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믿을만한 정보겠지?”
“지금까지 이야기한 걸 들어보면 그럴 거야.”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속이 뒤틀어지지만, 그 녀석의 충고를 무시할 수 없었다. 델로즈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방공호로 간다. 문을 부숴서라도 널 거기 두고 와야겠어.”
문이 부서지면 더는 대피소가 아니지 않을까. 그런 말을 하기엔 델로즈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딱딱하게 굳은 그의 눈썹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델로즈. 내가 방공호를 가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야. 네 힘 때문에 역효과가 날 것이란 점은 그대로잖아.”
“적어도 넌 무사하겠지.”
그거면 충분하다는 어투였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이제 새삼스러울 일도 아닌데, 아직도 델로즈의 변화에 혼란스러웠다.
그때, 마을에 마물을 쳐들어왔을 때도 반테온의 안전을 우선한다는 말을 했었다. 하지만 느낌이 다르다. 전엔 자신의 유일한 가이드가 없으면 위험하기에 보호한다는 느낌이라면, 지금은 반테온을 보호하고 싶다는 말로 들렸다.
반테온은 달이 보이지 않는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별도 달도 연기에 가려 보이지 않는 와중에, 반테온은 눈 하나 따갑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미세한 기운이 공중에 있는 두 사람을 감싸고 있었다. 공기막처럼 천천히 순환하며 연기를 완벽하게 차단한다. 모두가 마물과 싸우느라 정신없는 와중에 이런 짓을 할 사람이 따로 있을 리 없다.
식은땀을 흘려 가며 아직 익숙하지 않은 컨트롤로 도시를 부수면서도, 이 공기막은 눈치채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하다.
큰일이네.
이런 모습이 기특해 보이면 조금 곤란했다.
“델로즈.”
“무슨 말을 해도 방공호에 넣을 테니까. 소용없다.”
꺼낼 말을 예상했다는 듯 쉴 새 없이 대꾸한다. 하지만 델로즈의 추측은 반테온이 하려던 말과 전혀 달랐다. 방공호는 들어갈 생각이다. 물론 델로즈의 말대로 문을 부수는 게 아니라, 정중히 요청해서 들어갈 것이다.
그러기 전에 로한의 뜻대로 되는 건 막아야지.
“델로즈. 입 벌려.”
“뭐?”
그가 고개를 들어 올리자 반테온이 양 뺨을 손으로 잡았다. 얼굴을 단단히 고정하고 단정한 콧대를 내려다본다. 정말 하나부터 끝까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잘 기억해둬. 이런 걸 비상 상황이라고 말하는 거야.”
그대로 고개를 숙여 델로즈의 입술을 삼켰다. 당황함에 그가 고개를 떨자, 뺨을 더 단단히 잡고 깊게 혀를 넣었다. 단정한 치열을 지나 주인처럼 단단한 혓바닥을 스쳤다.
숨도 쉬지 못한 채 경직된 모습에 속에서 웃음이 터진다. 상대가 키스하는데 가만히 받고만 있다니, 적어도 눈은 감아줘야지. 매너 없는 건 이럴 때도 마찬가지다.
반테온은 익숙하게 고개를 틀었다. 아무리 접촉 상태라고 해도 이렇게 긴장해서야 효율이 낮다. 어리숙한 상대를 대할 때의 습관처럼 딱딱한 상대를 녹이기 위해 입천장을 쓸고 잇몸을 훑는다.
“……!”
숨이 넘어갈 듯 놀라는 모습 너머로 붉은 기운이 빠르게 안정되었다.
천천히, 그러면서 격렬하게.
거대한 파도가 일정하게 몰아치는 것처럼 규칙적인 흐름을 보며 고개를 들었다. 젖은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지고, 눈 아래 불길을 받아 더욱 붉어진 델로즈의 얼굴이 보인다. 똑같은 얼굴이지만 뻔뻔하게 있을 때보다는 지금이 마음에 든다.
“진정됐어?”
“넌, 이걸… 이렇게 하고 진정될 거라 생각…….”
말을 흐린 델로즈는 거칠게 자신의 머리를 쓸었다. 엉망으로 내려온 앞머리가 눈매를 가려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미치겠네.”
낮게 으르렁거리던 델로즈는 그대로 몸을 틀어 방공호를 향했다. 주변에 맴도는 기운이 한결 편안했다. 정작 델로즈는 그 기운과 반대로 심란한 표정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잠시 후, 단말기에 표시된 방공호 주변 흙길에 도착했다. 바닥에 내려와 오랜만에 푹신한 땅을 밟자 이제야 고개 숙인 델로즈의 얼굴이 보였다.
무표정한 것 같으면서도 꽉 다문 입매 너머로 하고 싶은 말을 잔뜩 삼킨 기색이다.
“곧 다른 사람들이 마중 나올 테니, 어서 돌아가 봐.”
방공호에 가까워지자 단말기가 제 기능을 하기 시작했다. 확인하자마자 방공호에 신호를 보냈으니 곧 반테온을 데리러 올 것이다. 작별하고 보내려는데 델로즈의 굳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뭐 해?”
“너는 아무렇지도…… 아니 그렇겠지.”
혼자만 바보 같군. 작게 중얼거린 델로즈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뭐, 갑작스러웠으니 이해는 한다. 반테온도 자신이 그런 행동을 할 줄은 몰랐다.
순간적으로 로한의 뜻대로 만들기 싫다는 생각에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매번 델로즈에게 동의를 구하라고 말해 놓고 정작 반테온이 어겼으니, 이번 일은 명백히 실수였다.
“놀랐으면 미안한데. 빨리 진정시키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어.”
“아니.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단호하게 말한 델로즈는 다른 곳을 바라보는 시선을 그대로 둔 채 목을 긁었다. 먼 곳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좋았으니까.”
“뭐?”
“어서 돌아가 봐. 저기 사람들이 오고 있다.”
델로즈가 가리키는 곳엔 아직 아무것도 없었다. 반테온이 그 방향을 바라보고 기다리자 조금씩 주변이 밝아지고, 전등을 든 사람들이 다가왔다.
“저기 있다!”
“무사하셨습니까! 어서 안으로 피하십시오.”
두 사람을 발견 한 사람들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센터 지하에 비공개적으로 존재하는 방공호로 안내하기 위한 사람들이었다. 달려오는 사람들의 얼굴엔 긴장과 그림자가 가득하다. 델로즈와 있는 동안 잠시 잊었던 심각성이 떠올랐다. 밖은 아직 한창 전투 중이었다.
“이제 가 봐. 오늘은 고마웠어.”
“그래.”
오늘은 확실하게 델로즈에게 목숨을 빚졌다. 아마 그가 오지 않았다면 죽지 않았어도 무사히 넘어가기 힘들었겠지. 그의 말대로 반테온 한 명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 사람이 죽거나 다쳤을 것이다.
반테온의 말이 끝나자 델로즈는 바로 뒤로 돌았다. 전투하러 가는 델로즈의 등을 보자 무언가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다. 델로즈라면 어떤 일이 있어도 피해를 보진 않겠지. 그렇다고 편안한 밤은 아닐 것이다.
“델로즈.”
머리가 움직이기 전에 입이 먼저 열렸다. 무심하게 뒤를 돌아보는 그의 얼굴을 향해 말했다.
“조심해.”
“……그래.”
그 말을 끝으로 다시 하늘로 도약하는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일반인과 시력이 다를 바 없는 반테온의 눈에도 훤히 보일 정도로 붉어진 귀를 봐버렸다.
진짜 그렇게 좋은가.
겨우 안부 인사였다. 키스를 했을 때도 살짝 붉어진 얼굴색이 인사 한 번에 타는 듯 익었다. 반테온은 그 난리에도 흐트러지지 않은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헤집었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다친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뇨. 괜찮습니다. 어서 돌아가죠.”
반테온은 평소처럼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의 안내에 따라 발을 옮겼다. 정말로 곤란했다.
반테온은 헤집은 머리를 쓱쓱 쓸어내렸다.
상황이 극적이어서 눈에 잘못된 것이 씐 걸까? 아니면 야센에서 마신 차에 이상한 것이 들어가 있던 걸까?
그렇지 않으면 저 무례한 상대가 절대 귀엽게 보일 리 없을 텐데.
***
[수도 복구율 38%. 남쪽 피해가 심각하니 접근 주의 바랍니다. 전투계열 에스퍼들은 복구팀과 지원팀으로 나뉩니다. 각 부대장의 지시를 따라 주십시오.]
길었던 밤이 지났다. 축제 준비로 화려하던 수도는 온통 검붉은 마물의 피로 뒤덮였고, 거리에 걸어놓은 현수막은 재가 되어 하늘로 날아올랐다.
“하필 축제 준비 중이라 피해가 크겠네.”
“미리 들어온 사람들도 많았다던데. 쯧쯧.”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며 어젯밤 일어난 참사에 관해 이야기한다. 숙소가 부족한 사람들은 외부에 천막을 치고 임시 거주지를 만들었다. 평민들은 수도의 축제를 한 번 보는 것을 소원으로 여겼다. 이번 축제를 공들여 화려하게 치를 것이란 왕국의 선언에 평소보다 더 모인 것이 불행이었다.
마물 사태는 생각보다 빠르게 정리되었다. 새벽 6시경 방공호 문이 열리고 대피했던 사람들은 센터로 돌아왔다.
방공호는 최소한의 전력으로 유지되었다.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는 대피를 대비한 처치였다. 공기 순환 장치와 온도 유지만 가능한 공간은 편하다고 표현하기 어려웠다. 거기에 밖 상황을 모르는 불안감에 대부분 밤을 지새웠기에 밀린 잠을 청했다.
“반테온 님. 안녕하세요.”
“소델 선생님도 가이딩 하러 가십니까?”
“네, 호출이 들어와서요. 다들 바쁠 시간이잖아요.”
부대에서 돌아온 에스퍼들이 치료받고, 가장 먼저 찾는 존재가 가이드였다. 밤새 고생한 에스퍼들이 돌아오면, 가이드가 바빠진다.
“그래도 빠르게 정리되어서 다행이에요. 중간에 불려가면 어쩌나 걱정했거든요.”
만약 사태가 장기화되었다면. 가이딩이 급한 에스퍼를 위해 담당 가이드들은 보호 장치를 하고 현장에 불려 나갔을 것이다.
다행히 큰 사고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은 없었다. 마물의 등급이 높고, 개체 수가 많고 복잡한 수도에서 벌어졌어도 경고 등급이 올라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인력이 부족한 부분을 델로즈가 모두 감당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