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비어있는 명당을 반가워하며 다가갔다. 책상이 가까워질수록 반테온의 속도가 느려진다. 연한 오동색 책상 위에 책을 내려놓고야 왜 이 자리가 비어있는지 알 것 같았다.
창가로 내리쬐는 햇살도 따스하고 은은한 커튼으로 적당히 그늘까지 져서 완벽한 그 자리엔 커다란 장애물이 떡하니 누워 있었다.
몇 미터 떨어져 있어도 환히 보인다. 책상 옆 벽에는 낮은 소파가 놓여져 있었다. 그 위에 어울리지 않게 누워있는 거대한 남자는 책을 얼굴 위에 얹고 편히 누워 있었다. 주변에 일렁이는 붉은 기운에 헛웃음이 터진다.
멀쩡한 숙소를 두고 왜 여기서 이러고 있단 말인가.
“귀찮게 하지 말고 꺼져.”
특유의 예민함으로 멀리 사람이 있다는 걸 느낀 걸까. 낮게 가라앉은 델로즈의 목소리는 심기가 불편한 듯 울린다. 그럴만하지. 어설프게 가이딩 하고 떠났으니 상태가 좋을 리 없다. 상대가 반테온인지도 모르고 있지 않은가.
몇 걸음 더 다가가 책상 끝에 들고 있던 책을 얹었다. 딱딱한 표지가 나무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퍼진다. 그 소리에 누워있던 델로즈의 고개가 슬며시 움직였다.
“꺼지란 말 못 들…… 음?”
델로즈는 얼굴을 가린 책을 가슴팍으로 내린다. 찌푸려진 표정으로 시선을 맞추더니 눈이 커진다.
“반테온?”
“마물이 숙소를 부수진 않았을 텐데.”
서둘러 몸을 일으킨 델로즈는 편하게 풀어진 셔츠와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다 깨서 급한 손길로 가슴팍까지 열어놓은 셔츠 단추를 잠그는 모습을 생소하게 바라봤다.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다. 그를 처음 봤을 땐 항상 저런 꼴이었다. 최근 단정한 모습을 봐서 잠시 잊고 있었다.
언제가부터 복장에 신경을 썼다. 아마 독방에 갇힌 델로즈에게 단정치 못하다 지적한 후부터였던 것 같다. 그 후엔 반테온 앞에는 항상 깔끔한 모습으로 찾아왔었지.
“편하게 있어. 쉬는 날까지 방해할 생각은 없으니까.”
“……고맙군.”
딱히 감사 인사를 들을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왜 여기 있는 거지?”
“제일 조용해.”
도서관은 센터 본관에서 조금 떨어진 별채에 위치했다. 건물 대부분이 도서관과 그걸 관리하는 사서들의 집무실이었다. 학기 중이 아니면 센터에서 가장 조용한 곳이다.
조용해서 이곳에 왔다는 델로즈의 말에 반테온의 눈썹이 어이없이 찌푸려진다. 편한 숙소를 두고 여기서 분위기 잡고 있다니. 보아하니 냉기 풀풀 날리며 가까이 오는 사람을 다 쫓아냈겠지. 도서관이 유독 조용한 이유가 있었다.
“가이딩 제대로 받으라니까.”
애매하게 가이딩 받고 있으니 주변 소리에 민감해지고 환청이 들리기에 조용한 곳을 찾는 거다. 에스퍼 숙소는 벽 사이에 특수한 파장의 방음재를 넣어 소음을 차단하고 있다. 그것도 다른 에스퍼에게나 통하는 이야기다. SS급인 델로즈에겐 통하지 않는다. 평소엔 스스로 조절하겠지만 지금은 무리였다.
방음재가 듣지 않는다면 새장처럼 다닥다닥 붙은 숙소는 곤욕일 테지.
“본 김에 가이딩이나 마저 하자.”
“책 읽으러 온 것 아닌가?”
또다시 가이딩에 관한 이야기를 피했다. 델로즈는 책상 위에 올려진 책을 훑어봤다. 먼 거리에서도 어려움 없이 작은 글씨를 읽었다. 찬찬히 살펴보던 얼굴이 기묘하게 변한다.
“……의외인데.”
“오해하지 마. 관심 있어서 가져온 건 아니니까.”
“뭐, 부끄러워할 필욘 없지. 별자리 에스퍼 유형, 희귀한 에스퍼 도감 사전…… 같은데 관심이 있는진 몰랐지만.”
“시끄러워.”
육성으로 들으니 더 한심한 제목이다. 자신의 손으로 뽑아 들고 온 것도 수치스러운데, 하필 가장 들키기 싫은 상대에게 보이다니.
반테온은 델로즈에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가이딩 안 할 거면 이야기 좀 하지. 로한에 관한 이야기야.”
할 이야기가 많았다. 지금까지 여유가 없어서 그날 로한을 만났던 이야기를 자세히 하지 못했다. 당일엔 마물 때문에 정신이 없었고, 그다음 가이딩을 할 땐…….
잠시 머릿속에 묻어놓은 그날의 일이 떠올라 멈칫했다. 당사자인 델로즈도 신경 쓰지 않는 일을 괜히 혼자 떠올렸나 싶어 서둘러 머리 한구석으로 밀었다.
“내 서재로 가자.”
로한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표정이 심각했던 델로즈는 반테온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복장을 마저 정리했다. 목 끝까지 단추를 채우고 구두를 꽉 조인 채 반테온의 뒤를 따랐다.
델로즈는 반테온의 경호원도 아니면서 꼭 뒤따르며 보호하는 사람처럼 한 걸음 뒤에서 걸었다. 오늘따라 유독 그 모습이 잘 훈련한 도베르만 같았다. 발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는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그림자가 아니면 뒤따르는지도 모를 정도다.
외진 복도 끝에 위치한 서재에 들어섰다.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창문을 닫고, 양쪽에 묶인 끈을 풀어 커튼을 친다. 혹시 몰라 음성 차단 마석까지 사용했다.
“그날 축제에서 봤던 로한의 얼굴을 기억해?”
“느끼하게 생긴 금발이었지. 재수 없는 붉은 눈.”
델로즈가 기억하는 모습은 반테온과 같았다. 반테온이 그를 기억하는 건 로한이 숨기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로한은 처음부터 반테온에게 호의를 가지고 접근했고, 자신을 기억해주길 원했으니까.
델로즈는 어떻게 로한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델로즈의 능력이 높기 때문일까. 아니면 로한이 숨기지 않은 것일까.
“그걸 제대로 기억하는 건 너와 나밖에 없어. 그 축제에 참석했던 사람 누구도 로한과 같은 인상착의를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했어.”
“뭐?”
“수도에서 만났을 때도 같았어. 바로 내 앞을 지나갔는데도 다른 사람은 그를 본 적 없다더군.”
“기분 나쁜 놈이군.”
동감이다. 목적도 정체도 알 수 없는 로한의 존재는 이제 의심을 넘어 불쾌할 정도였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아무에게도 한 적 없는 이야기야.”
센터에 보고한 적도 없고, 테아로트에게도 이야기한 적 없었다. 반테온은 짙어지는 델로즈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천천히 자신이 아는 이야기를 털어놨다.
이야기는 길지 않았다. 반테온은 로한에 관해 아는 것도 적었으며, 만난 횟수도 많지 않았다. 짧게 설명한 내용이었으나 속에 담긴 내용은 가볍지 않았다.
센터에 등록되지 않은 에스퍼. S급에 가까우며 왕국에 적의를 가지고 마물을 부릴 줄 아는 자였다.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반테온에게 호의적으로 접근하나 느낌이 좋지 않았다고. 그 말에 찌푸려진 델로즈의 얼굴이 더욱 험악해졌다.
“네겐 고의로 접근한 건가?”
“그건 모르겠어. 준비가 되면 데려갈 거라 했으니 언젠가 다시 나타나겠지.”
“…….”
팔짱을 낀 델로즈의 팔뚝에 힘이 들어갔다. 꽉 쥔 주먹을 심란하게 움직인다.
“그 녀석과 대화를 나누는데 아무도 알지 못했다고 했었지. 그게 가능한 이야기인가?”
“아니. 현실적으론 불가능하지. 스스로 정신계 에스퍼라고 이야기하니 고유의 능력인 것 같은데. 실제로 기록된 능력은 아니야.”
“그래서 그런 책을 찾아봤던 거군.”
고개를 끄덕이자 골똘하게 생각에 잠긴 델로즈는 내키지 않는 어투로 말했다.
“당분간 그 망할 친척 놈이라도 꼭 끌고 다녀. 내가 갈 때까지 어느 정도 시간은 끌 수 있겠지.”
의외의 말이었다. 아예 센터를 나가지 말라든가, 아니면 자신을 데리고 움직이라고 말할 줄 알았다. 평소 마음에 안 든다고 입이 마르게 이야기하던 테아로트를 언급하다니. 아직 두 사람의 상황을 모르니 하는 말이겠지만, 예상도 못 했던 반응이다.
“왜 테아로트지? 넌 마음에 안 들어 했잖아.”
“……널 가둬둘 순 없으니까.”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태도엔 불만이 가득하다. 분명 자신도 마음에 들지 않는 해결책이란 티가 역력하다.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하던 사람치곤 소극적인 반응 아닌가. 반테온은 장난스럽게 물었다.
“네가 붙어있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내가?”
“그래. 그게 가장 확실하니까.”
언젠가 반테온에게 접근할 로한을 잡기 위해선 그 방법이 제일 확실했다. 델로즈가 막지 못한다면 그 누구도 불가능할 테니까. 정론을 들은 델로즈의 입술이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날 가지고 노는군.”
델로즈는 바람 빠지는 헛웃음을 뱉고 굳게 낀 팔짱을 풀었다.
“내가 네게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고 싶은가 본데.”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가 조용한 서재에 울렸다.
“내가 곁에 있고 싶다고 하면 넌 허락해 줄 건가? 24시간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옆에서 지켜보고 싶다고 하면?”
“그건 과하잖아.”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털끝 하나 위협받지 않게 안전한 곳에 꽁꽁 가둬두고 싶다고 하면 넌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가겠지.”
으르렁거리는 말에 다시 깨달았다. 잠시 기가 죽은 모습만 봤더니 잊고 있었다. 델로즈는 원래 이런 상대였다. 반테온에게 이빨을 감춘 채 손톱을 말고 있어 잠시 잊었으나, 기질이 흉포하고 독선적이다. 본성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신경질적으로 말하던 델로즈가 찌푸리던 미간을 펴고 쯧 혀를 찼다.
“괜히 자극하지 마. 그 정체 모를 개자식이 널 노린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화나니까.”
델로즈는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머리를 쓸며 한 걸음 물러선다. 반테온에게 위협을 주지 않으려는 듯 팔짱을 굳게 낀 채 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