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에스퍼를 피하는 방법 (81)화 (81/112)

#81

성인이 되어 뒤늦게 발현한 가이드가 센터를 찾아왔다. 이름은 세이라 로클레스. 로클레스 가문 또한 역사가 깊은 가문 중 한 곳이다. 명문가의 자녀이기는 하나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하여 사교계에 데뷔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얼굴을 아는 사람도 없이 가문의 별장에서 요양하던 병약한 아가씨.

이번에 가이드로 발현하여 처음 밖을 나오는 것이라는 기록을 훑었다. 첨부된 사진을 살폈다. 옅은 갈색 머리카락에 잘 차려입은 모습. 짙은 초록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여성 가이드다.

페이지를 넘기자 익숙한 가이드 검사표가 보인다. 특별할 것 없던 수치는 검사 횟수가 늘어날수록 놀라웠다. 매칭 테스트한 모든 에스퍼와 60%라는 같은 결과를 내비친 것이다.

60%라는 수치는 익숙한 숫자다. 처음 델로즈가 센터에 왔을 때도 이런 현상이 생겼었지. 지금껏 전례가 없던 일이 동시대에 두 번이나 일어난 건 우연일까. 아니면 운명의 장난일까. 마치 델로즈를 위해 안배해 둔 등장 같은 느낌이다. 반테온이 그리 느꼈다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 상황에서 센터장이 건넬 제안은 한 가지밖에 없다. 새로 나타난 가이드를 델로즈와 테스트해도 되겠냐는 뜻이다. 다른 이와 똑같이 60%대의 효율이 나올지, 아니면 0이 나올지 확인하고 싶겠지. 만약의 경우 두 사람의 매칭률은 그 이상이 뜰 수도 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분명 그의 제안은 구미가 당긴다. 소파에 기대자 아직 온전치 못한 몸이 쑤신다. 전쟁 같던 그날 밤 이후 델로즈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종종 위치가 변한 의자나 구겨진 침대 끝을 보면 밤에 몰래 오가는 것 같았다. 잠결에 이마에 얹어진 손이나, 자신의 모습을 살피는 시선 같은 게 느껴졌다. 단순히 기분 탓은 아닐 것이다.

어쩌다 보니 예상치도 못한 관계가 되어버렸다. 센터 밖에서 마주친 이들과 정체를 숨기고 즐긴 적은 많았어도 이런 적은 처음이다. 무엇보다 반테온이 안긴 건 태어나서 처음이다. 최악의 사태라고 생각했던 상황이 현실이 되어버렸다.

정신을 차린 다음 날 조심스럽게 반테온을 살피던 델로즈가 떠올랐다. 그 걱정스러운 얼굴엔 숨기기 어려운 만족감이 스며 있었다. 이제 그전 관계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 인제 와서 거리를 둔다고 한들 델로즈가 얌전히 있을 리도 없다.

‘이쯤에서 거리를 두는 게 좋을지도.’

이번 일이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다. 이미 늦었지만, 조금이라도 상황을 돌릴 수 있다면 시도하는 것이 옳았다. 마음을 정한 반테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편하신 대로 해도 됩니다.”

“협조 감사합니다.”

깔끔하게 정렬한 서류를 다시 전달한다. 서류를 받아 든 센터장이 의미심장하게 반테온을 바라봤다.

“그래서 말입니다. 반테온 님 하나만 더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둘밖에 없는 곳에서 다른 사람을 견제하듯 센터장은 말소리 낮춰 이야기했다. 내용을 들은 반테온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확실하면서도 지독한 제안에 혀를 찼다. 매번 그렇지만 센터장의 제안은 나쁘지 않은 이야기다. 잠시 고민하던 반테온은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실을 델로즈가 알면 시끄러워질지 모르지만, 지금의 반테온에겐 최선의 선택지다.

***

따스한 햇볕이 창문 유리를 통해 반사된다. 부서지듯 벽에 닿은 햇살이 여러 색으로 나뉜다. 굴곡지게 세공된 크리스털을 통해 아름답게 쪼개지는 태양 아래서 편안하게 종이를 넘겼다.

센터에 있을 땐 누릴 수 없던 사치에 몸이 늘어진다. 공산화된 공간을 아무리 좋은 소모품으로 치장한다고 하여도 메꿀 수 없는 급의 차이는 확연하다. 겨울바람에도 차가워지지 않는 내벽과 창틀. 우아하게 굴곡진 기둥과 조명이 호화롭게 장식되어 있다.

오랜만에 돌아온 본가는 이미 마물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게 완벽히 복구된 상태였다. 중간중간 무너진 곳을 보수하면서 새로 고친 덕에 그전보다 상태가 좋았다.

“피해가 크지 않았던 모양이네.”

“북쪽 일부만 무너졌습니다. 고치는 김에 오래된 부분도 수리해서 전체적으로 바뀐 부분이 많습니다.”

“나중에 예산 보고서 올려. 내부 수리는 대행사에 맡겼어?”

“아뇨. 펠아토 님이 직접 선별하여 시행했습니다.”

“그럼 문제없겠네.”

계산 하나는 똑 부러지는 영감이니 제대로 했겠지. 착복할 만큼 돈 욕심이 있는 분도 아니니 그 부분은 걱정할 필요 없을 것이다.

“오랜만에 돌아오셔서 기쁩니다. 이번엔 완전히 돌아오신 겁니까?”

“너무 속이 환히 보이잖아. 한 달 정도만 있을 거야.”

“아쉽군요.”

에슬란테 가문의 재정관이 노골적으로 실망했다. 매번 센터에 서류를 보내 처리하는 번거로움에서 어서 벗어나고 싶겠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미안하지만, 반테온이 이번에 정한 휴가는 한 달밖에 되지 않았다. 그것도 센터장의 제안을 받아들인 결과다.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센터장이 제시한 내용은 새로운 가이드와 델로즈의 반응을 제대로 보기 위해 당분간 센터를 비워달라는 요청이었다. 가이드 자각 증후군이 아닐까 오해할 만큼 최근 델로즈의 행동엔 변화가 많았다. 그 반응이 반테온에 한정된 것인지, 매칭률 높은 가이드를 향한 것인지 정확한 반응을 보기 위해 두 사람이 거리를 둘 필요가 있으니까.

말도 없이 저택으로 왔으니 지금쯤 델로즈의 반응이 어떨지 예상되지 않는다. 마음대로 사라졌다고 화낼까. 아니면 새로운 가이드와 즐겁게 지내고 있을지도 모르지.

저택으로 피신 오고 며칠 후, 센터장의 서신을 받았다. 델로즈와 새로 온 가이드가 매칭 테스트를 하였으며, 결과는 놀라웠다.

가이드 세이라와 델로즈의 매칭률은 85%. 지금껏 가이드 세이라는 다른 에스퍼와 60% 내외를 기록했으니, 가장 높은 매칭률이다. 반테온의 초반 매칭률인 98%보다는 낮았지만, 최근 델로즈와 가이딩 효율이 떨어진 걸 생각하면 비슷한 수치일지도 모르지.

자신도 모르는 새 힘이 들어간 만년필에서 굵게 잉크가 새어 나왔다. 검게 번진 종이를 들어 신경질적으로 옆으로 구겨 넣었다.

원하던 대로 여성 가이드면서 높은 매칭률의 상대. 델로즈가 꿈에 그리던 상대겠지. 지금쯤 반테온에 관한 생각을 잊었을 확률도 높다. 뭐, 그것도 센터로 돌아가면 알게 되겠지.

오랜만에 저택으로 돌아오니 밀린 일도 많았다. 서류로 확인하는 것과 실제로 살펴보는 건 많은 차이가 있다. 갈수록 반테온이 처리해야 할 일도 늘고, 가문의 일을 대행해주던 원로들도 이젠 나이가 많이 들었다. 조만간 센터 일을 정리하고 완전히 가문으로 돌아와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럼 밀린 업무는 이게 끝이야?”

“오후 2시에 펠아토 님이 면담을 신청하셨습니다.”

“미뤄.”

“그럼 건강 상태를 핑계로 4시로 잡으면 되겠군요.”

“며칠 더 미룰 순 없을까?”

“내일 오전으로 잡죠. 그 이상은 미룰 수 없습니다.”

돌아오는 대답에 한숨을 내쉬었다. 겨우 하루 미뤄서 달라질 것도 없다. 업무 처리를 위해 매일같이 저택에 방문하는 사람을 피해봤자 거기서 거기다. 반테온이 건강하게 돌아다니는 게 뻔히 보일 테니 통하지도 않는다. 어차피 마주쳐야 할 상대라면 차라리 빨리 해결하는 것이 편할지도 모르겠다.

“계획대로 2시로 해.”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그럴 줄 알고 온실 정원 안에 차를 준비시켰습니다. 오랜만에 반테온 님이 오신다고 하셔서 요리장이 힘 좀 냈을 겁니다.”

“간단하게 해줘.”

오랜만에 의욕이 넘치는 고용인들에겐 미안하지만, 어차피 먹다가 체할 것 같으니 입에 대긴 어려울 듯하다. 손을 뻗어 기지개를 켜자 상체가 쭉 늘어나며 어깨가 시원하게 풀렸다. 벽에 붙은 시계는 약속 시각 1시간 전을 가리켰다.

쉴 시간도 별로 없겠군. 오랜만에 정원 산책을 할 요량으로 겉옷을 챙겨 들었다.

겨울이 다가오자 바람이 점차 매서워졌다. 창백하게 마른 나뭇가지들 사이에서 초록빛으로 빛나는 온실에 도착했다. 날씨가 추웠지만, 따가운 햇볕은 유리창에 반사되어 화려하게 흩어진다. 따뜻한 공기를 순환시키는 내부는 봄날처럼 따스하고 온화했다.

귀하고 화려한 종만 모아 재배 중인 온실은 외관만큼 내부도 화려했다. 가장 따뜻한 중앙에서 키우는 열대 식물부터 외곽으로 갈수록 온대와 한대에서 자라는 식물로 바뀐다. 왕국 전체의 식생을 간소화하여 꾸민 온실은 에슬란테 가문의 자랑이었다. 온실의 중앙, 가장 따뜻한 곳으로 걸어가자 미리 준비된 찻잔과 다과가 보인다. 그리고 그 앞에는 짙은 적갈색 머리의 중년 남자가 서 있었다.

반테온은 눈앞에 남자에게 인사했다.

“일찍 오셨군요.”

“반테온 님께서 일찍 나온다는 소식을 들어서 말입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말 편히 하셔도 됩니다.”

“그럴 수는 없지요. 저도 엄연히 에슬란테의 가솔인데 말입니다.”

고지식하게 허리를 숙이며 격식 있게 인사하는 남자는 펠아토 라데른이었다. 전대 에슬란테 가주의 동생이자, 결혼 이후 라데른이란 새 성을 받아 독립한 반테온의 작은 아버지였다. 그는 반테온이 자리를 비운 시간 동안 오래도록 가문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원로원의 주축을 맡고 있었다.

“볼 때마다 더 아름다워지십니다.”

“……변한 게 하나도 없으십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