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델로즈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야.”
“뭐?”
“중간중간 보고를 올렸는데, 어느 순간부터 관심 없다며 거절했다더라. 당사자가 신경을 안 쓰니 조사팀도 난색을 보였거든.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니 그냥 흐지부지해진 거지.”
의외의 말이었다. 델로즈가 그리 쉽게 원한을 잊는 성격으로 보이진 않았는데.
“언제부터 그랬어?”
“다시 센터에 돌아왔을 때부턴가? 뭐, 그 뒤에 독방에도 갇히고 정신없어서 관심을 끊었나 싶기도 한데. 혹시 조난했을 때 무슨 일 있었어?”
같이 조난당한 반테온이지만, 전혀 짚이는 구석이 없었다. 낡은 마을을 통과하고, 마물의 침입을 막은 것 외엔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델로즈가 갑자기 마음을 바꿀 만한 계기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럼 그 가이드에 관한 조사도 멈췄겠군.”
“조사팀 자체가 곧 해산될 거니까. 아마 그렇겠지? 잘된 일이야. 이제 네 정체를 들킬 위험은 사라질 거 아냐.”
센터의 조사는 용의자만 찾는 것이 아니었다. 동시에 델로즈를 폭주에서 구한 가이드를 찾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그것 때문에 수없이 많은 날을 반테온이 얼마나 가슴 졸이며 보냈던가.
“그래서 말인데.”
테아로트가 반테온을 툭툭 치고는 귓가로 다가왔다. 서재에는 보호 장치가 되어 있어 밖에 있는 에스퍼도 도청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조심스럽게 소곤거렸다.
“저 녀석. 이미 알고 있는 거 아냐?”
반테온이 자신을 구한 가이드라는 사실을.
조심스러운 가정에 침을 삼켰다. 테아로트의 가설은 유력하다. 자신을 구한 가이드가 반테온이라는 걸 알았기에 센터의 조사가 중단되어도 미적지근하게 반응했을지도 모른단 뜻이다.
“아닐 거야.”
반테온은 고개를 저었다. 어제라면 테아로트의 말에 동의했을지 모르겠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동굴에서 조난당했을 때 두 사람은 한 가지 약속을 했었다.
델로즈를 구한 가이드를 찾으면 임시 가이드 계약을 철회하고 그 가이드와 정식 매칭을 하기로.
현실은 그를 구출한 가이드와 반테온은 동일 인물이다. 사실을 알게 된 델로즈가 그걸 빌미로 바로 정식 매칭을 요구해도 반테온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기운 빠진 모습으로 물러서던 아까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그가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렇게 처량하게 물러날 이유가 없다. 바로 반테온에게 사실을 밝히고 정식 매칭을 요구했겠지.
정식 매칭을 하면 임시 계약과는 많은 것이 달라진다. 에스퍼 입장에서 가이드에게 조금 더 많은 것을 요구할 수 있었다.
에스퍼의 몸 상태를 빌미 삼아 숙소를 가까이 옮기거나, 가이딩의 횟수를 늘리는 것도 충분히 가능해진다. 테아로트와 케슬란을 만나지 말라고 협박할 필요 없이 옆에서 견제해도 될 것이다.
“정체를 알게 돼서 조사를 멈춘 건 아닌 것 같아.”
“그럼 다른 이유가 없잖아?”
방금 상황을 모르는 테아로트는 의문을 표했다. 머릿속이 복잡하긴 반테온도 마찬가지다. 서류를 묶어 개인 서류를 보관하는 서랍에 깊숙이 집어넣고 잠금을 걸었다.
“일단은 두고 보자. 일단 변수가 너무 많으니까.”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네. 센터도 모르겠고, 델로즈도 모르겠고. 진짜 독심술이라도 익히고 싶다.”
“그건 나도 그래.”
진심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궁금하다. 저 삐뚤어진 머릿속에는 어떤 계산이 흘러가고 있는 건지. 매번 알고 싶다고 생각한 델로즈의 의도가 오늘따라 견딜 수 없이 궁금했다.
“수도에 용한 점쟁이가 있다던데. 다녀올까?”
장난스럽게 묻는 테아로트의 눈매에는 묘한 진실이 담겨 있었다.
“그런 걸 믿었어?”
“나름 잘 맞추거든. 제법 용하더라.”
테아로트가 신이 나서 팔을 들며 설명했다.
“지금까지 말한 예언이 다 맞았다니까? 보자. 얼마 전 수요일에 비가 올 거라는 것도 맞췄고, 중앙 광장 분수대에 새똥이 떨어질 거란 것도 맞혔고, 또…….”
“참 도움되겠네.”
하나같이 하찮고 쓸데없는 점괘밖에 없었다. 한심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테아로트가 억울하다며 외쳤다.
“이번에 큰 예언도 남겼어. 붉은 하늘 아래서 한 커플이 진하게 키스할 거라던데. 어떤 에스퍼가 연인이랑 그렇게 간 큰 짓을 할지 기대 중이라고.”
당분간 하늘만 보고 살겠다고 다짐하는 테아로트에게 손짓했다. 쪼르르 달려오는 테아로트의 귀를 잡아당겨 작게 소곤거렸다.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당장 나가. 피곤하니까.”
풀이 죽은 테아로트가 고개를 떨구고 그제야 방을 나갔다.
***
“곧 추수제가 열린다던데.”
“얼마 전 지방 축제가 습격당한 뒤에 미뤄지지 않았어? 예정대로 하는 거야?”
“수도랑 그 시골이랑은 다르지. 왕실에서 정상적으로 진행할 거라고 발표했어.”
“맞아. 이번엔 더 크게 한다더라. 10일 동안 등을 켤 거래.”
오래간만에 열리는 축제에 센터 전체가 들썩거렸다.
왕국의 번영과 영광을 기리는 추수제는 일 년 중 큰 행사에 속했다.
겨울이 오기 전 마지막 황금빛 태양을 기리기 위한 축제를 위해 먼 지방에서 올라오는 사람들로 북적일 것이고, 긴 여름 노동에 지친 자들은 남은 곡물을 털어 술을 빚었다.
얼마 전 축제가 열린 마을에 마물의 습격이 있었기에, 사람들은 이번 추수제는 취소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올해 추수제를 더 성대하고 화려하게 치를 거란 공문이 내려왔다. 상처 입은 백성들을 돌보고 위기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작을 알리겠단 포부였다. 반테온은 그 내용을 듣고 쓰게 웃었다.
위기는 무슨.
수도에는 자갈 조각 하나 튀지 않았을 텐데 거창하게 포장해서 떠들어댄다. 정작 상처 입은 마을은 소식도 듣기 어려울 거리에서, 시원한 창가에 앉아서 불구경하던 이들만 생색내는 것이다.
과연 귀족의 우두머리다운 허영이다.
“왕실도 제법 급한가 보네.”
요란한 축제를 여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직 왕실이 건재하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이겠지. 속이 뻔히 보이는 수에 입꼬리를 올리며 서류에 펼쳤다. 축제 동안 각 가문의 협조를 구하는 공문이었다.
협조를 가장한 공문 안에는 지원을 바라는 품목과 인력 등 자세한 요구사항이 적혀있었다.
가문마다 바라는 분야도 다르고, 규모도 다르다. 매년 에슬란테 가문에는 정중한 문체로 최고 수준의 지원을 요구했다. 말이 요구지 강요에 가까운 내용이다.
다 지원해도 에슬란테의 재산에 흔적도 남지 않을 수준이지만, 평소 아무렇지 않게 서명하던 종이가 오늘따라 의미심장하다.
왕실이 존재하되 가진 힘은 얼마 되지 않았다. 유전병을 막기 위해 근친혼을 금지했던 선택은 그들을 몰락의 길로 밀어 넣었다. 가장 진한 핏줄이 가장 강한 에스퍼를 낳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왕실과 많은 혼인으로 힘을 키운 에슬란테가 왕족보다 더 짙은 핏줄이 남게 된 것이다.
그런 왕실에서 델로즈의 등장은 하늘이 내려준 기회였다. 수백 년 만에 나타난 자연 발생 에스퍼이자, 건국 이래 처음 발현된 SS등급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왕실과 연을 맺고 싶었을 터인데, 결국은 에슬란테와 묶이게 되었다.
반테온에겐 한없이 번거로운 사태가 그들에겐 날벼락 같은 재난으로 느껴질 것이다.
두 배 가까이 늘어난 지원량과 묘하게 복잡해진 요구사항은 마치 아직 왕실에 충성하느냐 캐묻는 느낌이다. 바늘만도 못한 위협이나 불필요한 견제이지만, 의심받는 기분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제발 데려가 줬으면 좋겠다.”
반테온은 서류에 대충 서명했다. 흘리듯 갈긴 채 다시 접어 봉투에 넣었다. 광산 파견 이후 없어진 수업 대신 센터에서 처리하는 가문의 일을 늘렸다. 원래 맡아서 정리하던 개인 자산뿐이 아니라 장로들이 처리하던 주요 업무도 가져오기 시작했다.
굳이 미뤄도 되는 업무를 자청한 까닭은 일이 너무 재미있어서도 아니고, 급한 일이 있어서도 아니다. 살면서 이런 일이 있을진 몰랐으나, 시간이 너무 남아서였다.
평소와 다른 달력을 바라봤다. 얼마 전 델로즈가 다녀간 후 행정실에서 연락이 들어왔다. 당분간 가이딩 일정을 변경하고 싶다며 새로운 일정표를 전했다. 그 결과 2주간 반테온의 달력은 새하얀 상태다. 평소라면 갑자기 얻은 장기 휴가에 기뻐해야 하나 말처럼 속이 편하진 않았다.
‘피하는 거겠지.’
그게 아니면 델로즈가 가이딩 일정을 취소할 이유가 없다. 서재에서 그렇게 돌아간 후 병아리처럼 따라다니던 행동도 멈추고, 가이딩도 미뤘다. 여러모로 예상을 벗어나는 상대다.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 떠올랐다. 단호하게 이야기한 반테온과 어깨를 늘어트리고 사라진 델로즈. 그 말을 듣고 자기가 더 아프다던 테아로트의 반응이 떠올랐다. 말을 너무 심하게 한 것일까.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도 처음 겪는 반응에 자꾸 관심이 델로즈에게 기울었다.
‘음….’
자꾸 묘하게 신경을 건드리는 생각에 펜을 빈 종이에 쓱쓱 그었다. 반테온이 원하면 자신의 모든 걸 바꿔보겠다고 했던가. 자존심도 없이 숙이던 모습이 쉽게 잊힐 리 없다.
반테온도 사람인지라 양심에 살짝 미안한 마음이 1g 정도 겹친다. 점차 무거워지려는 죄책감을 털 듯 고개를 저었다.
‘잘된 거야.’
조금 마음이 불편하지만, 결과적으론 잘된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쥐고 었던 단말기를 내려놓았다. 잠시 멈췄던 펜을 부지런히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