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테아로트처럼 짙은 적갈색 머리와 건장한 체구. 그리고 느끼한 인사까지 달라진 게 없었다. 남자 조카에게 아름답다는 말을 칭찬으로 쓰는 뻔뻔함은 아들인 테아로트와 똑 닮아 있었다. 하긴 아들이 누구를 닮겠는가.
평소엔 믿음직한 분이지만, 종전에 테아로트와 있었던 껄끄러운 일 때문에 누구보다 피하고 싶었던 상대였다. 반테온이 자리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 맞은편에 앉는 펠아토는 환한 얼굴로 웃었다.
“갈수록 안주인님을 닮으시는군요.”
“그런 말은 삼촌만 하십니다. 다들 전 가주님을 닮았다고 하는데 말이죠.”
“뭐, 체형이나 성격은 제 형님을 똑 닮으셨지요. 하지만 분위기는 돌아가신 안주인님과 똑 닮으셨습니다. 혹시 건강은 괜찮으십니까? 어딘가 아프시면 바로 말씀하셔야 합니다.”
“항상 걱정해주신 덕에 무탈합니다.”
사실을 모르는 세간의 입들은 펠아토가 에슬란테의 권력을 노리고 반테온을 적대할 거란 추측을 쉽게 했다. 하지만 얽힌 이야기를 모두 아는 반테온은 도무지 수용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펠아토 라데른 역시 아들과 같은 A급 에스퍼였다. 그는 발현함과 동시에 집을 떠나 왕국 전체를 떠돌던 탕아였다. 센터의 임무도 제대로 수행하지 않고 그저 지원금을 받아 즐기며 매칭 가이드도 끝까지 정하지 않았던 그가 유일하게 반한 상대가 있었다.
이미 형님의 가이드이자 에슬란테의 안주인이던 반테온의 어머니에게 첫눈에 빠진 것이다. 그때 부모님은 이미 결혼하고 반테온까지 낳은 상태였다.
반테온의 첫 기억에 펠아토는 삼촌이라고 다가와서 어머니를 꾀고 싶으니 좋아하는 걸 알려달라고 부탁하는 미친 에스퍼였다. 심지어 그때 펠아토는 정략 결혼한 상대와 테아로트를 낳은 유부남이었다. 어린 마음에도 이 사람 괜찮을까 싶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반테온의 부모님은 두 분 다 일찍 돌아가셨고, 그중 가이드였던 어머니는 오랜 병치레 끝에 영면에 드셨다. 두 사람의 죽음을 아들인 반테온보다 더 슬퍼하던 펠아토는 그날로 방탕한 생활을 모두 접고 이제는 누구도 부정 못 할 든든한 에슬란테의 기둥으로 남아 오랜 시간 가주 대행을 맡고 있었다.
그의 소원은 지금껏 변하지 않았다. 안주인을 닮은 반테온이 훌륭하게 에슬란테의 가주가 되어 오랜 시간 건강하게 지내는 것이다. 그때까지 가주 대행을 맡다가 반테온이 돌아오면 다시 자유로운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 목표였다.
“이번 휴가 때 테아로트 놈은 안 나오는 겁니까? 그 녀석이 반테온 님을 두고 혼자 센터에 남을 리가 없는데요.”
쿠키를 한입 베어 물던 동작을 멈췄다. 이래서 피하고 싶었다. 그와 만나면 결국 테아로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테니까. 아버지에게 아들의 추태를 어찌 적나라하게 말할 수 있을까. 그것도 입에 담지 못할 이유로 말이다.
“……최근 임무가 많아서 홀로 쉬고 있습니다.”
“내세울 건 체력밖에 없는 놈인데 혼자 쉬어서 뭐 한답니까. 호위하라고 센터에 남겨놨더니 허튼짓이나 하고 있나 봅니다. 당장 불러오든가 해야지.”
테아로트에게 바로 연락해서 저택으로 불러들일 기세에 반테온이 손을 들어 만류했다.
“내버려 두십시오. 테아로트도 이제 다 크지 않았습니까. 혼자만의 시간도 필요하지요.”
“다 크긴 무슨. 아직 머릿속은 어린애처럼…….”
진절머리 치던 펠아토는 혀가 굳은 것처럼 말을 멈췄다. 눈썹을 찌푸리며 이리저리 눈을 돌리더니 어색한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는다. 이내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반테온 님이 떨어지라고 해서 떨어질 놈도 아니고, 혼자 센터에 남을 놈도 아닌데. 아니, 그건 그럴 리 없고…….”
바닥을 바라보며 한참을 고뇌하던 펠아토가 고개를 들었다. 결의 가득한 시선에 움찔하자 결심을 마친 듯 그의 입이 열렸다.
“설마 테아로트 놈이 반테온 님께 고백했습니까?”
“네?”
“그것 말고는 반테온 님께 떨어질 이유가 없죠. 그 모자란 놈이 결국 사고를 친 모양입니다.”
“…….”
이미 결론을 굳게 내린 채 이야기하는 펠아토의 말에 반테온은 식은땀을 흘렸다. 확신을 가진 말에 얼떨떨해서 행동을 멈추자 자신의 말이 옳다고 판단한 펠아토가 손을 내리치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것도 핏줄이라고 그런 점까지 아비를 닮아서 어쩌려고 그러는지. 나이를 먹으면 정신을 차리리라 생각했는데, 어쩜 그리도 자라질 않는지…….”
“알고 계셨습니까?”
“혹시 무례하게 행동하진 않았습니까? 반테온 님을 위협했다든가 매달렸다든가.”
“그러진 않았습니다.”
“그나마 조금 인간은 되었나 봅니다.”
격변하는 대화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반테온의 대화에 안심한 펠아토의 긴장된 어깨가 그제야 내려갔다. 억지로 손을 잡고 가이딩 하려 했다는 말을 들으면 당장 아들의 목을 따러 갈 기세이기에 그것까지 일러바치진 못했다. 아니, 펠아토가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에 놀라 말할 타이밍을 놓쳤다는 말이 맞았다.
“언제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언제부터라는 말 자체가 틀렸습니다. 그놈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반테온 님을 좋아했으니까요. 왕국 법을 익히기 전부터 꾸준히 그랬으니 알게 된 게 아니라, 고치지 못했다는 말이 맞겠지요.”
“저는…… 전혀 몰랐습니다.”
“그럴 만합니다. 처음부터 좋다고 들떠서 들이댔으니, 처음부터 반테온 님께는 원래 그런 놈으로 보였겠죠.”
쓰린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리던 펠아토의 한숨이 더욱 깊어진다. 고개를 들지 못하고 다시 땅을 바라본다. 언제나 능글맞던 펠아토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이다.
“제가 신경 쓰지 못했습니다. 미리 알았다면….”
미리 알았다면 어떻게 했을까. 사실 아예 몰랐던 것도 아니었다. 얼마나 확실한 마음인지 몰랐을 뿐, 테아로트가 자신을 염두에 두고 행동하는 건 알고 있었다. 그저 지나갈 바람이라 생각하고 어깨 너머로 흘려보내려 했을 뿐이다.
테아로트가 가진 깊이를 미리 알았어도 반테온이 할 수 있는 건 딱히 없었다. 어설프게 거리를 두다가 이런 일을 앞당겼을 수도 있다. 그런 현실을 아는 펠아토가 고개를 젓는다.
“아닙니다. 테아로트 그놈도 속이 시꺼먼 놈입니다. 반테온 님 앞에서는 다정한 척 굴지만 얼마나 정이 없는지 잘 알고 있지요. 그놈이 맘먹고 숨긴 것이니 반테온 님이 모를 수밖에요. 그러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추스르지 못한 본인 잘못입니다.”
펠아토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 옆으로 나와 한 걸음 물러서더니 천천히 몸을 숙인다. 한쪽 무릎을 꿇고 몸을 낮춰 바닥에 숙이는 동작에 반테온이 놀라 몸을 일으켰다.
“왜 이러십니까.”
“아들놈을 간수하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대신 사죄드립니다.”
“아닙니다. 일어나십시오. 작은아버지께서 사죄할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가벼운 일도 아니지요.”
만류하는 말에 더 몸을 깊게 숙이는 행동에 아연하다. 아무리 반테온이 가주가 될 몸이라 하여도 분명히 연배가 높은 분이다. 무릎을 꿇고 몸을 낮추는 모습을 보는 것이 마음 편할 리 없다. 어깨와 팔을 잡아서 달래는 행동에도 펠아토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일어나십시오. 처벌할 생각은 없습니다.”
“아닙니다. 처벌하셔야지요. 확실하게 하셔야 합니다.”
살짝 들어 올린 얼굴은 까맣게 수심이 가득하다. 혹시라도 테아로트의 마음이 밖으로 새어 나간다면 그냥 망신으로 끝날 이야기가 아니다. 근친 간의 교류는 귀족이라 하여도 엄하게 벌했다.
“테아로트는 조만간 수도 밖으로 보낼 겁니다. 마음이 변하기 전까지 돌아올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럴 필요까지 있겠습니까. 제 입에서 사실이 나갈 일은 없을 테니 잘 덮으면 될 일입니다.”
“아니요. 저는 제 아들을 압니다. 아니 저를 안다고 해야겠군요.”
펠아토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 녀석이 제 핏줄인 이상 쉽게 접진 않겠지요.”
“그건….”
다른 에스퍼의 가이드에게 반해 평생 목줄을 매고 산 자의 말이다. 손 한 번 제대로 잡지 못한 사랑에 남은 시간을 모두 걸었다. 그의 성향을 알기에 쉬운 게 아닐 거라 답할 수 없었다.
테아로트도 지금까지 제대로 된 가이드 한 명 만들지 않고 반테온을 바라봤다. 반테온이 괜찮은 에스퍼를 만나길 기다린다던 그 말을 믿으면 안 되는 거였다. 진작에 거절하고 멀어졌어야 했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시겠다면 어쩔 수 없지요.”
“감사합니다. 반테온 님… 염치없는 걸 알지만, 지금까지 제 공을 생각하여 한 가지 부탁을 들어주시겠습니까?”
진지한 요청에 반테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테아로트가 수도를 떠나기 전, 혹시라도 반테온 님을 보고 싶다고 하면 마지막으로 한 번만 만나 주십시오.”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떠난다면 그 역시 역효과가 나는 건 아닐까. 잠시 망설이는 반테온을 보며 펠아토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별로 남지 않은 부정이라 생각해 주십시오. 좋은 선택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먼 길을 떠나는 아들에게 그 정도는 해주고 싶습니다.”
“금방 정리하고 돌아올 겁니다. 테아로트도 그리 어리석지는 않으니까요.”
위로 섞인 반테온의 말에도 펠아토는 쓰게 웃을 뿐이다. 동의할 수 없다는 의사가 가득한 태도에 한숨을 쉬었다. 매번 보던 얼굴 한 번 더 보는 게 어려울 건 없다. 어차피 마음이 정리되면 찾아오라고도 말해놓은 상태니, 이렇게 거리를 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