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에스퍼를 피하는 방법 (58)화 (58/112)

#58

이미 귀를 막은 델로즈에게 뭐라고 말해도 들리지 않았다. 케슬란은 이미 반테온의 머릿속에서 정리한 인물이다. 깔끔하게 접어 기억의 구석으로 밀어 넣었는데, 불편하게 상기되니 기분만 불편했다.

“케슬란 일은 나와 상관없어. 앞으로 만날 생각도 없고.”

“그렇게 말하겠지.”

델로즈의 삐뚤어진 미소가 더 짙어졌다. 아파지는 머리에 반테온은 힘 빠진 손을 들어 내저었다.

“마음대로 생각해.”

“그러지.”

케슬란이 돌아오기까지 시간이 걸리니 그사이에 진실을 알게 되겠지. 부디 델로즈의 추종자들이 꼬리를 흔들며 자기들 공이라며 생색내기를 바랐다. 잠시 델로즈와 대화한 것뿐인데 급격하게 피곤했다. 마치 오랜 시간 가이딩을 한 것처럼…….

‘뭐지?’

가이딩 생각에 시선을 돌려 델로즈의 주변을 자세히 살피자 이상한 현상이 보였다. 분명 손을 잡은 후 한참 지났고, 꾸준히 가이딩을 하고 있는데도 델로즈 주변의 붉은 기운은 계속 소용돌이치며 움직였다.

한쪽 손을 잡은 후 시간이 제법 흘렀다. 맞닿은 손바닥이 저릿할 정도의 시간이다. 분명 처음에는 서서히 잦아드는 기운을 확인했는데, 아직도 잔기운이 주변에 남아 있었다. 가이딩이 너무 느리게 진행된다.

이런 적은 처음이다. 폭주 직전일 때도 지금보단 속도가 빨랐다. 이유 모를 상황에 눈살을 찌푸리고 모르는 척 델로즈에게 물었다.

“가이딩 시간은 지난 것 같은데 상태는 어때?”

“음…….”

델로즈의 미간이 좁아진다. 심각하게 맞잡은 손을 바라봤다.

“분명 전보단 나아졌는데.”

반테온이 본 것과 같은 상황을 느낀 것인지 말끝을 흐리며 맞잡지 않은 손바닥을 쥐고 편다. 당사자도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다. 가이딩이 원활하지 않다는 것을.

“뭔가 개운하지 않군.”

오래 떨어진 탓일까. 아니면 치료의 후유증일까.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이건 생각보다 큰 문제였다. 델로즈의 가이딩이 가능한 건 반테온밖에 없었다. 그렇게 된 이유도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이런 상태에서 반테온과 가이드 효율이 떨어진다면 델로즈를 진정시킬 존재는 아예 사라져 버린다. 델로즈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어쩔 수 없지. 그쪽 손도 줘.”

내키지 않으나 양손을 잡고 가이딩 해볼 생각이었다. 반테온의 요청을 들었음에도 델로즈는 손을 내밀 기색이 없었다.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두 손으로 하면 상황이 달라지는 건가?”

“접촉 부위가 늘면 속도도 빨라지니까.”

“내가 배운 거랑 다르군.”

센터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면서 알면 얼마나 안단 말인가. 반테온의 아니꼬운 시선에 델로즈는 어깨를 으쓱였다.

“가이딩 지침서 2조 3항. 표피 접촉으로 해결이 어려운 응급 상황 시 임시 계약 상태라도 점막 접촉이 가능하다.”

“…….”

“라고 적혀 있던데?”

그 말에 맞잡은 한쪽 손까지 놓을 뻔했다. 분명 델로즈의 개소리는 일리 있는 말이다. 센터 지침에 따르면 표피 접촉으로 해결이 안 될 경우엔 그런 선택지도 존재한다. 지금 나올 말은 아니지만 말이다.

“이 정도면 훌륭한 학생 아닌가?”

이래서 반만 배운 학생들이 가장 머리 아프다고 하는 걸까. 델로즈가 말하는 조항은 응급 상황에 두 사람이 합의하고 이뤄지는 것이다.

지금은 응급 상황도 아니고 무엇보다 반테온은 절대로 동의할 생각이 없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손이나 내놔. 지금이 응급 상황이야?”

“나는 불편한 상황이라서.”

지금 델로즈가 심각한 상태가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반테온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붉은 기운이 요동치고 있으나 평소보다 격하게 움직인다는 것뿐, 거동이 불편할 만큼의 움직임은 아니었다.

본 것을 말할 수 없으니 답답함에 작게 혀만 찼다. 엄살이 분명한 말에도 반박할 수 없다니.

“그래서 지금 키스라도 하잔 말이야? 너랑 내가?”

자신의 혀로 말하면서도 소름 끼치는 이야기다. 그런 사태는 반테온도 델로즈도 바랄 리 없을 텐데.

델로즈는 태생부터 이성애자였다. 후천적인 경험까지 곁들인 완벽한 헤테로. 남자라면 닿는 것조차 진절머리 쳤었다.

지금은 가이드 자각 증후군으로 판단력이 흐려졌을지 몰라도, 성향이란 건 쉽게 바뀌는 성질이 아니다.

‘아.’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서 번쩍인다. 맞다. 성향이란 건 고정적이다. 남자와 키스하는 상황에 부닥치면 현실을 깨닫고 도망칠 가능성도 있었다. 충격요법이 통할지도 몰랐다.

“그럼 마음대로 해보든가.”

어디 할 수 있으면 해보란 태도에 아니나 다를까 델로즈의 몸이 빳빳하게 굳어 버렸다.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예상대로다.

결국, 말만 번드르르하게 내뱉은 것이다. 델로즈는 뼛속부터 이성애자였으니까. 반테온은 그런 모습을 속으로 비웃었다.

“손이나 내놔.”

하지도 못할 키스에 미련 가지지 말라며 남은 손을 쥐어 당기자 순순히 따라 끌려왔다. 양손을 쥐자 그전보다 가이딩이 수월했다. 예전보다 느린 가이딩에 잠시 당황했을 뿐이다. 점막 접촉이 필요하다니. 그런 끔찍한 가정은 해본 적도 없다.

손가락 사이로 맴도는 붉은 기운을 보며 계산보다는 빨리 끝낼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반테온의 머리 위가 어둡게 그늘졌다.

“반테온.”

나지막한 목소리가 성가시게 들렸다.

“반테온. 고개 들어.”

“왜 불러. 귀찮…….”

말캉하면서 단단한 것이 반테온의 입술에 와 닿았다. 서늘한 감촉이 불같이 퍼지고 몸이 딱딱하게 굳는다. 긴장으로 파르르 떨리는 아랫입술이 깨물렸다.

정신을 차리고 도망치려는 손목이 그대로 쥐어 잡혔다. 소리치려고 입을 벌리는 순간 뜨거운 혓바닥이 그대로 입 안을 헤집었다.

“으…!”

다정함과는 거리가 먼 움직임이다. 소름 끼치는 감각이 귓가를 넘어 등골을 스친다. 그사이에도 델로즈는 갈구하듯 입술을 비비고 더 깊이 파고들었다. 강한 손아귀가 머리를 움켜쥐어 고정했다.

반테온이 참았던 숨을 터트리기 직전에서야 겨우 그의 호흡이 떨어졌다. 거친 움직임에 입가가 쓰라렸다.

“하아…….”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자신과 반대로 숨소리 하나 흔들리지 않는 망할 놈의 멀끔한 얼굴이 들어왔다.

“미쳤어?”

“허락한 거 아니었나?”

반테온 앞에 선 델로즈는 뻔뻔하게 대꾸했다.

“시키는 대로 했는데 왜 화를 내는지 모르겠군.”

“…….”

분에 차서 따지려던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그의 말대로 할 수 있으면 해보라고 도발한 건 반테온이다.

상태가 나쁘다고 생각했지 이 정도로 심각하리란 생각은 한 적이 없었는데. 괜히 도발한 죄로 키스당한 반테온의 기분이 바닥을 쳤다.

겨우 떨어진 델로즈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반테온을 바라봤다. 지그시 내려다보는 눈동자 붉은빛이 섞인 금색으로 아름답게 빛났다. 그 아래 꽉 다물린 입술에 시선이 닿자 다시 한번 짜증이 치밀었다.

“맘대로 했으면 이만 떨어져.”

입술이 떨어졌지만, 자신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은 아직 떨어지지 않았다. 단단히 맞붙은 상체에서 느껴지는 델로즈의 체온이 못 버티게 뜨겁다.

델로즈는 그대로 멈춰서, 아니 멈춘 것이 아니었다.

점차 가까워지는 얼굴의 그림자가 내려온다. 높은 코가 반테온에게 닿을 듯 다가오고 열기를 품은 입술이 다시 닿으려는 감각에 다급하게 손으로 밀었다.

“무슨…! 그만두지 못… 아….”

외치던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다시 파고든 입술이 벌어진 치아 사이를 훑고 들어온다. 두꺼운 혀뿌리까지 들어와 숨을 모조리 앗아갈 듯 거칠게 파고들었다. 호흡을 막는 몸짓에 상체가 튀었다.

반테온은 손을 펼쳐 책상 위를 더듬었다. 각을 세워 깔끔하게 쌓인 종이 더미를 스쳐 두꺼운 책을 잡아서 그대로 델로즈에게 집어 던졌다.

두꺼운 양장본이 델로즈의 얼굴을 후려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충돌에 어떤 타격도 받지 않은 델로즈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겨우 돌아온 숨에 헉헉대며 상대를 원망스럽게 바라봤다.

“진짜 최악이다.”

처음엔 먼저 도발한 반테온의 잘못도 있기에 그저 운이 없었다고 생각하고 넘어가려 했다. 연달아 마음대로 다가온 행위는 그런 관대함까지 앗아갈 정도로 진절머리 나고 끔찍하다.

참았던 호흡에 생리적인 눈물이 눈꼬리에 맺힌다. 키스하다가 울다니. 그런 꼴불견도 없다. 억지로 참으며 입술을 꽉 눌러 물었다.

“당장 꺼져.”

“너… 피가…….”

델로즈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책을 던지고 남은 여운에 부들부들 떨리는 반테온의 손을 쳐다봤다.

아까 책을 찾다가 종이에 쓸렸는지 검지 옆으로 길게 생채기가 나 있었다. 살짝 벌어진 틈으론 핏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갑자기 왜 다친 거지? 무기도 없었는데.”

꺼지란 말도 듣지 못했는지 델로즈는 심각한 표정으로 반테온의 손목을 쥐었다. 다시 느껴지는 온기에 다급히 손을 빼내려 했으나 그것도 쉽지 않았다. 빠르게 움직인 탓에 날카롭게 베인 상처가 더 벌어져 피가 흘렀다.

종이에 베인 상처는 깊진 않아도 따갑고 오래 간다. 검지를 다쳤으니 당분간 물건을 집기도 귀찮아질 텐데. 덩달아 겹친 흉재에 불쾌감이 더 쌓였다.

“뭘 봐. 종이에 베인 거 처음 봐?”

“종이? 종이 따위에 다친단 말이야?”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