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네 피부는 물소보다 질겨서 모르겠지. 속으로 중얼거리며 손을 빼내었다. 손수건으로 손가락을 감아 피를 닦았다.
피를 보니 치솟았던 감정이 가라앉았다. 진심으로 열을 올리기엔 하찮은 일이다. 종이에 베인 일처럼, 겨우 키스일 뿐이다.
그를 상대하는 시간과 체력이 아까웠다. 잠시 뱀에게 물린 셈 치면 그만이니까.
주제에 죄책감이라도 느끼는 것일까. 가라앉은 델로즈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욕을 되뇌었다. 끔찍하게도 난폭한 키스는 효과가 있었다. 한참 손을 맞잡고 있어도 변하지 않던 붉은 기운이 순식간에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그럼 더 같이 있을 이유가 없겠지.
반테온은 옷차림을 정돈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가락 때문에 잊고 있었는데 부딪힌 입가가 쓰렸다. 다행히 입술이 터지진 않았다.
반테온은 쓸린 입가를 손으로 문지르며 말했다.
“실력하고는.”
그에게 시선도 돌리지 않고 문을 열고 밖으로 고고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쾅 하고 닫히는 문소리가 요란했다.
***
거울에 하얀 피부와 찰랑거리는 은발에 비친다. 짙은 푸른색 눈동자가 깜박이며 이목구비를 찬찬히 훑었다.
자신도 제법 잘난 외모를 타고난 것은 알고 있다. 깊은 눈매와 곧게 뻗은 콧날은 만족스러운 부분이다. 그리고 아래에 단정한 입술도 부족함 없는 모습이었을 텐데.
“쯧.”
손가락으로 입술 끝을 쓸었다. 붉게 부어오른 아랫입술에 작게 피멍이 들었다. 누가 봐도 격하게 즐겼다 자랑하는 꼴이다.
부기에 좋다는 연고를 바르고 대충 옆으로 치웠다. 보이는 대로 실컷 즐겼다면 억울하진 않겠지. 마음에 드는 상대와 즐기고 남은 상처라면 훈장처럼 달고 다닐 것이다. 그런데 하필 상대가 델로즈다.
평소 잘 바르지 않던 화장품을 꺼내 옅게 펴서 입가에 찢어진 흔적을 덮었다. 가까이에서 살피지 않으면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걸로 거슬리는 두 가지 중 하나는 해결했고 이제 나머지 하나만 남았다. 치장하는 내내 손을 불편하게 누르는 통증에 검지를 바라봤다. 얇은 붕대를 펼쳐 묶은 손가락 끝이 불편하다.
별것 아닌 상처지만 손을 움직이고 물건을 집을 때마다 벌어지기에 고정해 놓았다.
두 상처 다 한 사람이 만든 상처였다.
덤덤하게 붕대를 한 번 더 묶고 책상 위에 놓인 종이 뭉치를 바라봤다. 오늘 아침 일찍 심부름꾼을 통해 전달된 서류였다. 이미 한 차례 훑어본 표지엔 커다란 글씨가 있었다.
[에스퍼 델로즈의 생체 신호 보고서]
괜히 죄 없는 종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린다. 그런다고 안에 적힌 내용이 바뀔 리 없다.
거침없이 손가락은 서류를 펼쳐 마지막 장을 꺼낸다. 연구원 원장의 인장이 찍힌 그 공백에는 거대한 글자 몇 개만 박혀 있었다.
[부적합]
-피대상자의 생체 수치 변동 폭은 ‘가이드 자각 증후군’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소파에 앉아 눈을 지그시 감은 반테온은 손을 더듬어 한쪽에 비치한 시가 케이스를 열었다. 캡을 자르고 연기를 피우니 혼란하던 머릿속이 가라앉는다.
후-
긴 연기가 굽어 흔들리며 날아올랐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고 다시 개었다.
생각해본 적은 있었다. 만약에라도, 정말 혹시라도 델로즈가 ‘가이드 자각 증후군’이 아니라면 어떻게 할까. 거리낌 없이 반테온에게 키스하는 순간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강하게 스쳤었다.
막상 결과를 받으니 마음의 준비를 했음에도 속이 쓰리다.
케슬란과 있는 모습이 보기 싫어 밤중에 찾아오고, 독방을 탈출하고, 남의 머리채를 잡고 입술을 맞대던 다급한 행동이 다 제정신이었다.
잘나도 너무 잘나서 문제야.
그렇게 생각하며 가볍게 여기려 해도 굳은 얼굴이 풀리지 않는다. 서류에 적힌 상세 내용을 훑었다. 격리 기간과 가이딩 받은 후 생체 수치의 변화가 없으며, 치료제에 반응도 미비하다.
[AT-05s 와 V-R71Y에 소폭 변동 있었으나 일시적인 현상일 뿐, 30분 이내 표준 수치로 돌아갔다.]
그 와중에 서류에 나온 델로즈의 표준 수치가 타 에스퍼의 몇 배는 높은 걸 보면서 혀를 찼다. 연구원만 좋은 일 시켰다. 원래라면 귀찮고 오래 걸리는 검사를 거들떠보지도 않을 SS급이 얌전히 한 달간 연구 대상이 되어줬으니 신이 났겠지.
단순히 부적합을 적으면 될 보고 서류는 소형 책자만큼 두꺼웠다.
같은 시각 보고서를 받은 델로즈는 자신이 옳았다고 당당해질 것이고, 연구원도 신났고, 두 사람이 매칭 하길 바라던 추종자들도 기뻐할 소식이다.
반테온만 빼고 모두에게 잘된 일이다.
다 탄 시가를 재떨이에 비벼 눌렀다.
***
사람들의 주제는 빠르게 변화한다. 하루가 멀다고 새로운 이야기가 쏟아지고, 낯선 곳으로 시선이 움직인다. 조금 더 자극적인 일을 찾으며 본능처럼 귀를 기울였다.
“저기 봐.”
“며칠째 저렇게 따라다니는 거지? 대체 무슨 일이야.”
남들의 시선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숙명처럼 따라다녔고, 주목받지 않는 순간이 드문 인생을 살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충분히 평소처럼 넘길 수 있는 일이었다.
“……언제까지 따라올 건데.”
“그냥 가던 길일뿐이다.”
평소라면, 정말 다른 일이라면 주변에서 누가 따라다니든 어떤 시선이 붙든 신경 쓰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190이 넘고 시꺼먼 이 남자만 아니라면 말이다.
“그러면 가던 길 가.”
“……이쪽이야.”
“그렇겠지.”
반대편으로 방향을 돌렸는데도, 저벅저벅 걷는 델로즈의 발걸음 소리가 여전히 따라온다. 두 사람의 발소리가 합쳐졌다.
평소처럼 복도를 걷는 반테온과 그 뒤에 두 발짝 떨어져 뒤따르는 델로즈의 모습을 다들 눈을 떼지 못하고 바라보고 있었다. 애써 시선을 돌리고 두 사람을 지나치더라도 고개를 돌려 반테온과 델로즈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뒤통수가 뚫어질 것 같았다.
갑자기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는 뻔했다. 분명 델로즈도 반테온과 같은 결과지를 받았겠지.
자신의 말이 옳다는 결과를 확인했으니 당장이라도 반테온 앞을 찾아와 의기양양하게 따질 것이라 예상했다. 이렇게 피곤한 방식으로 들이댈 줄은 몰랐다.
결과가 나온 이후 하루에도 몇 번씩 빈번하게 마주쳤다. 식사하러 가는 길. 산책하러 가는 길목. 서재를 걷는 복도 등등. 한 곳에서 마주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곳에서 그를 만났다.
델로즈는 연구원에서 받은 결과 따위 모른다는 듯 조용하게 반테온의 주변만 맴돌았다. 부모 따라다니는 오리 새끼처럼 두 발자국 뒤에서 졸졸 따라다닌다.
반테온을 찾아서 마주치기이야 어렵진 않을 것이다. 반테온이 있는 곳은 시선이 모였으니 찾기야 쉽겠지. 문제는 왜 찾아서 따라다니냐는 거다.
왜 이러냐고 물으면 그저 가는 길을 가던 중이라고 대답하니 반테온만 피곤할 지경이다. 차라리 자신의 말이 맞았다고 따지는 게 속 편할 것 같단 생각에 숨을 내쉬었다. 원래 정원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렸다. 조용한 복도에 두 개의 구둣발 소리가 울렸다.
짧은 인내심은 예전에 바닥을 보였다. 번거로운 일을 만들기 싫기에 무시한 델로즈의 행동이 버티기 힘들도록 귀찮았다.
“뭐가 문제야?”
걸음을 멈추자 뒤따라오던 발소리도 멈췄다.
“그냥 지나가는 길이라니까.”
“그럼 먼저 지나가.”
“잠시 구두끈이 풀어져서. 먼저 가도록 해.”
덤덤하게 돌아오는 대답에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편다. 구두끈이 진짜 풀어졌는지 확인하려고 고개만 돌리면 거짓을 알 수 있을 빈약한 핑계였다. 확인하고 델로즈에게 따져봤자 또 변변찮은 변명이 돌아오겠지.
얼굴을 보고 싶지도 않기에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기다렸다는 듯 뒤따라오는 그림자가 가까워졌다.
반테온은 자신의 서재 앞에 멈춰 고민했다. 지극히 반테온의 취향대로 꾸며진 서재는 그가 소중하게 여기는 공간 중 하나였다. 이곳에 불청객을 데려가긴 싫지만, 그만큼 다른 사람들의 이목에서 자유로운 곳이다.
“여긴…….”
“내 서재. 개인 업무를 처리하는 곳. 이제 여기까지 왔으니 이유를 좀 말해보시지. 왜 따라다니는 거야?”
“정말로 우연히 마주친 거다.”
“우연히 내 서재 방향에 볼일이 있었다고 말할 건 아니겠지? 내 서재 주변엔 다 공실이야.”
복도 끝에 있는 반테온의 서재 주변은 양옆과 맞은편, 대각선까지 모두 빈방이었다. 에슬란테 가문에 관련된 정보도 처리하는 만큼 실수로 방문하는 사람마저 없도록 배치했다.
델로즈의 조용한 눈동자가 반테온을 응시한다. 속을 뚫어보듯, 자신이 삼킨 말의 깊이를 가늠하듯 묵묵히 침묵을 지키던 입이 열렸다.
“손가락은 이제 괜찮은 건가?”
델로즈는 뜬금없이 손가락 이야기를 하며 시선을 내렸다. 문고리를 잡은 손끝 붕대를 바라본다. 당일 살짝 피가 난 정도이니 심각할 것도 없었다. 물이 닿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붕대를 가볍게 감고 있는 것뿐이었다.
“이제 다 나았어.”
“그럼 붕대는 왜…….”
“그런 말을 하려고 찾아온 거야? 겨우 손가락이 괜찮냐고?”
“내가 다치게 했으니까.”
묘하게 풀이 죽은 듯한 모습은 자신 때문에 반테온이 손가락을 다쳤다는 죄책감 때문일까. 지금까지 거친 행동과 무례한 말을 하고도 멀쩡하더니, 겨우 피 조금 봤다고 의기소침해지다니. 여러모로 이해하기 힘든 사고방식이다.
“그 정돈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신경 쓰지 마.”
“……그렇게 다치는 경우가 흔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