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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급 에스퍼를 피하는 방법 (63)화 (63/112)

#63

왕실에 협조하겠다는 공문을 보냈으니 직접적인 준비에 착수해야 한다. 에슬란테 저택이 위치한 동쪽 지구에 꽃을 장식하고 동쪽을 맡을 치안대를 꾸려야 했다.

반테온은 적당한 품종의 가로수와 화단을 고르며 서류를 한 줄씩 채워 넣었다.

“반테 서류 작성은 끝났어?”

테아로트가 노크도 없이 서재로 들어왔다. 빨간 머리통이 이쪽저쪽을 살피며 바쁘게 움직였다.

“이제 노크하는 법도 까먹었나 보네.”

“아니, 또 그 망할 놈이 있으면 예고 없이 한 대 먹일 생각이었지.”

“어차피 네가 져.”

“그래도 기습하면 한 대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후환을 생각하지 않는 말에 한숨이 나왔다.

테아로트는 델로즈가 또 찾아오진 않을지 경계하는 눈으로 서재 안팎을 살핀다. 한참을 수색하더니 반테온밖에 없는 걸 확인하고 응접실 한쪽에 놓인 흔들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의자에 앉자 테아로트의 머리카락이 정신없이 흔들렸다. 분명 편안하게 앉으려고 흔들의자를 산 건 맞는데, 저렇게 혹사할 계획은 없었다.

테아로트는 반테온의 속도 모르고 값비싼 테셀목 의자가 삐걱거리도록 흔들어 댄다. 한 달을 기다려서 받은 것이 무색하게 기성품보다 못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이러니 명품도 쓸 줄 아는 사람이 써야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거 부서지면 네 모가지도 부서질 줄 알아.”

“안 부서져. 나 그렇게 무겁지 않거든?”

“넌 나보고 양심 없단 소리 하지도 마.”

“이 정도면 날씬한 편이라고. 에스퍼 중에 슬림한 체형이라니까?”

그 전제 자체가 틀렸단 말이다. 거구들만 모인 육체 계열 에스퍼 중에 슬림하다고 해도, 반테온보다 20%는 더 무거울 것이다. 오죽하면 에스퍼들의 대기실에 있는 가구는 일반 성인용 가구보다 훨씬 크고 무거운 소재의 가구로 채워져 있었다.

두꺼운 테아로트의 몸을 맘에 들지 않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분명 다른 A등급 육체계보단 작긴 하다. 다른 육체계를 떠올리면…….

자동으로 머릿속에 델로즈가 떠올랐다. 큰 키에 새까맣게 빛나는 델로즈는 큰 체구임에도 날렵한 인상이다. 분명 어깨나 흉통은 테아로트보다 넓을 텐데. 특유의 날카로운 분위기 때문에 두껍거나 둔한 인상은 받기 힘들었다.

‘쯧.’

또다시 델로즈에 관한 생각이 떠오르자, 반테온은 작게 혀를 찼다. 눈에 안 보이면 속이 편한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거슬린다. 종종 머릿속에 떠올라서 번거롭게 만들었다. 아예 가이딩 일정까지 취소하다니, 안 하던 짓을 해서 신경 쓰이게 했다.

“아직 업무가 조금 남았으니까 기다려.”

“알았어. 알았어. 난 신경 쓰지 마.”

저렇게 정신없이 구는데 어떻게 신경 쓰지 말라는 건지 모르겠다. 일단은 작성하던 서류로 눈을 돌렸다. 사각사각 종이 위를 스치는 펜촉 소리가 서재에 울렸다. 페이지 넘기는 소리, 계산기 두드리는 소리가 한참 울렸다. 반테온의 타박에 눈치를 보는 것인지, 테아로트가 눈을 꼭 감고 마네킹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정적을 오래가지 않았다. 숨소리만 내며 잠시 조용하던 테아로트가 감았던 눈을 떴다.

“폭풍전야가 이런 걸까.”

“불길한 소리 하지 마.”

“진짜야. 왜 이렇게 조용하지? 축제 준비를 해도 흥도 안 오르고…….”

이상하게 촉이 좋은 테아로트의 말에 창밖을 바라봤다. 거대한 창밖 멀리서 수도를 두른 성벽이 보였다. 평소엔 조용한 성벽 주변으로 새로 수도를 찾아온 사람들을 수용하는 임시 천막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반테온의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에스퍼들은 그걸 구경하며 수군거리는 자들도 있었다. 분명 축제의 날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테아로트의 말대로 이상하게 흥이 나지 않았다.

얼마 전, 지방 축제에서 벌어진 참상 때문일까. 묘한 불안감이 남아 있었다.

“델로즈 놈도 조용하고 말이야. 물론 조용하면 좋지만, 안 그러던 놈이 사라지니까 더 불안해.”

방금 반테온이 했던 생각과 같은 평을 내리며 테아로트는 몸을 더 깊게 의자에 파묻었다. 빵빵하던 쿠션이 한쪽으로 꺼진다. 조만간 의자 쿠션을 갈든가 해야겠다.

“반테. 언제까지 일할 거야? 여기로 와봐.”

“심심하면 돌아가면 되잖아.”

“쳇.”

투정이 통하지 않자 의기소침해진 테아로트는 흔들의자 옆에 놓인 소파로 가서 길게 몸을 기댄다. 흔들의자에서 놀더니 이제는 완전히 드러눕는다. 서재를 떠날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원래도 귀찮은 녀석이지만, 얼마 전 파견에서 돌아온 이후 정도가 심해졌다.

처음엔 델로즈가 이상하니 지켜주겠다는 핑계로 붙더니, 확실하게 가이딩 날짜도 미뤄지고 마주치는 일이 없음에도 계속 귀찮게 굴었다. 테아로트의 치근덕거림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음에도 새삼스러울 정도로 귀찮았다.

소파 전체를 차지하며 누운 테아로트를 한심하게 보며 다가갔다. 어디서 먼지라도 묻은 것인지 그사이 깨끗하던 가죽에 허연 얼룩이 생겼다. 당장 등을 걷어차서 쫓아낼 테다.

“오, 반테. 드디어 놀아주는 거야?”

속도 모르고 눈을 반짝이던 테아로트는 반테온이 가까워지자 환영하듯 두 팔을 펼쳤다. 덩치도 산만 한 놈이 어린아이처럼 구는 꼴에 눈썹을 찌푸리며 발을 들었다.

어차피 아프지도 않을 테니 가슴팍을 차 줄 테다, 하고 올린 발목이 그대로 테아로트의 손에 잡혔다. 어? 하는 소리도 낼 사이 없이 무릎을 끌어당기더니 반테온의 몸을 가볍게 들어 자신의 배 위에 올려 앉혔다.

“…….”

이건 또 무슨 꼴일까. 다 큰 성인이 돼서 남의 배 위에 앉게 된 반테온은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힌다. 분명 사람의 배는 여린 부분일 텐데, 성인 남성을 얹고도 힘들지 않은지 테아로트는 웃으며 반테온을 올려다봤다.

소리 내 웃을 때마다 엉덩이 아래 뱃가죽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이건 또 뭐 하는 짓인데.”

“뭐 어때. 과거엔 자주 소파에서 놀았잖아.”

테아로트가 말하는 과거는 두 사람 다 발현하기 전, 10살밖에 안 된 꼬맹이 시절이다. 그땐 소파 위아래를 뛰어다니고 뒹굴다가 혼나곤 했다.

“그땐 너도 활기찼는데. 나 잡을 거라고 신발도 던지고.”

즐거운 추억처럼 이야기하는 테아로트의 말에 쓰게 웃었다. 누가 들으면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할 말투다. 분명 사고를 친 테아로트를 잡아 죽이겠다고 신발을 던졌던 것 같은데…….

“신발 맞은 이유는 생각 안 나?”

“하하하. 이상하다 그 부분만 생각이 안 나네.”

반테온이 난동부린 원인의 90%를 제공한 테아로트가 뻔뻔하게 웃었다.

자기는 어렸을 때부터 점잖은 편이라고 변명하려던 반테온은 조용히 말을 삼켰다. 어차피 들을 놈이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처음부터 뱉지 않았겠지. 테아로트의 허튼소리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어린 시절처럼 휘말리기엔 반테온의 체력도 예전 같지가 않다.

퉁명스러운 말투로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때랑 지금이 같아?”

“다르지. 그땐 같이 개울에서 물놀이도 하고, 잠도 같이 자고…….”

“네가 마음대로 쳐들어온 거겠지.”

멀쩡하게 훈련하고 있던 반테온의 말을 개울가로 끌고 간 것도 테아로트고, 잠이 안 온다고 막무가내로 침대에 파고든 것도 테아로트였다.

지금이라면 절대 받아주지 않을 장난이지만, 부모를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반테온답지 않게 어울리며 놀았었다.

테아로트는 두 부모의 초상을 연달아 치른 반테온을 위해 더 짓궂게 장난치며 위로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에 잠시 고마움을 느꼈던 적도 있었는데, 이제는 잘 알고 있다. 테아로트는 원래 그런 놈이었다.

“넌 언제 자랄래?”

“지금보다 더 자라면 조금 힘들지 않을까. 지금도 침대에 누우면 발이 나가는데.”

“키 말고 정신 말이야. 정신.”

손가락으로 테아로트의 이마를 꾹꾹 누르자 저항 없이 머리를 움직인다. 붉은 머리카락이 정신없이 흔들리는 중에도 뭐가 좋은지 얼굴이 환하다.

구박해도 타격이 없으니 기운만 빠진다. 저 한심한 놈을 진심으로 상대해도 본인만 피곤하지.

바닥으로 내려가려는 반테온의 허리엔 여전히 테아로트의 손이 단단하게 붙어있었다. 움직이지 못하게 잡은 손등을 짝 소리 나게 때렸다.

“너 힘쓸래?”

반테온은 에스퍼들이 힘자랑하며 억압하는 것을 못 견디게 싫어했다. 한때 에스퍼가 되지 못했던 열등감은 수습되어 가슴 한구석에 작게 묻었으나, 그때 가진 감정의 흔적은 남아 있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테아로트는 아쉬운 표정으로 겨우 허리를 놓았다.

“갑자기 왜 이래. 요즘 이상하게 구는 거 알아?”

안 하던 짓을 연달아서 한다. 의구심을 가지고 바라보자 어깨를 으쓱인 테아로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얌전히 물러가나 싶더니 이번엔 팔을 뻗어서 장갑을 끼지 않은 반테온의 손을 잡았다.

“……!”

“이상하지 않아? 이제는 이렇게 닿는 것도 힘들잖아.”

꽉 잡힌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맨살이 닿는 느낌에 손가락부터 싸한 느낌이 어깨까지 타고 오른다. 이런 오랜 접촉은 두 사람이 발현한 후 처음이다.

왕국에서 친척 간 가이딩은 철저하게 금지되었다. 오랜 시간을 보낸 가족이라 하여도 에스퍼와 가이드로 발현한 순간부터 완전히 새로운 관계로 정립되었다.

친족인 가이드와 에스퍼가 맨살로 접촉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행위였다. 머릿속에 관습처럼 새겨진 오래된 법이다. 누군가 무어라 하지 않아도 약속한 것처럼 그렇게 행동했다. 태어났을 때부터 당연했으니까. 테아로트는 그런 당연한 법에 의문을 가지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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