안한 관계는 아니지요.”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는 말.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은유적인 표현에 센터장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허허허. 저는 반테온 님을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특히 회의에서 봤던 델로즈 님과의 관계도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그랬습니까.”
“네, 예상도 못 한 모습을 봐서 오랜만에 즐거웠습니다.”
숨겨진 뜻은 뻔하다. 이미 델로즈가 센터장의 집무실을 두 번쯤 뒤엎었던가. 사나운 야생 동물의 고삐를 훌륭하게 잡았다고 칭찬하는 것이다. 조련사도 아닌 반테온이 기뻐할 이유는 없기에 그저 못 알아들은 척 찻잔만 들어 올렸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저는 델로즈 님이 에슬란테와 맺어진 지금 상황이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센터장은 사람 좋은 얼굴로 웃었다. 무구한 표정으로 뱉는 저 말이 과연 진실일까. 진심으로 좋아서 뱉는 말일까.
고민할 가치도 없이 당연히 거짓이었다.
“그래서 저희에게 요르민 선생을 보냈습니까? 아니, 요르민 비서관이라고 해야겠군요.”
“허허허.”
들켰다며 너털웃음을 짓는 센터장을 보며 함께 웃어주었다. 능구렁이 같은 영감.
반테온이 센터에서 선생님으로 근무한 지 몇 년이 지났다. 선생님들의 명단과 업무를 파악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처음 요르민 선생을 봤을 때부터 어쩐지 낯설다는 생각에 최근 몇 년 자료를 뒤져도 같은 이름의 교사는 없었다.
요르민이란 이름은 의외의 곳에서 우연히 발견했다. 스치듯 본 배치도에서 센터장 휘하 비서관 요르민 아셀이라고 당당히 적힌 것을 보고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뭐, 사소한 시도였습니다. 델로즈 님은 언제나 예측할 수 없게 움직이시니까요. 그 정도 확인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결과는 만족스러우셨습니까?”
“역시 요르민 양으로는 부족하더군요.”
센터장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허허 웃었다. 살짝 벌어진 입과 다르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매칭률이라는 건 무섭지요. 그렇게 거부하던 취향을 굽힐 정도로 말입니다. 그래도 덕분에 많은 걸 알게 되었으니, 한 번만 넘어가 주십시오.”
“다음부턴 언질이라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군요.”
“허허허. 말도 없이 속이게 되어 죄송합니다.”
말로는 죄송하다 하면서도 꼿꼿한 태도는 변함이 없다. 그러곤 얼마 지나지 않아 빤히 웃으며 반테온을 응시하던 센터장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삽시간에 가라앉은 눈동자로 정면을 바라보며 질문했다.
“갑작스러운 질문입니다만, 반테온 님은 에스퍼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밑도 끝도 없이 묻는 말에 반테온도 센터장을 바라봤다. 에스퍼가 무엇이냐니. 핏줄로 유전되는 특이한 형질이라는 것 외에 다른 정보는 없었다. 긴 시간 동안 다양한 연구를 진행하여도 에스퍼와 가이드에 관한 내용은 여전히 미궁 속에 잠겨 있었다.
그 사실을 반테온보다 센터장이 더 잘 알 터인데, 갑작스러운 질문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다.
“왜 그걸 제게 물으십니까?”
“어렵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그런 생각한 적 없으십니까? 왜 에스퍼는 유전으로만 이어지는 것일까. 돌연변이라면 가이드처럼 유전자와 상관없이 나타나야 할 터인데, 왜 꼭 유전으로 발생하는 것일까.”
뜬구름 잡는 소리에 반테온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센터장과 자신이 종종 독대하였으나,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사이는 아니다. 이런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때울 관계는 아니란 뜻이었다.
“자연 발생 에스퍼도 존재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문제지요. 유전으로 이어지는 발현의 시작이 자연 발생 에스퍼라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결론이 나온단 말입니다.”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목적을 알 수 없는 대화에 반테온은 말을 아꼈다. 침묵으로 대답하자 센터장이 치아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저는 에스퍼라고 하기에 힘은 보잘것없습니다만, 대신 여기가 좋지요.”
센터장은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린다. 쇠퇴하던 가문에서 태어나 머리 하나로 지금의 위치에 앉은 장본인이다. 왕국 사람이라면 모두 다 알만한 새삼스러운 이야기에 반테온은 묵묵히 그 행동을 지켜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