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소수의 회원으로 운영되는 야센에서, 그것도 반테온이 이름만 보고 알아챌 정도로 야센의 단골들만 사용하고 있다면 이유는 뻔하다. 마담 레쏘의 주요 거래처가 야센이라는 뜻이다. 그 길로 야센의 대표를 만나고 싶다는 면담을 신청했고, 드디어 약속 날짜를 잡아 찾아온 것이다.
한참을 걸어 복도 끝에 도착하니,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손잡이 없는 매끈한 문이 나왔다. 반테온의 발걸음이 멈추는 순간, 문 위에 달린 스피커에서 기계음이 잔뜩 섞인 목소리가 나왔다.
[들어오십시오.]
삑- 하고 문의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연스럽게 문이 열리고 그 속에서는 새하얀 반가면을 쓴 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반테온을 맞이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분명 영문모를 자신의 방문이 반갑지 않을 터인데, 상대의 웃는 입매는 흔들림 없었다. 완벽하게 예법을 지키고 있음에도 가식적인 태도와 반테온 앞에서 가면을 벗지 않는 오만함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주인의 환영에 대꾸도 하지 않고 들어간 반테온은 준비된 소파에 앉아 몸을 기댔다.
거만한 태도에도 맞은편 남자는 공손하게 차를 내밀며 반테온을 응대했다.
조용히 방 내부를 둘러봤다. 검은색과 은색으로 깔끔하게 치장된 방에선 사장에 대한 어떤 단서도 건질 수 없었다. 나이는 많아야 40대 정도. 3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사장은 반테온도 정체를 파악하기 힘든 상대였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상대는 반테온에 대해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마담 레쏘와 연락할 수단.”
“이런…… 의외입니다. 그런 것에 관심이 있으실 줄이야.”
남자는 예상치도 못했다는 듯 능글거리는 미소를 더 짙게 펼쳤다. 왜 그런 물건을 찾느냐는 은근히 느껴지는 호기심이 불쾌했다. 찌푸려지는 눈빛에 사장이 손사래를 치며 부정했다.
“저런, 농담입니다. 하……하하.”
“대답은?”
“사실 마담 레쏘는 워낙 신비한 인물이라 저희도 확실한 정체는 알 수 없습니다.”
“…….”
“그렇게 대답해야 하지만…… 아무래도 고객님께 그럴 수는 없겠죠.”
남자는 이를 살짝 드러내며 웃었다.
“왕국의 새 기둥이 될 분인데요.”
새 기둥이라. 호사가들이 쉽게 떠드는 내용이다. 원래도 왕족을 견제할 만큼 강대한 에슬란테가 델로즈라는 무기를 손에 쥐었으니 곧 판도가 바뀔지 모른다는 추측이었다.
반테온의 성격을 안다면, 아니 에슬란테 가문의 성향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어림도 없을 가정이다. 벼락부자가 된 놈들이 흔히 하는 실수다. 자신이 얼마나 아는지를 티를 내고 싶어 안달이겠지. 책임지지 못할 말을 쉽게 입 밖으로 내뱉는 것이다.
실현 가능성도 없는 사소한 정보 하나, 그 하나를 남보다 더 안다고 거들먹거리다가 추락하는 놈들을 많이 봤다.
“가진 것에 비해서 좀 가볍군.”
야센은 가진 힘은 약해도 쥐고 있는 정보가 많았다. 어떤 분야에선 에슬란테보다 많은 내용을 알겠지. 이 정도 고객과 규모를 유지한다면 상당히 많은 것을 누리고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럼 조심해야지.
가진 것이 많으면, 지킬 것도 많지 않겠는가. 그것들에 빌어 이야기하자 사장의 입가에 미소가 사라졌다.
“하하하, 그저 고객님과 조금 더 친밀한 대화를 위해서…….”
“토프레 가문이 사람을 볼 줄 모르나 보군. 아니면 북쪽 사람들은 다 그런가?”
“…….”
반테온의 말에 상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겨우 회원제 클럽의 운영자가 천하를 재단하고 싶은가 본데, 오만한 이야기다. 자신의 이름표답게 반테온이 원하는 정보만 주고 사라질 놈의 잡소리가 길었다.
“그, 그게 무슨 말이신지…….”
“깨끗하게 숨긴다고 숨겨도 가리지 못하는 것이 있지.”
물건을 거의 들여놓지 않은 깨끗한 사장실은 누가 이 클럽을 운영하는지 모르게 하기 위해 수를 쓴 것이다. 새까만 사장실엔 가문을 알아볼 수 있는 어떤 증거도 없었다. 하지만 사람의 흔적은 사람에게 남는 법이다.
“타임리 잎을 까맣게 될 때까지 우려서 향을 뽑은 건 신선한 잎을 구하기 힘든 북부의 방식이지. 자네의 말에도 아직 북쪽 억양이 남아 있고.”
“…….”
“이런 곳을 타인에게 맡길 리는 없으니 친인척이나 오래 충성한 자들에게 부탁했을 텐데.”
북부에 중심을 두고 있는 가문은 여럿 있었다. 그중 토프레 가문이라 확신한 이유는 따로 있다.
“아직 왕실 예법을 다 익히진 못했나 보군. 차를 따를 때 두 손가락을 비워두는 건 무예를 중시하던 토프레 가문 사람들이 하는 행동이야.”
“하하……하. 제가 많이 부족했나 봅니다.”
주인은 어색하게 웃으며 자신의 가슴팍을 뒤졌다. 약하게 떨리는 손끝으로 빳빳한 명함을 전달했다. 아까와 다르게 공손한 태도였다.
“제 직통 연락처입니다.”
“잘됐군. 마침 필요했는데.”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태도에 명함을 받아 들었다. 번거롭게 이런 곳을 두 번이나 찾아올 생각은 없다. 계속 이런 식으로 말을 돌리고 헛걸음하게 만든다면 그땐 밖에 대기 중인 무력을 동원해서 강제로 들을 생각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목숨을 건진 사장은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조아렸다.
“사실 저희도 마담 레쏘에게 먼저 연락할 방법은 없습니다. 마담이 연락하면 그때야 대화할 수 있습니다.”
“여기가 주 유통처로 알고 있는데?”
“사실 처음 계약할 때 조건이 그랬습니다. 아시다시피 워낙 찾는 분도 많고 귀한 약인지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유롭게 거들먹거린 것에 비해 형편없는 능력이다. 반테온은 손에 쥔 명함을 가볍게 빙빙 돌렸다. 불만스러운 태도에 사장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출처도 모르는 약을 돈이 된다는 이유로 덥석 받아서 퍼트리다니. 결국, 문제가 생기면 모든 책임은 야센이 져야 한다.
경솔하고 어리석은 판단이다. 마담 레쏘가 정확하게 어떤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 몰라도 멍청한 놈 골라서 부리는 재주는 있는 것 같군.
“실망하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다음 마담의 연락이 닿으면 즉시 연락드리겠습니다. 혹시…… 따로 전달할 말씀이라도 있을까요?”
언제 올지 모를 연락을 일방적으로 기다려야 한다니. 반테온에게는 드문 상황이다. 즐겁지 않은 상황에 다리를 까딱거렸다. 사장의 입매가 더욱 굳었다.
마담 레쏘에게 전달할 말이라. 알아내고 싶은 건 많았다.
어떻게 에스퍼의 힘을 차단하는 물건을 만들었지? 그걸 델로즈에게 먹인 건 마담의 의도인가 아니면 다른 이의 의뢰인가? 의뢰라면 누구의 짓일까?
여러 가지 질문이 맴돌았다. 하지만 질문한다고 알려줄 정도로 어리숙한 자가 아니겠지. 벌여놓은 판을 보면 제법 치밀한 자였다. 마담 레쏘의 약이 문제라는 걸 들켜도 꼬리를 밟히지 않겠다는 자신도 있을 터.
그렇다면 완전히 숨어버리기 전에 제 발로 뛰쳐나오도록 해야 했다. 반테온은 자리에서 일어나 당황한 채 입을 벌리고 있는 사장을 향해 말했다.
“네가 병에 담아놓은 것의 정체를 알고 있다. 그렇게 전하면 될 거다.”
마담 레쏘의 약을 보고 지울 수 없던 기시감이 떠올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답은 하나였다. 에스퍼의 주변에서만 보이던 붉은 기운, 그것과 같은 기운이 보이는 액체. 아무리 색을 바꾸고 예쁜 병에 담아도 알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알아듣겠지.
마담 레쏘는 ‘에스퍼의 피’를 가공하여 약물로 팔고 있었다. 약물 속에서 그 어떤 혈액 반응도 나오지 않았으나 반테온은 알 수 있었다. 그의 눈에는 똑똑하게 보였으니까.
영문을 모르는 표정으로 멍하니 있는 사장을 두고 뒤돌아 나왔다. 걸어 들어온 복도를 빠르게 돌아가자 밖에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함께 온 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용건은 끝나셨습니까?”
“그래.”
“어떻게 할까요?”
“됐어. 아는 것도 없어 보이니까.”
수상한 기색이라도 보이면 사람들을 동원해서 멱살이라도 쥐고 털어볼 생각이었다. 반테온과 함께 온 이들은 단순히 운전기사로 보이는 자들까지 다 에스퍼였다. 4명의 인원이 동행했으니 손가락 하나씩만 보태도 건물 하나쯤은 가볍게 부숴버릴 전력이다. 그러나 예상보다 한심한 사장의 태도에 흥이 식어버렸다.
털 게 있어야 뭐라도 털지. 딱 봐도 하수인으로밖에 안 보이는 사장에 흔한 계약서도 없을 것 같은 구두 거래 형태. 목줄 잡힌지도 모르는 상대를 핍박해서 무엇 하겠는가. 괜히 시간만 아깝지.
자동차에 다시 몸을 실었다. 조용히 출발하는 차는 넓은 길을 향해 움직였다. 외진 그림자 사이를 빠져나와 야센의 앞쪽을 스쳐 지나갔다. 거대한 나무 실루엣이 어둡고 밝아져 가며 창문을 스치고 그 틈새로 야센 앞에 멈춰선 사람들이 보였다.
오늘도 변함없이 긴 밤을 보내려는 사람들을 흘낏 바라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한 사람에게 시선이 꽂혔다. 왜일까. 시선을 떼기 힘든 감각에 굳은 듯 바라보던 반테온이 다급하게 앞자리로 손을 뻗었다.
“멈춰. 당장 세워!”
다급히 브레이크를 잡고 바퀴가 흙바닥에 엉겨 붙으며 거친 소리를 낸다. 무슨 일이냐며 뒤를 바라보는 경호원에게 대기하라 명하고 급하게 자동차에서 내렸다. 깔끔한 구두 바닥에 흙과 자갈이 밟히는 것도 개의치 않고 야센을 향해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