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이상한 말을 한 델로즈는 그대로 몸을 일으킨다. 마지막으로 반테온의 이마에 헝클어진 앞머리를 쓸었다. 아련한 손길로 슬쩍 매만지더니 천천히 멀어진다. 영문 모를 말의 뜻도 설명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는 모습에 반테온이 몸을 일으켰다. 대체 알아서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못 미더운 말에 결국 단말기를 쥐고 몸을 일으켰다.
“뭘 어떻게 하려고…… 으….”
땅에 발이 닿는 순간 느껴지는 낯선 격통에 델로즈를 향한 욕을 다시금 속으로 내뱉었다. 급하게 다가와 붙잡는 손길이 다정하다. 반강제적으로 다시 침대 위에 몸을 눕힌다. 조금만, 아니 며칠은 쉬어야 할 것 같다.
***
델로즈의 말대로 케슬란은 죽지도 않았고, 반테온이 그 일로 불려갈 일도 없었다.
대신 격한 운동의 여파로 이틀간 침대 신세를 져야 했다. 몸을 겨우 움직일 만큼 회복하고 바깥소식을 접했는데, 그사이 센터는 핏빛 치정 이야기로 가득 덮여 있었다.
케슬란이 반테온과 임시 매칭 한 델로즈를 도발했고, 그 도발에 넘어간 델로즈가 케슬란을 빈사 상태로 만들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A급인 케슬란이 SS급인 델로즈를 도발하다니. 질투에 미치면 뭐든 할 수 있다지만, 정도가 있다.
그런 상식에서 벗어난 말을 믿을 이는 많지 않았다. 누구나 같은 생각을 했다. 델로즈가 반테온 주변을 맴도는 케슬란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일방적으로 폭행하고 입막음을 했다고. 이유는 모르지만, 케슬란 측이 굳게 입을 다물고 있기에 쉬쉬하며 뒤로 떠들 뿐이었다.
정작 사건의 중심인 반테온에 관한 이야기는 한 줄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두 에스퍼 사이에 낀 불운한 가이드 정도에 그친다. 가볍게 넘어가기엔 케슬란의 부상은 심각했다. 몸의 반신을 제대로 쓸 수 없을 거란 진단이 내려졌고 덩달아 델로즈가 징계받을지도 모른다는 소문도 뒤따랐다.
‘멍청하긴’
에스퍼 간의 허락 없는 분쟁은 중징계 대상이다. 케슬란의 도발이 먼저였다는 현실감 없는 이야기를 재판관들이 믿을 리가 없다. 눈 가리고 대충 판결할 테니 가벼운 형벌로 그친다 해도 완전 무죄가 나오진 않을 것이다. 사실대로 말했다면 아무 일도 없을 걸 굳이 누명을 쓰다니.
“먼저 면담을 신청하셔서 놀랐습니다.”
“제가 너무 소홀했나 봅니다.”
“허허허. 아닙니다. 아무 일 없이 조용한 것이 제일 아니겠습니까.”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던 센터장이 맞은편에 앉았다. 갑작스러운 면담 요청에 시간을 낸 센터장이 의문스럽다는 듯 웃었다. 조용히 넘어가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 저 얼굴 아래는 모든 일을 파악하고 확인하려는 의도만 남아 있다.
“이미 제가 온 이유는 알고 계시겠죠?”
“이 늙은이가 괜히 이 자리에 있는 건 아니지요.”
의뭉스럽게 대답하는 센터장의 눈빛이 반짝인다. 그라면 진실을 다 알고 있으면서 델로즈가 징계를 받을 때까지 조용히 있겠지. 반테온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센터장은 현명하고 판단이 빠르지만, 정의나 진실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은 아니다.
“이대로 넘어갈 생각입니까?”
“양쪽에서 밝히지 않은 일을 늙은이가 먼저 나설 순 없지요. 진실을 바라는 자가 없으니 말입니다. 아, 물론 케슬란 군은 센터에서 제명될 겁니다. 부상이라는 핑계가 붙지만, 사실상 추방이지요.”
현명한 대답이다. 괜히 진실을 밝힌다고 양쪽의 척을 질 필요도 없고, 적당히 가운데서 모른척하면 일은 깔끔하게 끝난다.
“델로즈 님이 받는 징계도 나쁘지 않은 수준일 겁니다. 최근 델로즈 님은 왕국의 영웅이시니 가벼운 임무 한두 개 해결하고 독방에 잠시 머물면 끝나지요. 시간이 지나면 이런 사건은 기억도 하지 못할 겁니다. 허허허.”
케슬란은 결국 추방되어 수도에 다시 발도 붙이기 힘들어질 것이고, 델로즈도 적당한 징계로 정리될 것이다. 케슬란도 반테온에게 약 먹인 걸 밝히기 싫을 테고, 델로즈도 그 사실을…… 반테온이 그런 약을 먹었다는 것 자체를 말하기 싫어할 테니까.
미련한 짓이다. 그딴 사실이 반테온에게 흠집을 낼 순 없다. 아니, 반테온이 겪은 사실을 완전히 밝힐 필요도 없다. 그저 필요한 사실의 살을 발라 적당히 밝히는 것 또한 살아가는 요령인데 델로즈는 그런 부분에선 아직 서투르기 그지없다. 그러니 불편한 몸으로 대신 움직일 수밖에.
“센터장님.”
센터장의 말대로 징계도 되지 못할 가벼운 처벌을 받고 구색만 갖출 것이다. 케슬란이 아무리 귀족이고 A급 에스퍼라 하여도 델로즈와는 위치가 다르니까. 하지만 그게 누명을 써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제가 바라지 않습니다.”
“반테온 님.”
“그걸로 충분할 텐데요?”
사건의 당사자인 반테온이 사실을 밝히고 정당한 결론이 나길 바란다고 말한다. 누구라도 반론할 수 없는 이유다.
“원칙을 중시하는 센터장님께서 내부 일을 그렇게 편하게 처리할 리 없다는 걸 압니다. 필요하면 케슬란의 행동에 관해 증인이라도 서 드리죠.”
마음에도 없는 소리에 센터장의 긴 눈썹이 휜다. 진의를 파악하던 눈이 슬며시 휘며 천천히 웃었다.
“허허허. 증인 참석이라니요. 제가 어찌 반테온 님께 그런 걸 부탁드리겠습니까. 제가 말한 건 그저 가장 편한 방법이라 알려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맞습니다. 반테온 님의 말대로 원칙은 원칙이죠.”
센터장이 책장 한쪽에서 잘 정리된 서류를 꺼냈다. 왕실 재판을 위해 작성된 센터장의 도장이 제대로 찍혀있는 공식 서류였다. 반테온은 내용을 읽으며 비틀리는 입꼬리를 숨겼다.
[센터는 에스퍼 델로즈의 정당방위를 주장한다. 에스퍼 케슬란은 에스퍼 델로즈의 임시 매칭 가이드인 반테온 에슬란테에게 일방적인 연락과 스토킹을 자행하였으며, 개인 서재에 무단 침입하는 행위를 저질렀다. 이하 에스퍼 케슬란의 일방적인 메시지를 하단에 첨부한다.]
총 48장에 달하는 보고서는 에스퍼 델로즈의 행위를 가이드 보호법에 근거하여 완전 무죄라 주장하고 있었다.
페이지를 넘기자 그동안 케슬란이 반테온에게 보낸 쪽지들이 깔끔하게 정렬되어 있었다. 반테온의 대답이 없음에도 꾸준히 전송된 메시지들. 결국, 마지막이 돼서야 한 번 보고 이야기하자는 반테온의 마지 못한 답변까지. 누가 봐도 케슬란의 집착이라 생각할 자료다.
적지 않은 양의 서류는 단기간 내에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일이 미리 대비했다는 걸 숨기지 않는 센터장의 행동에 어이없이 웃었다. 능구렁이처럼 이런 걸 준비해두고 조용히 넘어가려 했단 말이지.
“이 늙은이의 준비가 어찌 마음에 드십니까?”
“나쁘진 않군요.”
이미 작성해놓은 서류를 모르는 척한 것만 아니라면 더 좋았겠지만 말이다. 센터장의 행동을 예상하고 말을 꺼낸 것이긴 하지만 괘씸한 건 여전하다. 그래도 센터장이 내민 해결책은 마음에 든다. 피해자인 반테온의 사회적 체면은 해치지 않는 완벽한 준비다. 반테온은 들고 있던 서류를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그럼 나머지 일은 센터장님께 맡기겠습니다.”
“돌아가실 겁니까?”
용건이 끝났음에도 센터장의 말이 발을 잡는다. 속셈을 모를 의미심장한 눈빛이 그의 눈동자에 서려 있었다.
작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용건이 남은 듯한 말투에 동작을 멈췄다. 센터장은 은근한 미소로 응시했다.
“제가 전에 드린 질문은 생각해 보셨습니까?”
“……전에 남긴 말이라면, 에스퍼가 인간인지 아닌지 생각해 보라는 말이었죠?”
“영민하십니다.”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센터장의 눈빛엔 만족감이 가득하다. 의미 모를 질문이라 생각하면서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던 말이었다. 에스퍼의 기원 따위를 왜 가이드인 반테온에게 물어본단 말인가. 이해 못 할 시선과 센터장의 눈이 마주쳤다. 종종 센터장은 반테온을 저런 눈으로 바라봤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무언가 기대하는 부담스러운 시선이다.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왜 제게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
“허허허. 사실 그 질문은 늙은이 평생의 의문이었습니다. 저는 정답을 찾을 수 없어도 반테온 님은 찾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절 너무 후하게 평가하시네요.”
대가 없는 칭찬은 없다. 한발 물러서서 대답했다.
“이 나이가 되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이 보이는 법이지요. 오만일 수 있으나 지금까지 제 추측은 틀린 적은 적습니다.”
“아직 그 질문의 뜻을 모르겠으니, 제가 센터장님의 기대에 부응하기엔 부족한가 봅니다. 그리고 틀린 적이 적다는 것이 완벽하다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요. 세상을 오래 살다 보니 제가 모르던 일이 생기기도 하더군요.”
센터장이 새로운 서류를 꺼냈다. 직전에 꺼낸 것과 다르게 정식 서류와 동떨어진 형식이었다. 짧은 문장으로 이뤄진 서류는 급하고 짧은 문체로 적힌 보고서였다.
“전에 반테온 님께선 델로즈 님과 그저 계약 관계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뿐이라 말씀하셨죠.”
“그랬습니다.”
“그 생각이 변함없다면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결코, 반테온 님께 해가 되는 제안은 아닐 겁니다.”
센터장이 내민 서류에는 얼마 전 발현했다는 새로운 가이드에 관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센터 창설 이래 최초로 나타난 SS급 자연 발생 에스퍼인 델로즈. 그리고 뒤따라 나타난 또 다른 이변이라 서술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