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반테온의 말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어두운 표정이 더욱 심각해진다. 겨우 종이 따위에 다친다고 한심하게 생각하는 것일까. 반테온도 억울했다. 자신이라고 한심하게 종이에 베어 피를 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럴 리가. 너 아니면 다칠 일도 없었어.”
“그렇군. 내가…….”
이제 델로즈의 안색이 발아래 드리운 그림자처럼 까맣게 가라앉았다. 반테온은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저 이야기를 하기 위해 반테온을 따라다닌 건 아닐 것이다. 말을 돌리고 있으나 용건은 따로 있겠지.
“그래서 진짜 용건이 뭐야?”
“…….”
“내가 맞춰볼까?”
당사자가 말을 하지 않으니 반테온이 먼저 이야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지지부진하게 말을 끌며 시간을 낭비하는 것도 아까웠다.
“가이드 자각 증후군이 아니라고 네 말이 맞았다고 말하고 싶어서 찾아온 거 아냐? 네가 맞고 내가 틀렸다고 이야기하고 싶어서 그렇게 따라다닌 거잖아.”
“그런 게 아니다.”
“사과를 듣고 싶다면 그래. 내가 잘못 생각했어. 내 착각으로 격리까지 했으니 원한다면 보상할게.”
보상이란 단어에 입을 움찔거리던 델로즈가 고개를 들었다.
“그런 걸 바라지 않아.”
“그럼 대체 뭐가 문제야?”
뭘 원해서 이렇게 사람 피를 말리며 따라다니냔 말이다. 반테온이 캐묻듯 독촉하자 델로즈가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문제라…… 이젠 내가 했던 말이 다 진심이라는 걸 알겠군.”
“그래.”
“네가 다른 에스퍼와 있을 때마다 속이 뒤집힐 것 같고, 더 닿고 싶고 마음이 진짜라는 걸 이제야 믿겠군.”
“……그래.”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할 거지?”
델로즈가 진심이라고 해도 반테온이 태도를 바꿀 이유가 없었다. 애초에 응할 마음이 없다고 확실하게 밝혔다. 다시 말해주기도 입 아플 지경이다.
“네가…….”
“아니, 뭐라고 할지 뻔해. 네 취향이 아니니 어쩔 수 없다고 가볍게 거부할 테지.”
네가 진심이든 아니든 내가 신경 쓸 필요가 있어? 라고 말을 꺼내기 전에 델로즈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자답했다.
“어차피 그런 답을 들을 거라면 조용히 곁에만 있으려는데 그것도 싫은 건가? 조용히 뒤만 따라다니고 있잖아.”
지금까지 말을 아끼던 모습이 거짓인 양 델로즈는 속마음을 직설적으로 털어놨다. 눌러 쌓았던 기간만큼 한 번에 토로하는 목소리엔 채 정돈하지 못한 감정이 묻어났다.
감정을 꾹꾹 눌러 담은 금빛 눈동자가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가장 뜨겁고 조용한 불처럼 조용히 타고 있는 감정은 가볍지 않았다.
“일단 들어와.”
닫힌 문을 밀어서 열었다.
개인적인 공간에 데려오기 싫었으나, 이런 걸 누가 들을지 모르는 복도에서 할 말은 아니었다. 언젠가 마주칠 상황이라면 확실히 해두는 것도 좋겠지.
접대용 테이블 앞에 앉히고 반테온은 서류가 쌓인 책상에 기대어 섰다. 사이좋게 마주 앉아서 오순도순 이야기할 기분은 아니다.
“다른 건 바라지 않고 곁에만 조금 더 오래 있고 싶단 거지?”
“그래.”
본능적으로 서랍을 뒤져 시가를 꺼내려던 손을 멈췄다. 갈 곳 잃은 손가락이 서투르게 테이블을 톡톡 내려쳤다.
곁에만 있고 싶다는 이유로 그렇게 열심히 따라다녔던 거군. 철없던 행동이 본인 나름대로 생각한 결과라는 건 알겠다. 반테온이 거절할 것이 뻔하니 아예 거절하지 못하도록 말 안 하고 붙어있겠단 계획이었다.
며칠 동안 계속된 행동의 이유는 생각보다 별것 없었다.
어찌 생각하면 현명한 방법일 수도 있다. 사실대로 말했다면 그날 바로 거절하고 떼어놨을 델로즈를 며칠이나 달고 다녔으니까.
“델로즈. 네가 진심인 걸 알겠으니. 나도 진심으로 이야기할게.”
“…….”
“네 예상이 맞아. 나는 네가 불편해.”
델로즈가 고개를 들자, 아픈 시선이 날아와 반테온에게 박혔다. 곁에 있기만 하겠다는 가벼운 제안까지 거절당하자 가라앉은 눈동자가 더 깊어졌다.
“단순히 취향이 문제가 아니야. 과격한 생각도 돌발적인 행동도 감당하기 힘들어. 성장 배경이 달라서 그렇다고 넘기기도 버거울 수준이야. 너도 알고 있잖아. 우리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다르다는 거. 소소하게 말투부터 복장까지…….”
길게 뱉던 말을 끊고 한 번 숨을 들이쉬었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이야기했다.
“……네 돌발적인 행동을 수습하는 것도 귀찮고, 내 주변 사람을 견제하는 것도 번거로워. 지켜보는 것도 피곤할 정도야.”
속에 쌓인 이야기를 털어놓자 마음이 가벼운 듯 무거웠다.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내린 델로즈는 조용히 반테온의 말을 듣고 있었다.
이 정도로 하나하나 지적했으면 감정이 상할 만도 한데, 그의 시선은 미동이 없었다.
“그것 말고 다른 건 없어?”
“뭐?”
“마음에 안 드는 다른 부분. 말투, 행동, 복장은 이야기했고. 또 뭘 고치면 되는 거지?”
고민에 빠진 델로즈는 작게 중얼거렸다.
“얼굴은? 목소리는? 아, 전에 내 체형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었지. 그건 좀 곤란한데. 고칠 수도 없으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어떻게 하면 되는 거지? 네가 불편하지 않으려면 뭘 바꾸면 되는지 말해줘.”
“무슨…….”
반테온이 했던 말을 제대로 들은 것일까. 곧게 말하는 델로즈의 눈엔 지금까지 요동치던 흔들림이 사라진 상태였다.
단순히 취향이 아니라 그가 가진 모든 것이 맞지 않는다고 직설적으로 말했음에도 델로즈는 물러날 기색이 없었다.
“거절당하면 돌아서는 게 귀족들이 말하는 예의란 거겠지. 미안하지만 난 그렇게 쉽게 포기할 생각은 없거든. 너희가 말하듯 못 배우고 자라서 말이야.”
고개를 든 델로즈의 안광이 흉흉하게 번뜩였다.
“거절당했다고 바로 돌아서기엔 생각보다 좀 절박하거든.”
듣는 사람의 얼굴이 달아오를 정도로 적나라한 토로에 반테온의 얼굴이 굳었다. 쉽게 물러설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예상을 뛰어넘는 솔직한 토로에 혓바닥이 굳는다.
지금까지 숱한 고백을 받았다. 반테온이 좋다며 다가오는 사람들은 양 손가락으로 세기 힘들 정도였으며, 은은한 접근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일상이었다.
그런데도 지금처럼 직접적인 표현을 들어본 적은 없다. 자존심을 다 내려놓은 듯한 말을 하면서도 델로즈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당당했다.
“지금부터 할 수 있는 건 다 해볼 생각이야.”
분명 델로즈는 처음부터 반테온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언제부터 잘못된 걸까. 서로의 상황을 알았을 때, 델로즈는 자신을 구했던 가이드를 찾으면 헤어지자고 먼저 제안하지 않았는가.
바짝 타는 입술을 축였다. 그의 마음과는 상관없다. 어차피 답은 정해진 이야기였다.
“델로즈. 처음부터 헛된 기대 하지 말라며 선 그은 건 너야. 귀찮은 짐 덩어리로 취급하더니 이제 와 잘 보이고 싶다고?”
“그래.”
당당한 긍정에 헛웃음이 터졌다.
생각해 보면, 델로즈가 그런 격 떨어지는 말을 하지 않았어도 그를 거절했을 것이다. 애초에 평민 출신 에스퍼라는 전제 자체가 반테온의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델로즈의 태도가 둘 사이에 벽을 더욱 두껍게 쌓은 건 확실하다. 자기 마음에 없을 땐 멋대로 사람을 곡해하고, 인제 와서 마음에 들고 싶다고 해도 이기적인 주장으로 들릴 뿐이다.
“물론 사람의 마음은 바뀔 수 있어. 근데 그 변덕을 내가 왜 맞춰줘야 하지?”
“그땐…….”
“그땐 몰랐는데 가이딩 좀 받아보니 잡아야 할 것 같아? 새삼 중요해 보여?”
델로즈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꽉 쥔 손을 보면서도 반테온은 멈추지 않았다.
에스퍼들이란 똑같다. 가이딩이 길어지면 언제나 소유하고 싶어 한다. 자신의 취향이 아닌 것까지 다 긁어모아 통제하려 들었다. 에슬란테의 후광을 보며 접근한 에스퍼도 마찬가지였다.
델로즈도 마찬가지겠지. 상대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입바른 소리의 속뜻은 뻔했다.
“그런 노력 안 해도 필요하면 가이딩 할 테니까 쓸데없는 짓 하지 마. 네가 폭주하면 곤란한 건 마찬가지니까.”
보다시피 왕국에 가진 것도 많고 누릴 것도 많은지라 반테온 입장에서도 그의 안위를 위해 협력할 거다. 그건 델로즈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반테온이 받는 특혜를 곁에서 숱하게 보았으니까.
“방에 몰래 찾아온 화풀이로 격리실에 길게 보내긴 했는데, 앞으론 그럴 일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 결국, 이 대답이 듣고 싶었던 것 아니야?”
“……그런 거 아니다.”
어긋난 시선이 다른 곳을 바라본다. 부정해도 에스퍼에게 가이딩보다 중요한 건 없으니, 반테온을 원하는 에스퍼들이 바라는 건 그것뿐… 아.
지난 만남이 스치듯 머릿속을 지나갔다.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긴 하다.
“이제 남자랑 닿는 것도 아무렇지 않아 보이던데. 테스트라도 해보고 싶은가 봐?”
가이딩으로 생긴 호감이 성적인 호감으로 발전하는 경우는 흔하다. 남자 가이드와 가이딩한 지 오래되니, 뒤늦게 흥미가 일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저급한 호기심에 반테온이 응해줄 이유는 없었다.
“너라면 환호할 상대도 많을 테니 다른 사람을 찾아보는 건 어때? 나는 사양할게. 너 엉망이거든.”
아직도 입을 벌릴 때마다 그에게 물린 부분이 부은 듯 저렸다.
미동도 없이 반테온을 응시하는 시선에 목덜미가 따갑다. 델로즈가 작게 한숨을 쉬는 소리가 반테온의 귀에 닿았다. 초조한 듯 구두로 바닥을 툭툭 두드리는 소리도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