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반테온. 나는…….”
무언가 변명하듯 꺼낸 목소리는 다른 소음에 묻혔다.
-똑똑.
좋지 않은 타이밍에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서재를 찾아온 사람은 노크 소리가 사라지기도 전에 벌컥 문을 열었다.
“반테 여기 있…… 혼자가 아니네?”
문을 열고 들어온 테아로트는 서재 안에 감도는 어색한 공기를 느끼곤 동작을 멈췄다. 완만하게 휘었던 눈매가 날카로워지며 불청객을 향해 날을 세운다. 순식간에 꿈틀거리던 기운을 빠르게 누르더니 평소의 능글거리는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러곤 반테온 곁으로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쟨 왜 여기 있어? 설마 여기까지 따라온 거야?”
이렇게 귓속말을 해도 SS급 에스퍼인 델로즈의 귀에 들릴 걸 뻔히 알면서 테아로트는 일부러 약 올리듯 소곤거렸다. 이미 델로즈가 반테온을 따라다닌다는 소문을 들은 것인지 상대를 번거로운 거머리처럼 바라봤다.
“한심하게 임시 가이드를 따라다니는 에스퍼가 어디 있어. 쯧. 에스퍼 망신은 다 시키네.”
반테온은 작은 혓소리까지 섞는 테아로트를 진정시켰다.
“내가 데리고 왔어. 곧 나갈 거야.”
“그래? 그럼 지금 당장 꺼져주면 좋겠네.”
넓은 보폭으로 걸어간 테아로트는 노골적으로 델로즈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세찬 걸음에 닿지도 않은 델로즈의 앞머리가 흔들렸다. 일부러 그의 옆에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자신에게 익숙한 공간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에 델로즈가 곁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예전 같으면 테아로트에게 한마디 했을 텐데, 그의 입술은 무겁게 닫혀 있었다.
“반테, 재미있는 소식을 가져왔는데. 시간 괜찮아?”
“시간 없다고 해도 잡을 거잖아.”
“잘 아네. 그러니 그냥 잡혀 봐. 이번엔 가문에서 나온 소식인데…… 아, 맞다.”
이야기하던 테아로트는 옆에 멀뚱한 얼굴로 앉아 있는 델로즈를 바라봤다.
“아직 안 갔어? 우리 할 이야기 있거든.”
“…….”
“관계없는 사람이 듣기에 쪼금 곤란한 이야기라서 말이지. 외부인은 빠지는 게 어때?”
델로즈는 말을 건넨 테아로트 대신 맞은편에 선 반테온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 눈빛에 응답해줄 말은 없었다. 테아로트가 오기 전에 자신이 할 말은 다 끝냈으니 둘 사이에 대화는 끝이었다. 말없는 대치에 테아로트의 가벼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더 할 말이 남았어?”
“……없어.”
“그럼 가야지.”
델로즈는 끝까지 발걸음을 옮기지 않으며 반테온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이 공간의 주인에게 듣지 않으면 나가지 않겠다는 듯 움직이지 않는다. 왜 쓸데없는 과정을 기다리는지 모르겠다.
반테온이 테아로트를 말리고 이곳에 더 있으라고 하길 바라는 것일까. 그럴 리 없다는 걸 방금 대화로 알았을 텐데도 굳이 자리를 지켰다.
“상황이 엮여서 우리 둘이 계약을 하게 됐지만, 난 처음부터 이 관계가 반갑지 않았어. 너도 그렇게 말했었잖아.”
“…그랬지.”
“네게 도움받은 적도 있고, 조금 익숙해져서 그런지 처음만큼 네가 불편하고 싫은 건 아니야.”
희망적인 이야기에 델로즈의 고개가 들린다. 이게 문제다. 조금이라도 틈을 열면 기대하고 허튼짓을 할 거란 예상이 강하게 들었다.
“이건 확실히 말해둘게. 널 가이딩 하는 이유는 네가 폭주하면 내 생활까지 무너질 테니 협조하는 거야.”
깔끔하게 의사를 전달하고 둘 사이에 정확한 거리를 정립했다.
“나는 날 위해서 가이딩 하는 것뿐이니 그것에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가 아니라 다른 에스퍼였어도 똑같이 행동했을 테니까.”
“……알겠다.”
혹시라도 전처럼 돌발 행동을 하면 어떡할까 하는 고민과 다르게 델로즈는 조용히 물러섰다.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하더니 처진 어깨가 멈췄다.
숨을 고르는 시간이 지나고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라도 내가 예전에 했던 이야기가 네게 상처를 줬다면…… 아니. 아니다.”
델로즈의 등이 멀어졌다.
“실례했다.”
그대로 두꺼운 나무문이 닫힌다. 저벅저벅 내딛는 발걸음 소리가 텅 빈 복도로 사라진다.
테아로트와 반테온. 두 사람만 남은 서재가 고요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황을 살피던 테아로트의 눈동자가 바쁘게 돌아간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지 파악하며 부지런히 눈치를 보던 그가 작게 탄식했다.
“와…… 아프다.”
“뭐가?”
“반테 말이 매정한 건 익히 알고 있었는데…… 오늘은 저 녀석이 좀 불쌍하네.”
지금까지 실컷 도발한 사람이 누구인데, 테아로트는 드물게 델로즈를 동정하며 어색하게 웃는다. 어딜 잘못 다쳤나 걱정되어 바라보니 머쓱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면서 괜히 자신의 가슴께를 눌렀다.
“욕을 한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야.”
“차라리 욕을 듣는 게 편하지.”
고개를 내저은 테아로트가 작게 중얼거렸다.
“다른 에스퍼랑 똑같다는 말이 좀… 어…….”
“틀린 말 아니잖아.”
“맞는 말인데…… 막상 자기 가이드라고 생각한 사람에게 듣는다고 생각하니…… 듣는 내가 아프다.”
반테온은 한참 호들갑 떨다가 차분해지는 실없는 테아로트의 태도가 어이없어 고개를 돌렸다.
“난 쟤 가이드 아니야. 임시야.”
“그래 그렇지. 그건 맞아.”
혼자 무엇을 생각하고 수긍하였는지, 테아로트는 고개를 여러 번 주억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에스퍼끼리 통하는 무언가가 있나 보다 생각하며 긴장으로 뭉친 관자놀이를 천천히 눌렀다.
고민이 끝난 건지 테아로트가 후련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다행이다, 반테가 둔해서.”
“갑자기 왜 욕해?”
둔한 사람 앞에서 대놓고 둔하다고 욕하다니. 듣는 둔한 사람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니야. 계속 그렇게 너만 생각하면서 살아줘. 난 그 점이 참 좋더라.”
씨익 웃으며 분위기를 환기하는 이해 못 할 행동에 혀를 찼다. 저 녀석이 혼자 헛소리하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었다.
델로즈와 함께 있는 동안 긴장으로 뭉친 어깨를 주무르며 물었다.
“그래서 넌 무슨 일로 왔어?”
“아, 맞다. 이것도 사실 델로즈에 관한 내용이긴 한데.”
테아로트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장난스러움이 걷히고, 진지한 표정으로 품속에서 봉투를 꺼냈다.
“안에 내용을 봐.”
테아로트가 심각한 표정으로 건넨 건 하얀 종이봉투였다.
받아 든 종이는 얇고 가벼웠다. 센터의 직인이 찍힌 봉투 윗면을 뜯고 내용물을 꺼내 들었다. 서류의 정체는 보고서였다. 그 속엔 예전 델로즈의 폭주와 관련된 증거들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이건…….”
“델로즈가 습격당한 날부터 지금까지 정리된 내용이야. 조만간 델로즈에게 넘어갈 것 같은데. 그 전에 몰래 빼 왔어.”
델로즈는 그날 폭주의 원흉을 철저하게 조사하라 요구했다. 누구의 짓인지, 어떤 방법으로 진행되었는지. 모든 경우의 수를 파헤쳤다. 아무리 델로즈라고 해도 혼자의 힘으로 진행할 수 없으니 센터에서도 별개의 조사팀을 꾸렸다.
반테온이 알기로는 그 이후 큰 진척이 없었다.
서류 안에는 센터장이 보여준 붉은 액체의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그 아래에 델로즈가 마신 정체불명의 약물. 무색무취, 라는 짧은 문장이 보인다. 역시 그 병은 반테온의 눈에만 붉게 보였을 뿐, 다른 사람의 눈에는 투명하게 보이는 모양이다.
보고서 앞쪽엔 결정적인 단서가 없었다. 예상되는 용의자가 추려져 있으나 확실한 증거는 없는 상태. 다음 장을 넘긴 반테온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중요한 내용이 적혀있어야 할 다음 장에는 앞 내용의 보충만 있을 뿐이다. 마치 분량을 늘리려고 억지로 적은 듯 영양가 없는 이야기만 나열되어 있었다.
“뭔가 이상한데. 센터의 보고서가 이렇게 허술할 리 없잖아. 앞 페이지와 중복되는 내용도 많아.”
“눈치챘어?”
고개를 끄덕여 동의한 테아로트가 비어있는 부분을 툭툭 친다. 가벼운 손길에 힘없이 늘어질 정도로 얇은 보고서다.
“시간이 제법 지났으니까. 아무리 철저하게 계획했다고 해도 지금쯤 꼬리가 잡혀야 정상이잖아. 그런데 아직 확실한 용의자가 없어.”
“머리가 그렇게 큰 놈인가?”
이 거대한 센터 전체를 속일만한 세력이 어디가 있지. 에슬란테가 강대하다 하여도 모든 가문의 행동을 파악할 순 없었다. 그런 사실을 이해하지만 이건 정도가 심했다. 언제 이렇게 큰 빈틈이 생긴 것일까.
“확실한 건 이 얇은 보고서를 끝으로 조사는 완전히 종료될 거야. 불똥이 떨어질지 모르는 조사를 계속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고, 더는 증거도 없어.”
종이를 쥐고 있는 손이 멈췄다. 순간적인 힘에 얇은 봉투에 주름이 졌다.
용의자가 없다는 말은 반대로 누구든 용의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조사가 길어질수록 억지 누명을 쓸 수 있기에 긴장하고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상태로 조사가 마감되면 진범도, 주변 사람들도 모두 안심할 것이다. 딱 한 사람만 빼고.
“누가 중단했는지 몰라도 델로즈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델로즈는 자신을 폭주시킨 범인을 누구보다 찾고 싶어 했다. 게다가 폭주를 막은 가이드를 찾으려면 센터의 자세한 조사가 필수적일 테지. 이렇게 조사를 종결한다면, 이번엔 교육 동 하나 부서지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허술하게 종료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의문을 가진 반테온의 말에 대답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