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에스퍼들은 부대 단위로 각 구역을 맡아서 처리했다. 수도는 거대한 도시였고, 10구역으로 나눴다고 해도 한 구역의 크기가 작지 않았다. 구역당 수백 명의 에스퍼가 배치된다.
그 10구역 중 5구역. 수도의 절반을 델로즈 홀로 처리했다.
다행히 운도 따라줬다. 밤새 불타던 수도는 마침 내린 비로 빠르게 불길이 꺼졌다. 이 비가 아니었다면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을 것이다.
새벽에 폭포처럼 쏟아진 소나기 덕에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청아한 푸른빛이다. 텁텁한 매연 내음은 남았어도, 하얀 구름은 그 전처럼 유유히 흘러간다. 변함없는 하늘처럼 수도의 전경도 빠르게 복구되어야 할 텐데.
“반테온 님 호출은 아직인가요?”
“아직 들어온 건 없네요. 서재에서 대기할 예정입니다.”
“이번에 델로즈 님이 큰 역할을 하셨죠. SS급이라는 말만 들었을 땐 몰랐는데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아직 델로즈가 센터로 돌아오지 않았는지 반테온의 단말기는 조용했다. 분명 밤새 무리하게 움직였으니 상태가 좋지 않을 텐데, 외부에 남은 마물을 정리하고 수도를 복구하는 작업에 자원했다고 들었다.
“어제 투입된 에스퍼들이 다 극찬을 하더라고요.”
모든 사람이 그의 활약에 환호하고 기뻐하는 사이 반테온만 조용히 고민에 잠겼다. 잠시 스쳐 가는 현상이라 생각하고 넘겼으나, 확실히 반테온과 델로즈의 가이딩 효율은 떨어지고 있었다. 델로즈의 기운이 불안정한 주기도 짧아졌다.
처음엔 폭주하는 걸 닿지도 않고 치료했는데, 지금은 겨우 2주 안 봤다고 점막 접촉을 해야 할 정도라. 이대로 가다간 곤란해지는 건 반테온이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매칭률이 떨어진 건 연구소에 한 달간 격리된 후였다. 델로즈가 받았던 치료 중에 원인이 있을까.
‘거기도 한 번 알아봐야겠군.’
로한부터 연구실, 마담 레쏘까지. 신경 써야 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작게 한숨을 쉬며 소델 선생님과 인사를 나누고, 가던 길을 마저 걸었다.
서재에 도착해서 문을 연 반테온의 동작이 멈췄다.
잠금쇠를 걸고 외출한 창문은 활짝 펼쳐져 있었다. 그 옆으로 얇은 커튼이 바람에 흔들린다. 누군가 침입한 사실을 숨기지도 않는 흔적에 시선을 돌리자 소파에 조용히 앉아있는 그림자가 보였다.
짙은 적갈색 머리. 단단한 실루엣을 확인하고 반테온은 미간을 찌푸렸다. 소파에는 테아로트가 정자세로 앉아있었다. 평소 몸을 길게 기대거나 누운 자세가 아닌, 허리를 굽힌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뭐야?”
심상치 않은 기세에 다가가서 어깨를 툭툭 쳐도 테아로트는 별다른 미동 하나 없었다.
얼마 전엔 마음을 정리한다고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하더니 이번엔 또 무슨 문제가 있어서 무게를 잡는지 모르겠다. 걱정해주려고 해도 이유를 알아야 챙겨주지, 말도 하지 않으면서 변덕스럽게 구니 귀찮을 따름이다.
반응 없는 테아로트를 스쳐 지나가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눈높이가 맞으니 숙인 고개 아래로 침울한 눈동자가 스몄다.
“또 뭐가 문제야? 마음 정리 끝났다면서.”
“왜 델로즈와 키스했어?”
다짜고짜 물어오는 테아로트의 목소리는 낮게 잠겨 있었다. 피로가 덕지덕지 붙어 수습되지도 않은 성대로 긁듯 내뱉었다. 테아로트도 어젯밤 마물을 처리하기 위해 출동했다. 겨우 씻고 옷만 갈아입은 듯 초췌한 안색과 급한 기운만 정리한 듯 불안정하게 일렁이는 붉은 기운에 눈살을 찌푸렸다.
마물을 잡았다고 끝이 아니다. 지금부터 수도를 복구하고 사람들을 구조하기 위해서 또 출동해야 할 텐데. 쉬어야 할 귀한 시간에 쓸데없는 이야기로 무게 잡고 있었다. 하긴 이해가 가긴 한다. 그런 광경을 봤으니 쉽게 잠들지 못했겠지. 형제 같은 친구의 키스 장면이라니.
“그걸 봤어?”
“운 나쁘게 그 주변에서 정리하고 있었거든.”
하긴 하늘에서 그런 행동을 했으니 누군가 보아도 이상하지 않다. 저지를 땐 연기에 휩싸여 주변을 생각하지 못했다. 에스퍼 전체가 나와서 활동하는 곳에서 경솔한 짓이었다.
“다른 사람도 봤어?”
“외곽이라 없을 거야. 있었으면 벌써 소문이 났겠지.”
“그건 다행이네.”
시끄러워질 일은 없겠군. 안도의 숨을 쉬며 등받이에 기댔다. 맞은편에 앉은 테아로트의 분위기는 여전히 침울하기 그지없었다. 팔꿈치를 무릎에 올린 채 숙인 몸이 굳건했다.
“그래서 지금 못 볼 꼴 봤다고 따지러 온 거야?”
“너 델로즈 같은 녀석 취향 아니잖아.”
“취향이라서 한 줄 알아?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으니 한 거지.”
“대체 뭐가 그리 급했길래? 그놈이 폭주라도 할 것 같다고 협박했어?”
왜 이야기가 그렇게 튀는 것일까. 반테온은 미간을 찌푸리며 부정했다.
“그건 아냐.”
“그럼 왜 그랬어? 너 그놈이랑 닿기도 싫어했잖아.”
“후…….”
피곤한 몸은 사소한 일에도 쉽게 지쳤다. 지금 테아로트에게 상황을 설명하려면, 델로즈와 매칭률이 떨어진 것과 로한을 만난 것, 그리고 그에게 경고를 들었기에 델로즈를 진정시켜야 했던 것 등등 이야기할 사건이 많았다.
뻑뻑한 눈두덩이를 눌렀다. 테아로트가 아니라도 신경 쓸 일이 산처럼 쌓여 있다. 하나하나 처리하기도 번거로운데 평소 멀쩡하던 테아로트까지 신경을 긁는다.
“넌 갑자기 왜 이러는데. 가이드가 에스퍼 진정시킨다고 키스한 게 그리 화낼 일이야?”
“네가 언제부터 가이드의 의무에 그렇게 충실했다고 그 망할 놈과…… 아니, 당장 가이드 보호 위원회에 연락할게. 역시 네가 자발적으로 할 리가 없잖아.”
“진정해.”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뛰쳐나가려는 그를 만류했다.
“그런 거 아니야. 내가 먼저 했어.”
우울하게 가라앉았던 눈동자가 커졌다. 믿기지 않는 사실을 부정하며 잘게 흔들리던 눈이 일그러진다. 이내 푹 떨어진 고개 너머로 한탄처럼 작은 말소리가 들렸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구나.”
“그래.”
전투에 집중하는 델로즈의 멱살을 잡고 키스했다. 입술이 떨어지는 마지막까지 주도권을 쥔 건 반테온이었다. 테아로트 정도의 실력이면 연기 속에서도 그 모습을 정확히 파악했을 것이다.
그의 반응을 봐도 확실했다. 알면서도 믿기 힘든 사실이기에 재차 확인하려 했겠지.
“이번 사태가 컸으니까. 그게 가장 빠른 방법이었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 망할 놈이랑…… 도무지 이해가 안 돼.”
“이해가 안 되는 건 나야. 테아로트.”
반테온은 테아로트와 눈높이를 맞춰 몸을 숙였다. 처음엔 놀라서 그러리라 생각했다. 뒤에는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그러나 지켜본 테아로트의 감정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왜 그렇게 화내는 거지?”
화가 치밀수록 바닥을 바라보며 감정을 삭이는 건 테아로트의 버릇이다. 가지고 싶은 물건을 놓치거나,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해야 했을 때. 어릴 적부터 가지고 있던 습관이다.
성인이 된 이후 본 적이 없으나 그 기억은 뚜렷하다. 지금처럼 남에게 숨기려고 눈을 피하며 혼자 속으로 짓눌렀다.
“……화 안 났어.”
“속일 사람을 속여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두 사람은 서로를 속이기 힘들다. 부모보다 더 오랜 시간을 보내왔다. 이유는 몰라도 화가 났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반테온의 말에 고개를 슬며시 든 테아로트가 짧게 헛웃음 쳤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너도 속일 사람을 속여야지. 반테온.”
무기질처럼 매끈거리는 눈빛으로 반테온을 응시한다. 화를 누르다 못해 터진 형국이다.
“너 델로즈가 싫지 않은 거지?”
반테온이 테아로트를 아는 것만큼, 테아로트도 반테온을 알고 있었다. 반테온에게 마음이 없다면, 델로즈가 폭주 직전에 몰리더라도 먼저 키스할 리 없다.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테아로트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처음보다는 괜찮아.”
“겨우 그 정도가 아닐 텐데. 제법 마음에 드는 거 아냐? 먼저 키스하고 싶을 정도로?”
“테아로트. 선 넘지 마.”
도가 지나친 추측을 단호하게 제지했다. 친구라 해도 서로의 관계에 간섭할 권리는 없다. 이건 명확히 테아로트의 잘못이다. 오랜 시간 두 사람의 사이가 지속될 수 있었던 것도 그 부분을 서로 존중했기 때문이다.
“만약에 내가 델로즈를 마음에 들어 한다고 해도 네게 그런 추궁을 당할 이유는 없어.”
“이유…… 그렇지. 그렇겠지. 하… 하하하”
실소처럼 퍼진 웃음소리가 점차 커졌다. 바람 섞인 헛웃음을 천천히 내뱉더니 테아로트는 숙였던 허리를 완전히 폈다.
완전히 가슴을 편 테아로트의 상체가 오늘따라 유달리 커 보인다.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반테온을 바라보던 그가 몸을 일으켜 반테온의 손을 잡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커다란 손이 닿더니 반테온의 질 좋은 장갑을 그대로 벗겨냈다.
“테아로트!”
맨살에 닿는 느낌에 강하게 소리치자, 테아로트는 잡은 손을 더 강하게 쥐었다.
에스퍼와 가이드가 닿으면 의지와 상관없이 어느 정도의 가이딩이 이뤄진다. 자각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양쪽의 기운이 얽매이게 된다. 손을 타고 올라오는 붉은 기운이 소름 끼치게 낯설면서도 익숙하다. 오랜 시간 봐왔으나 절대 느낄 리 없다고 생각한 감각이다.
“……이런 느낌이구나.”
“정신이 어떻게 됐어? 이거 당장 놔.”
“네게 목매는 에스퍼들의 심정을 알 것 같네.”
“이거 놓지 않으면….”
“신고라도 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