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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급 에스퍼를 피하는 방법 (68)화 (68/112)

#68

반테온은 한쪽에 비치해둔 보호 마석을 가슴팍에 넣었다.

“온다.”

“뒤쪽에서 엄호하겠습니다!”

전열을 가다듬는다고 하여도 4명으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방어에만 전념하면 센터 에스퍼들이 정리할 때까지 버틸 수는 있었다. 문제는 가이딩이다. 에스퍼의 힘이라는 건 소모품이고, 언젠가 바닥이 드러나 버린다.

그나마 반테온이 가이드이니 다행일까. 그것도 어중간한 합리화였다. 중간중간 위험한 인원을 반테온이 가이딩 한다고 해도, 반테온의 체력 또한 언젠가 전부 소모되고 말 것이다.

‘긴 밤이 될 것 같네.’

어설프게 걱정에 피로도를 높이면 나중에 가이딩 할 때 제대로 역할을 하기 힘들다. 밖에서 마물 울음소리와 돌무더기가 쏟아지는 진동을 느끼며 시트에 몸을 기댔다.

번쩍이는 불빛에 각막이 시려서 눈을 감는다. 눈꺼풀 위로 요란한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쿵. 쿵. 카득!

“차에는 접근 못 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긴박한 목소리에 상황이 그리 좋지 않다는 걸 예상할 수 있었다. 마물의 발톱이 찍고 지나간 차체엔 동그랗게 구멍이 뚫렸다. 반테온이 앉은 좌석 주변은 일반 방어 장치보다 두 배 강도로 제작되었으나, 그렇지 않은 부분은 종이 쪼가리나 다름이 없다.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전투 중인 자들을 바라봤다. 붉은 기운이 아직은 규칙적으로 움직인다. 상태를 확인한 반테온은 최대한 마물을 바라보지 않고 다시 눈을 감았다. 괜한 공포에 사로잡히면 할 수 있는 일도 제대로 해낼 수 없다.

-쾅!

지금까지 들리던 소리와 달랐다. 마치 땅을 거대한 망치로 내려찍은 듯 굉음이 들리고 잠시 주변에 모든 소음이 사라졌다. 이상함에 눈을 뜨려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왜 여기서 소란이야. 전투 가능한 에스퍼면 당장 중앙 전투에 합류해야지.”

저벅저벅 다가오는 구둣발 소리가 자동차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얼마나 대단한 분을 보호하려고 도망도 안 가고 여기서 발악 중일까?”

기우뚱하고 차체가 기울었다.

“어디 얼굴이나 볼까?”

거침없이 자동차 한쪽 아래를 쥐고 그대로 들어 올린 것이다.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무식한 행동이다. 자연스럽게 반대편 문으로 미끄러진 반테온은 그 무례한 상대와 그대로 눈이 마주쳤다.

“너…….”

반테온을 확인한 델로즈의 눈이 크게 뜨였다.

경악으로 머뭇거리더니 들어 올렸을 때와 다르게 조심스럽게 자동차를 내려놨다. 조각나서 울퉁불퉁한 지면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살포시 바닥에 내려놓은 델로즈는 닫힌 문을 손쉽게 뜯어냈다.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가이드는 모두 방공호로 피신 갔을 텐데.”

“가던 중이었지.”

길이 저렇게 되기 전까지는. 막힌 도로와 반쯤 부서진 자동차를 살펴본 델로즈는 상황을 파악하고 초조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마물에 둘러싸인 검은 자동차 한 대와 분명 자력으로 탈출할 수 있어 보이는 에스퍼들이 발목 묶인 채 소모성 싸움을 지속하는 광경에 달려왔더니. 델로즈의 눈에 보인 건 가장 이곳에 있으면 안 될 사람이었다.

델로즈는 매끈한 입술을 꽉 다물더니 마물의 피에 절어 엉망이 된 에스퍼들을 향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에스퍼란 놈들이 멍청하게 그렘린 몇 마리 처리 못 해서 차를 이 꼴로 만들어?”

목숨을 걸고 자동차를 보호하던 경호원을 멍청이 취급한 델로즈는 반테온이 기댄 반대편 문도 완전히 뜯어냈다. 열린 공간으로 매캐한 연기가 거침없이 쏟아져 들어온다. 불덩이로 변해버린 도시의 풍경이 그제야 한눈에 들어왔다.

발을 내밀어 바닥을 딛자 그렘린의 핏물이 끈적하게 구두 밑창에 들러붙었다. 불쾌한 감각에 어깨를 떨자, 한 걸음 떨어진 델로즈가 작게 혀를 찼다.

“이리와.”

델로즈의 거대한 손이 반테온을 향해 내밀어진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선은 불안하게 흔들렸다. 혹시라도 반테온이 거절하지 않을까. 그런 불안함이 서려 있었다.

델로즈의 불안감과 다르게 반테온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반테온이 델로즈에게 업히고 안긴 횟수는 많다. 다리를 다쳤을 때도, 다 나아갈 때도 치료를 빙자하여 업혀 다녔다. 심심하면 반테온을 들고 가려던 녀석이다. 그중에 이렇게 정중하게 오라는 말을 들었던 적이 있을까.

심각한 상황도 잠시 잊고 델로즈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자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냥 보호하려는 것뿐이야.”

변명하듯 붙인 말에 헛웃음이 나온다. 누가 그걸 몰라서 망설인 게 아니다. 신기해서 봤을 뿐이다.

그나마 원래 색을 유지하고 있는 바닥을 골라 밟고 델로즈에게 다가갔다. 평소라면 반테온의 의사 따위 상관없이 마음대로 들어 올렸을 델로즈였다. 그런데 지금은 손을 묵묵히 펼친 채 반테온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 발로 안긴 건 처음이라 어색한 몸짓으로 그 위에 무게를 실었다. 한쪽 팔을 잡자 무릎 아래를 받치고 그대로 편안하게 들어 올린다. 순식간에 시야가 델로즈보다 높아졌다.

“너희들은 바로 저택으로 돌아가서 지원해. 고생했다.”

“알겠습니다. 몸조심하십시오.”

고개를 숙이는 경호원들의 기운은 아직 안정적이었다. 추가로 가이딩 해주지 않아도 오늘 밤은 충분히 버티겠지. 그들의 상태가 안 좋아지더라도 저택에 도착만 하면 가문에 고용된 가이드가 해결해줄 것이다.

그럼 안전도 보장되었고, 가문의 상황도 나아질 테니 남은 문제는…….

‘이 녀석 기운이 왜 이래?’

처음 봤을 때부터 불편하게 요동치는 델로즈의 붉은 기운이 성가시게 시야를 어지럽혔다.

그러게 왜 가이딩 날짜를 미룬단 말인가. 진작 왔어야지.

어울리지 않게 고백했다가 차였다고 거리를 두더니 잘하는 짓이다. 제법 괴로웠을 텐데 이 상태가 되도록 버티다니. 제멋대로인 건 알았는데, 이런 부분까지 마음대로 할 줄은 예상도 못 했다.

“너 상태는?”

“버틸 만해.”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한다. 에스퍼의 기운을 눈으로 볼 수 없었다면 그대로 넘어갔을 정도로 태연한 목소리였다. 그렇다고 내 눈엔 네가 정상이 아니라고 따질 수도 없다.

티가 나지 않게 몰래 가이딩이라도 해볼까 하고 기운을 움직여봤다. 천천히 반테온을 따라오던 기운은 무언가 막힌 것처럼 어느 시점에서 돌아간다. 그러고 보니 직전 가이딩 때도 그랬다.

분명 높은 매칭률이 이유 없이 떨어질 리 없는데, 두 사람의 매칭률이 떨어진 것처럼 효율이 낮아졌다. 델로즈에게 안겨 있다고 하나, 장갑까지 다 챙겨입은 상태였다. 살갗이 닿지 않은 상태는 손을 잡을 때보다 효과가 없었다. 매칭률이 높으니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천천히 안정되겠지.

어떻게 해야 할까.

평소라면 고집대로 고생하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고 내버려 뒀을 테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델로즈만의 피해를 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럼 꽉 잡아.”

복잡한 반테온의 마음도 모르고 델로즈는 그대로 몸을 띄웠다.

자신의 힘으로 비행하듯 공중으로 올라간다. 이미 하늘을 빼곡하게 채우던 마물이 바닥으로 내려갔기에 하늘은 고요한 공간이었다.

델로즈는 그곳에서 남은 한 손을 오른쪽에서 왼쪽. 위에서 아래로 움직였다.

그의 손가락이 향하는 곳마다 마물의 찢어지는 포효가 들리고 벽돌이 붉게 물들었다. 동시에 그들 주변의 사물들도 함께 터진다. 시야를 밝히던 가로등이 쓰러지고, 수십 년 동안 그늘을 만들던 가로수가 불탔다.

그제야 로한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번엔 네 에스퍼도 조금 힘들걸. 제어 못 하는 강한 힘은 복잡한 수도에서는 역효과니까. 더 큰 문제를 만들지도 모르지.’

그의 말대로다. 원래도 섬세한 컨트롤보다 힘으로 해결하는 델로즈였다. 근접전으로 싸워도 피해가 클 텐데, 이렇게 원거리에서 능력을 쓰는 건 좋지 않은 선택이다. 거기에 기운도 안정적이지 않은 상태.

델로즈에게 안겨 있어서 지금은 델로즈보다 반테온의 시야가 높았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그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보인다. 힘을 많이 써서라기보다 제어 때문에 애먹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 끝에 있던 가로수가 또 한 그루 무너진다. 200년은 족히 수도를 지킨 거목 중 하나였다. 이러다 마물보다 델로즈로 인한 피해가 더 클 지경이었다.

“날 안전한 곳에 내려놓고 다녀와. 너 아직 원거리는 힘들잖아.”

“또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방공호도 이미 닫혔는데, 어디가 안전하단 말이지.”

완벽하게 닫힌 방공호라도 반테온이 요청하면 열릴 테지만, 굳이 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사실을 전해야 할 때였다.

“방금 로한을 만났어.”

“누구?”

“그때 첫 번째 마물 습격이 있을 때 만난 남자.”

“뭐?”

움직이던 델로즈의 손가락이 멈췄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반테온과 눈을 맞춘다. 오랜만에 보는 눈동자가 불길을 타고 황금빛으로 흔들렸다.

“이번 마물도 그 녀석 짓이야.”

“그놈 대체 정체가 뭐지?”

“그건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불타고 있는 도시를 보며 말했다.

“이번 전투에서 네 힘이 역효과 날 거라고 하더라. 더 큰 문제를 만들 수도 있다고.”

“제길.”

듣기 싫은 녀석의 말이지만 로한의 충고는 정확했다. 높은 곳을 조심하라는 말을 듣고 고층 건물이 없는 곳으로 대비한 덕에 안전할 수 있었다. 만약 광장 중앙에 있었다면 무너지는 호텔 잔해에 위험했을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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