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반테온의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케슬란의 눈빛은 광기로 빛났다.
“약을 드셨다면 좋았을 텐데. 그럼 지금쯤 이런 실랑이 대신 야하게 울고 있을 거잖아요.”
“미쳤군.”
“아, 생각만 해도 너무 좋다.”
황홀하게 읊조리는 케슬란의 시선이 번들거렸다.
양쪽 입꼬리를 길게 올리며 웃는 케슬란의 모습이 보였다. 자신의 계획이 들켰음에도 승기를 잡고 있다는 듯 당당하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웃을 수 있는 건 케슬란 만이 아니었다. 움직임을 속박당한 반테온의 입에서도 미소가 스며 나왔다.
죄도 없는 아이를 홀로 마음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내치기엔 쥐꼬리만 한 양심이 신경 쓰였는데,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케슬란이 가져온 약의 용도도 알았으니 이제 이 만용을 끝내야지. 마지막으로 반테온은 천천히 손을 들어서 케슬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울리지 않는 상황에도 여전히 부드러운 머릿결이다. 곱슬머리가 살랑거렸다.
“선생님?”
갑작스럽게 다정한 행동에 독기 어린 케슬란의 눈이 다시 동그래진다. 반테온이 알던 사랑스러운 모습 그대로였다. 그래. 마지막은 역시 이런 모습으로 끝내야지.
케슬란이 방심한 틈을 타, 반테온은 머리를 쓰다듬던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그대로 자신의 가슴팍을 강하게 내리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가슴 안쪽 주머니에서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무슨 짓이에요!”
반테온의 갑작스러운 자해에 케슬란이 놀라서 제지했다. 꽉 쥔 주먹을 감싸고 말리려던 케슬란의 동작이 천천히 느려졌다.
“어?”
단단히 버티고 서 있던 그의 몸이 천천히 허물어진다. 무릎이 굽히고 몸을 세울 힘도 없는지 바닥을 짚고 주저앉았다.
“이게 뭐야?”
케슬란이 황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가이드와 에스퍼의 힘 차이는 반테온이 누구보다 뼈저리게 알고 있다. 무작정 방을 찾아왔던 델로즈와 믿었던 테아로트까지 돌변하는 걸 보며 깨달았다. 단순히 비상벨과 경호원만 믿고 지낼 순 없다.
가슴팍에 숨겨놓은 마석 조각을 털어낸다. 에스퍼의 힘을 무력화시키는 마석은 에슬란테에서도 어렵게 구한 물건이었다. 겨우 케슬란 따위에게 쓰기 아까울 정도의 보물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마석 조각의 힘에, 그나마 버티던 케슬란의 상체도 완전히 무너졌다.
“그동안 즐거웠는데 끝이 이렇게 돼서 아쉽네.”
“하… 하하…아, 이런게… 있었구나.”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케슬란이 기운 빠진 웃음을 뱉는다. 바닥에 엎드려 실성한 듯 웃는 모습을 뒤로하고 단말기를 들었다. 케슬란을 구속 요청하고 먹이려 했던 약을 증거로 제출해야 했다.
반테온은 쓰러진 케슬란의 몸을 발로 걷어 뒤집었다. 약을 탔다면 어딘가 약을 담아온 병이 있을 것이다. 몸을 숙여 힘없는 케슬란의 품을 뒤지자 아니나 다를까 안쪽 주머니에서 반 정도 남은 붉은 약병이 나왔다.
“선…생님.”
케슬란은 힘없는 팔을 올려 반테온의 소매를 잡았다. 마지막까지 미련을 놓지 못하는 케슬란의 행동에 혀를 찼다. 그의 손을 떼어내기 위해 붙잡힌 팔을 강하게 휘둘렀다. 케슬란의 손이 떨어졌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 힘을 짜내 반테온의 발목을 잡았다. 거머리 같은 행동을 반테온이 한숨을 내쉬며 발로 차려는 순간, 강하게 당기는 힘에 그의 몸이 미끄러졌다. 순간 하늘과 땅이 뒤집힌다. 바닥에 어깨와 등이 닿는 것과 동시에 입가에 차가운 액체가 떨어졌다.
“윽…!”
뒤늦게 입을 닫으려 해도 이미 작은 병의 입구가 반테온의 치아에 걸린다. 최후의 힘으로 반테온을 쓰러트린 케슬란이 손에 쥔 약물을 기어코 먹인 것이다. 자신의 위에 올라탄 케슬란을 발로 차자, 그가 힘없이 밀려 굴러갔다.
“헉… 히…흐…하하…하…….”
케슬란은 엎어진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도 상체가 흔들릴 정도로 낄낄거렸다. 망할 에스퍼. 마석의 힘을 빌려도 에스퍼는 에스퍼인 걸까. 마석의 힘을 믿고 방심한 채 가까이 다가간 자신의 실책이다. 분명 S급에게도 통하는 마석이라고 들었는데, 케슬란의 집착이 그 정도로 강했던 것일까.
서둘러 입에 남은 약물을 뱉었지만, 이미 삼켜버린 약물은 어쩔 수 없다. 목구멍에 남아 있는 화한 감각에 구역질이 났다. 토하려 해도 이미 깔끔하게 넘어간 액체는 나오지 않았다.
“…윽.”
구역질하기 위해 숙였던 몸을 일으키는 데 다리에 힘이 풀린다. 독한 약이라더니 반응이 빨랐다. 바닥에 주저앉아 벽에 상체를 기댔다. 가슴 중앙부터 불타오르듯 퍼지는 감각에 손이 떨린다. 익숙하게 온몸으로 퍼지는 느낌은 해소 못 한 분명한 갈증과 욕망이었다.
당장 누군가를 끌어안고 거칠게 욕구를 풀어내고 싶은 충동이 머릿속을 지배한다. 부드러운 몸을 안고 마음대로 휘젓고 싶은 욕망. 엉망이 될 때까지 짓눌러 허리 짓하고 싶은 망상.
어처구니없는 생각에 실없이 웃었다. 스스로 한 걸음도 옮기지 못하는 꼴로 뭘 하겠다고.
방금 들었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약 기운을 빼지 못하면 백치가 된다고 했던가. 그럼 케슬란은 구속되고 자신은 백치가 되겠군. 우스운 꼴이다. 여러 사람을 갈아가며 만날 때 칼침 한 번쯤은 맞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생각도 못 한 결말이다.
일그러지는 시야 너머로 바닥에 떨어진 단말기가 보인다. 긴급호출을 하면 될까. 센터에 긴급호출을 요청하면 이 꼴로 널브러진 반테온의 모습을 모든 사람이 보겠지. 역사에 회자할 꼴이다. 미숙한 에스퍼들을 데리고 놀다가 백치가 되어버린 명문가의 후계자라고 야사에 길이길이 기록될지도 모르지.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없는 상황에 미친 것처럼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죽어도 싫은 미래이지만, 진짜 백치가 되는 것보다 낫겠지.
반테온이 호출 버튼을 누르려 손을 들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단말기를 쥐자 화면 아래쪽 파란 버튼이 보였다. 평생 회색으로 닫혀있다가 얼마 전부터 파랗게 활성화된 표식이다.
매칭 파트너 호출 버튼이었다.
‘다음에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반드시 나를 불러.’
그 말이 왜 지금 떠오르는 것일까. 델로즈가 서슬 파란 눈을 빛내며 자신에게 받아간 약속이었다.
‘네 주변에 잘 보이고 싶어서 안달 난 다른 에스퍼 말고, 날 부르란 말이다. 임시라고 해도 내가 네 에스퍼니까.’
왜 이렇게 꼬이는 것일까. 처음부터 그랬다. 원하는 대로 흘러간 적이 없다. 그 녀석을 만난 순간부터 평온하던 인생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얽히고설켰다. 이미 발을 빼기엔 너무 깊게 들어온 걸지도 몰랐다.
반테온은 망설임 없이 파란 버튼을 눌렀다.
***
퍽- 질척한 액체가 흐르는 소리에 정신이 깨었다.
눈앞에 새빨간 벽이 보인다. 그 아래 핏덩이가 되어 꿈틀거리는 케슬란의 넝마 같은 몸뚱이와 붉은 기운이 거칠게 요동치는 단단한 등판을 주시했다.
“……아.”
힘들게 입을 열자 소리가 되지 못한, 새된 바람이 나왔다. 그 작은 기척을 알아챈 델로즈가 몸을 돌려 서둘러 다가왔다.
“정신이 들어? 어서 의사에게 가자.”
정신을 잃기 전엔 흐릿한 시야가 머릿속을 괴롭혔다면, 지금은 전신에 들끓는 열기가 끊임없이 반테온을 괴롭혔다. 팔로 등을 고정하고 조심스레 들어 올리는 커다란 손에 닿은 부위가 간지럽다.
손을 뻗어 델로즈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잡는 손아귀엔 한 줌의 힘도 없었다. 큰 손이 걱정하듯 쓰다듬을 때마다 아랫배가 저릿하다. 제대로 몸도 가누지 못하는 반테온의 모습에 금색 눈동자가 아프게 찌그러졌다.
“또 무슨 일로 내 속을 뒤집을까 했는데…… 이건 예상도 못 한 일이군.”
몸을 안아 드는 동작에도 튀어나오려는 신음을 삼켰다. 옷자락 쓸리는 감촉, 걸을 때마다 몸에 느껴지는 진동. 모든 것이 자극이었다.
“방… 방으로 가.”
이 꼴로 의사에게 갈 순 없다. 어차피 의사가 해결해줄 수도 없는 문제였다. 반테온의 요청에 불만스럽게 미간을 찌푸린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이 꼴을 하고 있는데 방에 혼자 내버려 두라고?”
“읏.”
신경질적으로 끌어안는 행동에 꽉 다문 입술 사이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물기 가득한 소리에 멈칫한 델로즈의 눈에 그제야 반테온의 모습이 들어왔다. 상기되어 풀린 눈동자. 몸에 흐르는 식은땀. 닿을 때마다 빳빳하게 긴장하는 근육. 덜덜 떠는 손가락.
외면할 수 없는 성적 고양감의 흔적들이다. 케슬란이 먹인 약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차린 델로즈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낮게 지껄이며 반테온의 얼굴이 보이지 않게 가슴팍에 묻어 안았다. 입가에선 케슬란을 향한 욕설이 쉴 새 없이 튀어나온다. 품 안에서 바스락거리는 행동에 입술을 악물고 방으로 향했다. 다행히 반테온의 서재와 방은 모두 복도 끝 분리된 곳이다.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 어두운 곳을 통해 이동했다. 눈을 꽉 감고 흔들리는 몸을 진정시키느라 식은땀에 푹 젖은 채 버텼다. 푹신한 침대가 등에 닿고야 겨우 눈꺼풀을 들어 올린다. 반테온의 눈앞에는 걱정스럽게 내려다보는 델로즈의 얼굴이 보였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은 반테온 대신 약을 먹은 것 같은 행색이다.
“많이 힘든가?”
“으….”
덥다. 배 속이 타는 듯 뜨겁다. 익숙한 공간에 들어오자 참았던 인내력이 바닥났다. 차가운 공기에 닿기 위해 신경질적으로 재킷을 벗고 단추를 쥐었다. 덜덜 떨리는 손가락이 매끈한 단추 위에서 미끄러진다. 여러 번 헛손질하는 모습에 델로즈가 머리를 쓸며 한숨을 내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