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이 정도면 잘 참고 있잖아. 네가 원하는 대로 단정하고 얌전하게. 그 확고한 취향에 거슬리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으니 시험하는 건 그만두지그래. 지금도 충분히 힘드니까.”
그 이유로 반테온의 마음에 들고 싶다고 하면서 왜 가까이 있는 걸 거부하는 것일까. 그저 거절당한 마음에 가이딩 일정을 취소한 줄 알았다. 쓸데없이 따라다니지 말라고 했지 공적인 관계까지 다 멀어지잔 의미는 아니었다.
“그렇게까지 하진 않아도…….”
-띵
단말기에 불이 들어왔다. 개인 메시지가 왔을 때 울리는 알림이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테이블 위에 놓인 단말기를 향했다. 서재에 오자마자 급하게 올려놓았기에 델로즈 쪽과 조금 더 가까웠다. 긴 팔을 뻗어 단말기를 쥔 델로즈가 멈칫했다.
단말기를 건네받자 화면엔 최근 자주 보는 코드의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선생님. 오늘 저녁에 센터에 갈 시간이 있을 것 같아요. 잠시라도 좋으니 그때 뵐 수 있을까요? 꼭 드릴 말씀이 있어요. 답장 기다릴게요. 빨리 선생님을 만나고 싶어요.]
“그 꼬맹이인가 보지.”
“…….”
“아니면 또 다른 상대가 있는 건가?”
“아냐, 케슬란 맞아.”
괜히 부정했다가 다른 사람이 오해를 사면 곤란하다. 델로즈는 벌써 케슬란에게 해코지한 전적도 있으니까.
“다시 센터에 불러들인 모양이군.”
그는 반테온이 케슬란을 숨겼다고 생각했다. 격리실에서 치료받는 사이 안전한 곳으로 빼돌려 몰래 만난다 추측했었지. 추종자들의 움직임을 모르는 게 한심하기도 하고, 딱히 해명할 필요가 없어서 내버려 뒀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케슬란은 어차피 정리할 것이다. 델로즈가 견제하든 말든 반테온에겐 이제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 사실을 델로즈에게 이야기하는 것도 구차했다. 그럴 관계도 아니다.
델로즈는 단말기를 들고 있는 반테온의 손을 유심히 바라봤다. 무심한 듯 초조한 시선에 그대로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냥 안부 인사야.”
“상관없어.”
표정 없는 얼굴로 대답한다. 딱딱하게 굳은 시선은 빈말로라도 괜찮냐고 묻기 어렵다. 아니, 괜찮냐고 묻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그야말로 원인과 결과를 모두 제공하는 꼴 아닌가.
“그럼 난 피해줘야겠군.”
작별을 고하는 델로즈의 입가엔 씁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피해준다라. 케슬란을 만날 걸 알면서 방해하지 않겠다는 표현이다. 테아로트든 케슬란이든 반테온 곁에 다른 에스퍼가 붙어 있는 게 싫다던 사람이 많이 바뀌었다. 놀라는 것도 새삼스러울 정도의 변화다.
서재를 나가는 구둣발 소리가 무겁다. 여전히 주먹은 꽉 쥔 채 풀리지 않는다. 단단히 경직된 등을 한 채 델로즈가 방을 나가고 점차 소리가 멀어진다. 그제야 반테온은 소파 팔걸이에 팔꿈치를 올려 턱을 괴었다.
“내가 그렇게 좋은가?”
남들이 들으면 재수 없다 인상을 찌푸릴 말이 입 밖으로 나온다. 자신의 매력은 알 만큼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에스퍼가 가이딩을 자제하면서 함께 있고 싶을 정도였던가.
깊은 눈동자가 슬며시 가라앉았다. 호의에서 비롯된 배려는 나쁘지 않다. 일일이 감사하기 어려울 정도로 배려를 받아온 인생이지만, 이렇게까지 반응하면 헤어진 지 오래인 양심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반테온은 단말기를 다시 들었다. 케슬란이 보냈던 메시지가 메인 화면에 넓게 떠 있었다. 망설임 없이 그 아래 글자를 입력했다.
조금은 챙겨볼까. 어차피 해결할 일을 조금 당기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
“선생님. 정말 보고 싶었어요.”
사랑스러운 곱슬머리와 뽀얗고 붉은 뺨. 분명 성인이 되었음에도 변함없이 해맑은 케슬란이 다가왔다. 서재에서 기다리던 반테온은 느긋하게 꺼내 물었던 시가를 눌러서 껐다.
어차피 끊어내고 안 볼 사이인데 거창하게 자리를 옮길 필요도 없고, 괜히 다른 사람의 귀에 들릴 자리에서 만날 필요도 없다. 평소 서재를 채우던 따뜻한 차향 대신 쌉싸름한 시가 향만 감돌았다.
“선생님?”
“오랜만이네.”
평소와 다른 분위기에 머뭇거리던 케슬란은 반테온의 목소리에 해맑게 웃었다. 그러는 중에도 주변을 살피는 시선이 분주하다. 케슬란이 센터에 도착한 시간은 자정에 가까웠다. 뻔히 보이는 수작이 예전이면 귀여워 보이겠으나 지금은 아니다.
“자리에 앉을래?”
아무것도 올려져 있지 않은 테이블. 텅 빈 주변 광경 환히 열린 창문.
나는 너를 반기지 않는다.
귀족이라면 모를 수 없는 상황에 케슬란의 목울대가 움직인다. 주춤거리며 의자 끝부분에 앉는다. 무릎 위에 올린 손이 긴장으로 바스락거렸다.
“교육은 받을 만했어?”
“네? 네…… 특별한 내용은 없었어요. 전 그것보다 수도에 있을 선생님이 걱정돼서 집중을 못 했거든요. 연락도 없으셔서 걱정했어요.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건….”
“난 아무 일도 없었어.”
길게 이어지는 말꼬리를 잘랐다. 더듬거리며 말하던 케슬란의 입이 일자로 다물린다. 잔뜩 기가 죽은 모습을 보고도 불쌍하단 생각이 들지 않다니. 동정보다 귀찮음이 앞서는 감정에 속으로 웃었다.
스스로 알고 있으나 정말 착한 놈은 못 되는구나.
“케슬란 오늘 부른 이유가 왜일 것 같아?”
“저, 저는 잘 모르겠어요. 선생님이 갑자기 왜 이러시는지…….”
이제 울먹일 기세로 고개를 숙이는 케슬란의 동그란 정수리가 보인다. 결 좋게 흔들리는 갈색 머리통은 이미 마주친 현실에 혼란스럽게 움직였다.
“제가 뭘 잘못했나요? 이유를 알려주세요. 다 고칠게요. 다 바꿀 수 있어요.”
“잘못한 건 네가 아니야. 나지.”
마음이 바뀐 건 반테온이다. 데이트할 때 보였던 평소와 다른 모습에 변덕이 발동했을 뿐이다. 케슬란의 잘못은 아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보이는 것과 다른 부분이 있겠지. 그 모습을 보인 것까지 잘못이라고 매도하면 너무 매정한 처지겠지.
바뀌어야 한다면 케슬란이 아닌 자신이 바뀌어야 한다. 물론 그럴 생각은 없었다.
“제 잘못도 있을 거예요. 진짜 뭐든 원하는 대로 할게요. 계속 만날 수 있다면 다 할 수 있어요.”
“케슬란. 왜 네가 내 생각을 바꿀 수 있다고 자신해?”
오만한 말에 케슬란이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순수할수록 포기가 느리다. 어설픈 다정은 독이다. 괜히 서로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넌 똑똑한 아이니까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거야. 졸업했으니 곧 본격적으로 부대에 배치될 테고, 이제 정식 가이드도 찾아야지. 더 늦어지면 곤란하잖아?”
이미 케슬란의 동기 중 자신의 가이드를 찾은 에스퍼가 많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매칭률이 맞는 가이드를 찾기 어려울 테고, 임시 가이드를 해주던 사람까지 정식 파트너를 만나면 버림받은 차 찌꺼기처럼 매번 임시 가이드를 바꾸며 떠도는 처지가 될 테지.
귀한 A급 에스퍼를 그 꼴로 만드는 건 테아로트로 충분하다. 이건 반테온의 변덕으로 결정된 일이지만, 케슬란에게도 꼭 필요한 일이다.
정을 떼기 위해 더 차갑게, 매정하게 말했다. 고개를 숙인 케슬란의 눈이 살짝 빛났다.
짧은 찰나 잠시 반짝이던 안광은 다시 꾹 감은 눈 사이로 사라졌다. 기분 탓일까. 케슬란은 그 전과 다르지 않게 울음 섞인 목소리로 애원했다.
“저 이렇게 선생님과 헤어지기 싫어요.”
“고집 피우지 마. 이제 어린애도 아니잖아.”
“…….”
묵묵히 입을 다물고 버티던 케슬란은 결국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케슬란도 반테온이 자신의 가이드가 되어주리란 기대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긴 놀이가 끝났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차 한 잔이라도 주시면 안 될까요? 마지막으로요.”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다. 환영 차는 내어주지 못해도 작별 차 정도야.
하루에도 몇 잔씩 즐기는 차 한 잔 내어준다고 문제가 되진 않겠지. 한쪽에 마련된 찻주전자에 물을 끓이는 동안 케슬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만 심란하게 꼬물거렸다.
새하얀 김이 폴폴거리며 찻주전자에서 올라온다. 적당히 데워놓은 찻잔에 첫 물을 따라 버리고, 두 번째 우린 차는 은은하고 투명한 색을 머금고 있다.
달칵 소리를 내며 테이블 위에 올려지는 찻잔을 멍하니 바라본다. 제대로 차려진 다과상도 아니고, 미리 따른 차를 가져다주는. 한 잔 마시고 나가줬으면 좋겠다는 매정한 태도였다. 멍하니 찻잔을 들여다보던 케슬란의 고개가 숙어진다. 어깨가 잘게 들썩인다. 우는 것일까. 고개를 숙이기 전에도 발갛게 열이 오른 눈가가 보였다.
우는 것은 나쁘지 않다. 수긍하고 포기한다는 뜻이니까. 계속 매달리고 성가시게 구는 것보단 나은 반응이다. 케슬란이 훌쩍이는 물소리를 내며 눈가를 소매로 닦는다. 빳빳한 소맷자락이 금세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옷걸이로 걸어가 걸어놓은 재킷 가슴팍에서 부드러운 손수건을 꺼냈다. 쉽게 헤어지고 싶었는데 일이 길어졌다. 손수건을 내밀자 케슬란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받아 들었다.
“훌쩍. 고맙습니다.”
눈가를 꾹꾹 누르며 애써 울음을 참는 모습에 한숨을 삼키고 찻잔을 잡았다. 그러곤 찻잔을 들어 올리려는 데 이상한 느낌이 들어 손을 멈췄다.
분명 방금 우려낸 차는 연한 주황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홍차였다. 한정된 지역에서 자라는 어린 찻잎을 오래 말려 독소를 빼고 부드러운 향만 남긴 기호품이었다. 반테온이 즐기는 차이기에 그 특징은 정확히 꿰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컵 전체를 붉게 물들일 만큼 새빨간 색은 절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