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방금까지만 해도 제대로 된 향과 색을 내고 있었는데,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색이 변한 것이다. 케슬란 앞에 놓인 잔은 평소 반테온이 기억하던 차의 색과 같았다.
반테온의 찻잔만 붉게 빛난다라.
‘최근 들어 이 붉은 기운을 참 자주 본단 말이지.’
마담 레쏘의 약. 최근 델로즈를 폭주시킨 약으로 기억하고 있으나 원래는 다른 목적으로 유명한 약이었다.
밤놀이를 도와준다며 뒤쪽에서 유명한 약물을 이런 곳에서 또 보게 될 줄이야. 케슬란이 예상과 다른 아이라는 건 짐작했다. 그저 욕심이 많고 가식적인 면이 있는 줄 알았는데 이 정도로 까말 줄이야.
이런 물건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했으면서 맞은편에 앉아 울음을 참는 척 연기하고 있었다.
“케슬란.”
“네, 네.”
“차는 마음에 들어?”
겨우 울음을 그친 케슬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쥐었다.
“감사합니다. 제 부탁 들어주셔서…….”
굳이 차 한잔하고 싶다고 매달린 이유는 약을 타기 위해서겠지. 조사한 결과 마담 레쏘의 약은 여러 종류가 있었다. 단순히 성욕을 증폭시키거나, 정력에 도움을 주는 것부터 암암리에 자행되는 노예용 약물까지. 게다가 에스퍼를 폭주시킬 수 있는 약물의 존재까지 밝혀졌지.
이건 무슨 효과가 있을까.
에스퍼의 기운과 같은 붉은 아지랑이 때문에 마담 레쏘의 약이 섞인 건 알았어도 그 효능까진 알기 어려웠다. 순수한 궁금증이다. 과연 케슬란이 어떤 목적으로 자신에게 약을 먹이려고 했을까.
뜨거운 차를 호호 불어가며 마시는 케슬란을 바라봤다. 연한 갈색 눈동자가 찻잔을 주시하면서도 흘낏흘낏 반테온을 훑는다. 언제 차를 마실지 가늠하듯.
마담 레쏘의 약은 무색무취. 케슬란의 눈에는 이 붉은 기운이 보이지 않을 테니 반테온이 눈치챘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조심히 찻잔을 들어 코에 가져간다. 역시 향은 다를 바 없었다. 평소 맡던 상쾌한 향이 그윽하게 퍼졌다.
반테온은 그대로 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전자 옆에 작게 마련된 차판에 그대로 차를 부어버렸다.
“선생님 갑자기 왜 그러세요?”
격양된 소리가 등 뒤에서 들린다. 당혹과 곤란함이 공존하여 한 톤 올라간 어투였다.
“그래서 케슬란. 여기에 뭘 탔어?”
“네?”
“아직 마담 레쏘의 물건에 손을 대기엔 이르잖아.”
케슬란의 고개가 번쩍 들린다. 운 것은 진짜인지 아직 가라앉지 않은 눈가가 붉다. 놀란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채 부드러운 입술을 깨물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어…….”
“…….”
당황하여 말을 더듬는 케슬란이 진정할 때까지 기다렸다. 반테온은 꼰 다리 위에 깍지 낀 손을 올리고 느긋하게 등을 기대었다. 눈치를 보며 갈등하던 케슬란은 자신의 행동이 완전히 들켰다는 것을 알아채고 얼굴을 울 듯이 찌푸렸다.
“……어떻게 아셨어요?”
“그게 중요한 건 아닐 텐데.”
단호하게 그의 질문을 잘랐다. 반테온이 어떻게 약을 탄 걸 알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들킨 시점에서 케슬란은 그걸 물을 자격이 없었다. 차가운 눈으로 케슬란을 바라봤다.
“이걸 먹이면 너도 무사하지 못할 건데”
이곳은 센터의 중앙이다. 아무도 모르게 납치할 수도 없을 테니, 약을 먹여봤자 하룻밤의 만족일 뿐이다. 그 후엔 모든 책임을 지고 처벌받겠지. 이런 무모한 짓을 벌이다니 어린애는 어린애인 것일까.
“이런다고 바뀌는 건 없어.”
“저도 알아요. 처음부터 선생님이 제게 진심이 아니었다는 거. 그냥 가볍게 즐길 뿐이라는 건 안다고요. 그래도 욕심나는 걸 어떡해요.”
하소연하듯 튀어나온 음성은 점차 감정이 격양되며 커지기 시작했다.
“저는 처음부터 선생님밖에 없었어요. 곱슬머리를 좋아한다는 말에 매번 자라나는 머리를 손질해서 맞출 정도로 선생님만 생각했단 말이에요.”
계속 감정을 쏟아내던 케슬란은 울먹이는 표정으로 올려다봤다. 케슬란이 얌전히 반테온의 말을 받아들였다면, 그가 앞으로 활동하면서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뒤를 봐줬겠지. 그건 앞에 만난 이들에게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이건 아니다.
“이건 선을 넘었어.”
“알고 있어요.”
이를 악문 케슬란의 목소리가 떨리며 흘러나왔다. 반쯤 울음기 섞인 목소리를 못 들은 척 뒤로 돌았다. 바로 경비 대원을 불러야 할 일이었으나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 시간 데리고 놀긴 했다. 마음을 줄 듯 말 듯 하며 즐긴 것도 벌써 1년. 길긴 길었다. 누구라도 독이 오를 기간이긴 하지. 케슬란의 행동에는 반테온의 지분도 크다.
“이번 일은 눈감아 줄 테니 내일 정리해서 다른 지부로 떠나. 마지막 선물이라고 생각해.”
그동안 즐긴 시간의 마지막 보상이다. 수도엔 머물지 못해도 에스퍼와 귀족으로의 직위는 유지해 주겠단 의미다. 엉망일 게 뻔한 케슬란 쪽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뒤로 돌아 흐트러진 다기를 정돈했다.
찻장 문고리를 잡으려던 손길이 멈췄다. 뒤에서 반테온을 강하게 당기는 힘에 벽으로 떠밀렸다.
“화도 안 내실 줄은 몰랐는데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네요. 선생님은….”
눈앞에는 반테온에게 바짝 붙은 케슬란의 동그란 정수리가 보였다. 그가 손으로 반테온을 강하게 밀었다. 벽에 몸이 단단히 고정되었다.
“이렇게 행동해서 좋을 게 없을 텐데?”
“상관없잖아요. 제가 어떻게 행동해도 이제 안 보실 거잖아요.”
“그렇겠지.”
망설임 없는 대답에 케슬란은 벽을 짚어 반테온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양팔 사이에 가뒀다. 그 팔을 치우려고 밀어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반대로 반테온을 속박하듯 더 공간을 좁혀 다가왔다.
“이거 놔.”
“안 놓으면 어쩔건데요? 어차피 못 벗어나잖아요.”
케슬란의 목소리가 낮아진다. 고개를 들어 반테온을 올려다보는 그의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지금까지 봐 온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울먹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비릿한 웃음기가 얼굴에 가득하다.
“너…….”
“놀랐어요?”
케슬란이 반테온에게 힘을 쓴 것은 처음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반테온이 제지하면 착한 강아지처럼 말을 듣던 녀석이 돌변했다.
“이런 식으로 굴면 처벌 수위만 높아져.”
“그래서요?”
반테온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케슬란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잇는다.
“그 잘난 법도 들켜야 처벌받는 거죠. 제가 선생님을 이대로 나가게 둘 것 같아요?”
케슬란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올라온다.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반테온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봤다. 지금 두 사람이 대화 나누는 곳은 센터의 정중앙이다. 케슬란이 자포자기한 듯 중얼거렸다.
“이왕 들킨 거 다 말씀드릴까요? 맞아요. 마담 레쏘의 물건이에요. 어렵게 구했는데 쓸모가 없어졌네요.”
“막 나가는군.”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방법이 없잖아요. 선생님은 당장 절 끊어내려고 하는데.”
케슬란이 눈을 휘며 웃었다. 과거의 천진난만한 표정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진득한 소유욕과 음험한 성욕만 가득하다.
케슬란이 한 걸음 더 다가온다. 두 사람의 가슴이 닿을 듯 가까워지자 손을 뻗어 반테온의 손목을 쓰다듬었다.
손길은 천천히 올라가 어깨까지 더듬었다. 케슬란의 고개가 반테온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선생님. 잘해줄게요. 자신 있어요. 절 원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저 다른 쪽도 잘하거든요.”
번들거리는 케슬란의 눈동자를 바라보자 소름이 올라온다. 그가 훑은 팔이 반사적으로 작게 떨렸다. 그 반응에 케슬란의 미소가 더 진해졌다.
“기분 좋을 거예요. 그 전으로 돌아가기 힘들 정도로요.”
반테온의 팔을 만지던 손은 천천히 올라와 어느새 그의 목덜미에 닿았다. 맨살에 닿은 뜨거운 손가락에 반테온의 어깨가 움츠러든다.
거부감이 가득한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잔뜩 찡그린 채 케슬란을 노려봤다. 지금까지 봐왔던 모습이 떠오르지 않을 만큼 다른 분위기다.
“이게 원래 네 성격이야?”
“선생님은 이런 표정을 해도 예쁘네요.”
이미 케슬란의 눈은 홀린 듯 풀려 있었다. 반테온이 무슨 소리를 해도 그의 귓가에 닿지 않았다. 약하게 쥔 것 같은 케슬란의 손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그전까지 알던 사랑스러운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반테온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하나만 물어보자.”
“얼마든지요.”
“저 약 무슨 효과가 있는 거지?”
“아하. 그게 궁금했어요?”
환하게 웃으며 대답하는 케슬란의 모습에 다시 한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웃는 모습만은 반테온의 취향에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꾸민 모습이라고 해도 이렇게 마음에 차는 상대는 드물었는데.
“중독성 있는 최음제예요. 흔하디흔한 물건인데…… 아, 이 약에는 심각한 부작용이 있거든요.”
“그래?”
“너무 독해서 약 기운을 제대로 못 빼면 백치가 된다고 하더라고요. 괜찮아요. 선생님이 백치가 되어도 제가 돌봐줄 테니까. 영원히 말이죠.”
약을 쓴 의도는 반테온의 추측과는 반대였다. 하룻밤을 즐기기 위한 약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약을 먹이고 자신을 가둬두려는 심산이었다.
“제정신이 아니구나. 너.”
“아쉽다. 너무 아쉬워요.”
개인 서재에는 찾아오는 이가 거의 없으니 반테온을 힘으로 억류한 채 약에 미쳐서 백치가 되길 기다리려는 계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