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시간이 다 됐네.”
“어서 들어가서 쉬어.”
마지막 인사까지 등을 보인 채 대답한다. 아무리 민망해도 사람 얼굴은 제대로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예의라는 걸 모르는 것일까. 그 와중에도 델로즈 주변을 감싸는 붉은 기운이 요란하다. 반테온 곁에 오래 있어서일까. 들어올 때보다 얌전해도,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다.
정말 이대로 가면 안 될 것 같은데.
“진짜로 괜찮은 거 맞지?”
“…….”
재차 물어도 대답이 없다. 정상이 아니라는 건 당사자가 제일 잘 알 것이다. 어디까지 떠먹여 줘야 하는 걸까. 반테온은 한숨을 쉬며 장갑을 다시 벗었다.
“고집 피우지 말고 잡아. 좀 쉬었더니 괜찮아졌어.”
“됐으니까 저리 가.”
내민 손이 무색하게 델로즈는 꼼짝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가까이 갈수록 가이드를 본능적으로 반기며 꿈틀거리는 기운이 빤히 보이는데. 왜 저리 고집부리는 걸까.
델로즈의 어깨를 잡아 몸을 앞으로 돌리려고 팔을 펼쳤다. 하얀 손이 강건한 어깨에 닿기 직전 순식간에 뻗어온 델로즈의 손아귀가 손목을 잡아챘다. 평소보다 강한 힘에 소매가 주름졌다.
“아…….”
“아, 미안하다. 아픈가?”
고집스럽게 등을 돌리고 있던 델로즈가 순식간에 몸을 돌려 반테온의 손목을 살폈다. 혹시 자국이 남았을까 유심히 들여다보는 그의 표정을 그제야 볼 수 있었다. 걱정스레 찌푸려진 눈썹과 꽉 다문 입술. 그늘진 목울대와…….
고개 숙인 모습을 자세히 주시하자 그가 뒤로 돌아앉은 이유를 알았다.
단정하게 잘 채워진 바지 버클 아래로 보이는 두둑한 질감. 남자라면 모를 수 없는 현상이 시야에 들어와 버렸다.
곤란하다. 정말 곤란했다.
거절당했을 때 돌아섰어야 했는데, 괜한 오지랖을 부렸다. 반테온은 못 본 척 멀리 시선을 보낸다.
“가이딩…… 조금만 받고 가.”
애써 태연한 척, 모르는 척 평소처럼 발음했다. 이대로 어색하게 물러나면 델로즈의 상태를 눈치챘다고 알려주는 것밖에 되지 않으니까. 처음과 똑같이 행동해야 했다.
반테온은 자신의 손목을 살피는 델로즈의 손을 붙잡았다. 오른손 장갑을 벗어 델로즈의 소매 사이 살짝 나온 손목 안쪽에 손가락을 붙였다. 맨살이 스치는 느낌에 화들짝 놀라는 델로즈의 모습을 무시하고 그대로 가이딩 했다.
“너…!”
“고집 피우지 마. 참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 거 알잖아.”
그러게 처음부터 가이딩 받았으면 이런 험한 꼴도 안 봤을 것 아닌가. 자꾸 아래로 내려가는 시선을 올렸다. 쉽진 않았다.
적지 않은 사람의 것을 봤음에도 적응되지 않는 크기에 자연스럽게 눈동자가 움직였다. 분명 같은 사람일 텐데 느껴지는 존재감이 낯설다.
“…….”
“아까보다는 낫지?”
델로즈 주변에 요동치던 붉은 기운의 범위가 줄었다. 줄어든 기운 대신 더 심란하게 변하는 아래의 형태를 애써 모른척했다. 감정에 따라 움직이는 것까지 반테온이 제어할 순 없으니까.
묵묵히 입술을 꽉 물고 버티던 델로즈는 반테온의 손이 떨어지자마자 닿았던 손목을 반대 손으로 문질렀다. 입은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본의 아니게 추행한 것 같은 기분에 바로 뒤로 돌아섰다.
“그럼 먼저 나간다.”
“……그래.”
자연스러워 보이게 노력하며 뚜벅뚜벅 밖으로 걸어 나왔다. 문밖을 나오는 순간까지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규칙적인 발걸음으로 복도를 지나 코너를 돌았다. 델로즈가 느끼지 못할 거리까지 떨어지고 나서야 힘 빠진 몸을 벽에 기댔다.
‘진짜 곤란한데.’
방금 봤던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델로즈가 자신에게 호감을 품고 있다는 건 알았다. 스스로 잘 보이고 싶다. 잘 지내고 싶단 표현도 했고, 키스에 귓등을 붉히지 않았던가.
어느 정도 성적인 호감도 있을 수 있겠지. 그런 생각을 했음에도 직접 겪은 모습은 적지 않게 충격이다. 곤란하다는 말 외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차가운 벽에 뒤통수가 닿자 혼란하던 정신이 돌아온다.
머리에 도는 열기가 조금 가라앉자 조금 전 상황이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자신에게 반응하는 상대는 많았다. 오히려 본격적으로 접근하여 반응 없는 상대가 드물었다. 그 점을 이용하여 마음에 드는 사람들을 쉽게 손에 쥐어 다루기도 했다.
그중엔 반테온이 원하는 관계와 다른 방향으로 그를 원하는 자들도 많았다. 어릴 때부터 겪은 일에 가능한 자연스럽게, 뒤탈 없이 멀어지는 방법도 무수히 많이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지금 머릿속은 설탕 조각처럼 새하얗다. 가루처럼 흩날리며 정신을 어지럽혔다.
‘미쳤지.’
괜히 목이 타는 기분에 밖에선 절대 손대지 않았던 목 단추를 풀었다. 겨울바람처럼 차가운 공기가 가슴 속에 시원하게 파고들었다.
***
[선생님. 수도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혹시 다친 곳이 있을까 봐 제대로 잠도 들지 못했어요. 저는 내일 드디어 수도로 복귀해요. 센터로 돌아가면 바로 선생님 서재로 찾아갈게요. 그때까지 몸조심하세요. 보고 싶어요.]
단말기에 길게 적힌 쪽지가 도착했다. 반테온에게 이런 살가운 메시지를 보낼 사람은 많지 않다. 누군지 낯선 코드 위로 익숙한 얼굴이 스쳐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전에 케슬란에게 코드를 알려준 적이 있었지.
그사이 복잡한 일이 많아 잠시 잊고 있었다. 쪽지를 읽으며 손가락으로 화면을 톡톡 건드린다. 분명 코드를 알려줄 때는 케슬란에게 호감이 있었다.
하지만 케슬란과 데이트한 이후 그 생각은 조금씩 삐걱거렸다. 과연 지금까지 봤던 모습이 케슬란의 진짜 모습이 맞을까. 자신이 보는 모습과 완전히 다른 주변의 평가. 그리고 먼저 떠난다고 하였을 때 보이던 날이 선 태도까지.
찰나의 모습으로 그간의 시간을 재평가하기엔 단서가 작다. 과하게 예민하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런 힌트는 틀린 적이 드물다. 괜히 위험을 감수하고 만날 만큼 마음에 드는 상대도 아니었다.
이미 오래전 마음속으로 결론을 내린 반테온은 단말기를 들었다.
까맣게 변한 액정 너머로 무표정한 자신의 얼굴이 비친다. 곤란하면 그냥 끊어내면 그만이다. 괜히 이유를 이야기하고 작별을 고할 만큼 거창한 관계도 아니다. 서운하다 매달릴 수도 있고, 원망하며 돌아설 수도 있다.
그동안 지낸 시간이 있으니 적당한 보상을 쥐여주고 멀어지는 것도 방법이겠지. 시간이 지나면 지금껏 스쳐 지나갔던 무수한 사람 중 한 명이 될 것이다. 반테온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잠시 기울였던 관심을 거뒀다.
-달칵
반테온은 서랍을 열어 안에 있는 작은 상자를 쥐었다. 그가 가진 것 중에서도 특별히 귀한 것이라 비밀 서랍 안에 보관해뒀던 물건이다. 조만간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작은 상자를 열어 내용물을 셔츠 앞깃에 부착했다.
***
[선생님. 요즘 바쁘신가 봐요. 혹시라도 시간 될 때 연락 주실 수 있을까요? 기다릴게요.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하루에 두 번씩 꼬박꼬박 오는 쪽지를 닫았다. 케슬란이 파견되었던 교육팀은 센터에 도착하는 즉시 수도 복구에 파견되었다. 앞서 복구했던 팀이 내부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는 동안 대체된다. 수도에 있어도 당분간 마주칠 일은 없었다. 그사이 케슬란이 눈치 빠르게 자신의 생각을 알아차려도 그만이고, 혹시라도 찾아오면 그때 이야기하면 된다. 그냥 관심이 떨어졌으니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자고. 어려운 일은 아니다.
쪽지로 이야기하지 않은 건, 괜히 입소문 탈 증거를 남길까 봐서였다. 그러니 실제로 만나서 해결하는 것이 좋겠지.
“귀찮긴 하네.”
알림을 제때 확인 안 하면 문을 박차고 들어올 테아로트도 없으니 단말기 확인을 꾸준히 해야 했다. 매번 번거로운 메시지를 꾸준히 보는 것도 예상외로 신경 쓰인다.
고개를 내젓고 읽던 책을 들었다. 평소 거의 개인 서재에만 머물던 반테온은 드물게 중앙 도서관에 방문했다. 그의 서재에는 업무에 관한 내용과 교육용 서적밖에 없었다. 잡다한 서적을 찾기엔 이곳이 최적이다. 수업도 모두 중단되었기에 도서관을 찾는 학생도 적었다. 연구를 위해 잠시 들르는 연구원 정도. 덕분에 한가하게 넓은 공간을 누린다.
조용히 손끝으로 표지를 쓸고 지나가며 원하는 책을 찾았다. 관심 가진 적도 없던 민간 신앙, 구전 설화 등 가십거리를 적어놓은 코너였다. 평소엔 눈길 한 번 주지 않을 제목들이 스쳐 지나간다.
위인이 된 에스퍼의 충격적인 이야기. 컬러 테라피가 에스퍼에게 미치는 영향에 관하여. 원하는 가이드와 매칭률을 올라는 101가지 방법.
실수로도 읽기 싫은 제목에 고개를 저으며 넘겼다. 종이가 아까운 한심한 책에 시간을 투자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이런 허황된 책이 아니면 정신계 에스퍼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자료가 없으니까.
반테온이 예전에 알게 된 ‘왕을 암살하려던 마술사’의 이야기도 이런 류의 책에서 읽었다. 어릴 적엔 특별한 기운을 보는 자신의 능력이 궁금해서 온갖 서적을 뒤졌다. 그러다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하고 눈만 버린 채 좌절했었다. 이 나이를 먹고 똑같은 짓을 할 줄은 몰랐다.
그때완 다르게 괜찮은 정보를 건져야 할 텐데.
적당히 책 다섯 권을 빼 들었다. 사람은 적어도 소수의 학생들이 듬성듬성 거리를 두고 앉아 있었다. 눈에 띄지 않는 곳을 찾기 위해 둘러보자 복도 끝 커다란 창 앞에 빈 책상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