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에스퍼를 피하는 방법 (72)화 (72/112)

#72

현장에 파견된 에스퍼를 위해 함께 현장을 뛰는 가이드들도 많았다. 반테온은 델로즈가 가이딩을 원치 않는다는 이유로 일주일간 아늑한 센터에서 좋은 침실, 좋은 음식을 누리며 지냈다.

“이번 복구의 가장 큰 후원자가 에슬란테라더군. 예전 마을 복구에도 가장 큰 기부를 했다고 들었다.”

“가문이 크니 액수가 많을 뿐이지. 특별한 건 아니잖아.”

“그렇지 않아. 가문 외에 네 이름으로도 기부를 했지?”

반테온은 사건이 터지기 직전 로한을 만났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로한을 알아볼 수 있었고, 그의 최종적인 목적에는 반테온도 포함되어 있다. 과장된 추측이지만, 반테온을 노리기 위해 그런 짓을 했을지도 몰랐다.

만약 그런 사실을 알아도 그 누구도 반테온을 탓하지 않겠지. 반테온의 잘못은 아니니까. 하지만 찌꺼기처럼 남은 죄책감은 아무 행동 없이 합리화하기 어려웠다.

별도의 기부는 그런 찝찝함을 씻어내기 위한 행위였다. 거창한 선의를 가지고 움직인 건 아니다. 그저 사실일지도 모르는 죄책감을 숨기는 작은 비용이었다.

그 행동을 다르게 해석한 델로즈의 말에 괜히 머뭇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뭐, 그건 얼마 안 되니까.”

“그것도 하지 않는 자들이 많으니까.”

델로즈가 굳이 남아 복구에 참여한 이유를 알았다. 어울리지 않는 행동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반테온이 이번 사건을 신경 쓰는 것 같으니 복구까지 자발적으로 돕고 온 것이다. 오해에서 비롯된 행동이지만 드물게 기특한 짓이다.

반테온은 자신의 취향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이상형은 더할 나위 없이 확고했다. 작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손가락 한 번 닿아도 얼굴을 붉힐 쉽고 순진한 상대. 사람을 수치화한다면 델로즈와 반대편 그래프에 서 있을 것 같은 사람.

이쯤 되면 델로즈가 원망스러울 지경이다.

조금만 더 작았어도. 아니 반테온과 비슷한 수준만 되었어도 그럭저럭 정을 붙이고 살 수 있을 텐데. 물론 성격과 질 낮은 어투 탓에 파트너로 삼진 못하겠지만 지금보다는 즐거운 생활을 영위했을 것이다.

“괜찮아도 가이딩은 미루지 말고 시간 맞춰서 받아. 요즘 효율 불안정한 거 알잖아.”

“그러지.”

“지금도 가이딩 하고 가.”

“네 상태가 괜찮아지면.”

누가 에스퍼의 가이딩을 가이드 상태를 보고 결정한단 말인가. 대충 흘러가듯 답하는 태도에 반테온은 빤히 델로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목숨줄이 걸린 일인데 타인인 반테온보다 관심 없는 태도였다.

불편하게 눈에 보이는 기운이 빤한데, 고집스럽게 가이딩을 거부했다.

반테온은 머리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면이 부족한 상태에서 계속 대화를 나누니 배로 피곤해진다. 잠을 설친 탓에 시간을 맞추기 위해 식사도 걸렀다. 빈속에 커피를 마셨더니 속까지 쓰린 기분이다.

“오늘 가이딩 진짜로 안 받을 거야?”

“아픈 사람에게 받을 만큼 급하지 않아.”

“그렇게 피곤하진 않은데.”

“거울이나 봐.”

그렇게 심각한가? 창문에 비친 모습을 흘낏 바라봤다. 단정하게 주름 한 줄 없는 복장과 잘 다듬어진 머리. 평소와 크게 다를 것 없었다. 그보다 델로즈의 주변에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붉은 기운이 더 거슬렸다.

“어차피 완벽하게 가이딩 할 생각 없어. 대충이라도 받고 가.”

“정말 괜찮다.”

델로즈의 주변을 훑어보다 혀를 찼다. 계속 거절당하면 반테온이 억지로 가이딩 하는 것도 이상하다. 눈에 그 불안정한 기운이 보인다고 말할 수도 없으니까.

‘알아서 하겠지.’

기운이 불안정할 때의 괴로움은 누구보다 당사자가 절실하게 느낄 테니, 정말 힘들면 이야기하겠지. 벗은 장갑을 다시 손에 꼈다.

“그럼 눈이라도 붙이고 있을게.”

당장 방으로 돌아가 쉬고 싶어도 관리부에 기록되는 시간이 있다. 가이딩을 너무 빨리 끝내도, 너무 오래 걸려도 문제가 되기에 정해진 시간을 맞춰야 한다.

반테온은 자리에 앉은 채 슬며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니 어지러웠던 시야가 고요해졌다. 불편한 좌석에 다른 사람 앞이니 잠들긴 어려워도 가만히 앉아있는 것보단 편하겠지.

목 받침도 없는 의자에 기대어 고개를 슬며시 숙였다.

까만 시야가 아른거리더니 흔들림이 느껴진다. 조심히 반테온의 장갑 낀 손 위로 따뜻한 덩어리가 닿았다. 조심스럽게 다가와 손가락 하나하나 건드려 보더니 이내 손바닥 아래를 받쳐 들었다. 장갑 아래 붕대가 남아 있는지 살피는 손길이다. 그 작은 상처가 아직 남아있을 리가 없는데.

델로즈는 힘없이 늘어진 손을 잡아 슬쩍 끌더니 흔들리는 어깨와 고개를 고정했다. 반테온의 팔을 어깨에 단단히 두른 몸이 가까이 붙더니 그대로 무릎과 등을 받쳐 몸을 띄웠다.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몸을 안아 올렸다.

“음…….”

반쯤 수면 아래로 내려간 몸이 움찔거린다. 허공에 뜬 두 발이 어색해 움직이려는 찰나, 등 뒤에 푹신한 감각이 느껴졌다. 천천히 몸을 곱게 펴서 눕히는 자세에 편안해진 마음으로 다시 수면에 잠길…….

“뭐야?”

“깬 건가?”

눈을 떠도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델로즈의 등판이 조명을 완전히 가로막고 있어 주변이 그늘진 까닭이다. 희미한 초점이 점차 돌아오고 반쯤 가라앉은 정신이 빠르게 돌아왔다.

“내가 잤어?”

“고개를 열심히 끄덕거리길래.”

“아…….”

이런 불편한 곳에서 깊게 잠들 거란 생각은 한 적 없는데. 생각보다 많이 피곤한 상태였나 보다.

손바닥에 닿은 질감을 쓰다듬자 지금 누운 곳이 어딘지 떠올랐다. 가이딩실에 어울리지 않는 푹신한 감촉. 몸을 부드럽게 받쳐주는 매트리스의 탄성이 손바닥 아래로 단단하게 느껴진다.

지금 반테온이 몸을 눕힌 곳은 가이드실 옆방에 준비된 침대였다. 그 사실을 깨닫자 몸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왜 그러지. 더 쉬어.”

“아니…… 여기는 좀 그래.”

침대에서 벗어나려고 서둘러 움직이는 반테온이 이해되지 않는지. 델로즈의 미간 주름이 깊어졌다. 그가 일어서자 델로즈가 어깨를 슬며시 눌렀다.

“불편하면 불도 꺼줄 테니 남은 시간 동안 누워 있어. 또 의자에서 잘 생각하지 말고.”

“잠깐만. 이 침실이 어…….”

반테온은 설명하려다가 멈췄다. 가이드실 옆방에 있는 침대의 용도가 무엇이겠는가. 그 뻔한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여기서 편히 잠을 청할 순 없었다.

다시 반테온의 상체를 눕히려는 델로즈의 팔을 붙잡았다.

“여기 침대는 쉬라고 있는 거 아냐.”

“너는 쉬는 용 침대가 따로 있나?”

“그런 게 아니라…….”

알 거 다 아는 놈이 왜 이런 데서 답답하게 굴까. 시급한 가이딩이 필요할 때 간단한 접촉과 패딩 정도를 위해 준비된 방이었다. 가이딩실보다 조명이 어둡고, 어울리지 않게 푹신한 침대는 완벽하게 그런 용도를 위한 마련된 거다. 누가 뒹굴었을지 모를 침대.

이런 곳에 반테온이 누워서. 그것도 델로즈가 위에서 내려다보는 자세로 있는 현실이 불편했다.

흐린 조명 아래로 그늘진 델로즈의 콧대가 부딪힐 듯 가까이 있었다. 이유를 알기 전엔 물러나지 않을 단단한 태도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

“……가이딩실에 침대를 왜 가져다 놨다고 생각해?”

“뭐?”

살짝 허리를 들고 주변을 바라보던 델로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살짝 벌어지던 입술이 단단히 닫히고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더니 어두운 시야에도 당혹함으로 물드는 얼굴이 보였다.

그래 바보가 아니면 알아야지.

델로즈는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반테온에게서 순식간에 멀어지더니 고개를 돌렸다.

“……먼저 나간다.”

겨우 해방된 반테온은 자리에서 일어나 구겨진 복장을 추슬렀다. 안경까지 바르게 쓰고 방 밖으로 나왔다. 그사이 가이딩실 중앙에서 뒤돌아있는 델로즈의 등판이 보인다. 반테온의 기척이 느껴짐에도 미동 하나 없다.

그 모습이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너무 마음대로 해석하는 걸까.

“몰랐으니 됐어.”

“너희…… 아니, 귀족이란 놈들이 이런 곳에서도 하나 보군. 이런 곳에서…….”

“죽는 것보단 낫잖아.”

아무리 귀족이라 하여도 몸이 터질 것 같은 괴로운 상황에서 체면 차리며 점잖게 굴지 않았다. 폭주 직전의 급한 상황에선 숙소까지 올 여유가 없었다. 치료실에서 바로 가이딩실로 이동되는 절차가 일반적이고, 그럴 때를 대비하여 준비된 공간이었다. 물론 응급 상황이 아니더라도 매칭 파트너끼리 종종 즐기는 사실을 알지만 입을 다물었다.

매칭 파트너 간의 관계에 익숙한 반테온은 오히려 델로즈의 반응이 낯설다.

반테온을 포함하여 귀족으로 자란 사람이라면 가이딩을 위한 접촉에 수줍어하지 않았다. 매칭 파트너 간의 접촉은 힘을 쓰는 대가였으며, 가이딩을 위한 행위를 죄로 여기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익숙하게 교육받았다.

“귀족들은 죽을 때도 점잖은 척할 줄 알았다.”

“대체 귀족을 어떻게 생각한 거야?”

“너.”

“…….”

칭찬인지 욕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말이다. 적어도 반테온이 이런 곳에서 에스퍼와 접촉하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듯하니, 욕은 아니겠지.

찌푸린 채 바라봐도 아직 뒤돌아 서 있는 델로즈의 표정을 알 수 없다. 그 어깨 너머로 보이는 시계 숫자는 종료 시각에 가까웠다. 생각보다 의자에서 존 시간이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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