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에스퍼를 피하는 방법 (83)화 (83/112)

#83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흙에 물들어 바지가 갈색이 되도록 무릎 꿇고 있던 펠아토가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온실에서 처음 봤을 때와 다르게 수심이 가득 찬 얼굴로 그는 애써 침착하게 작별 인사를 남겼다. 돌아서는 등이 축 늘어진 듯 힘없이 흔들린다.

항상 당당하던 펠아토의 모습에 반테온의 마음이 쓰다. 멍청한 테아로트. 그깟 마음 하나 정리 못 해서 이리 여러 사람을 괴롭히다니.

온실에 내리쬐는 초겨울 햇살은 봄처럼 따뜻해 보이지만, 막상 나가면 차가운 바람과 냉기에 그 온도를 느낄 새도 없다. 같은 햇살임에도 언제 어디서 떴느냐에 따라 그렇게 다르다. 다 그런 것이다. 테아로트가 아무리 귀한 마음을 품어도 대상이 반테온인 이상 사회의 시선엔 더럽고 추악한 마음으로 보이겠지.

받아줄 생각도 없고, 받을 수도 없는 마음이다. 결론이 정해진 일이 이렇게 복잡해진다. 아직 덩치만 컸지 자랄 세월이 많이 남은, 여전히 어린 사촌이었다.

***

어느새 신청한 휴가의 절반이 지났다. 휴가라고 하기엔 저택에 돌아와 처리한 일이 센터에 있을 때보다 많아 억울하지만 말이다.

재정관의 말대로 직접 저택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늘고 있다. 나이가 많은 원로들은 물러나려 하고, 새로운 사람을 넣기엔 믿을만한 이가 많지 않다. 지금이야 펠아토가 버티고 있으나, 중간 연락을 맡아주던 테아로트까지 수도를 떠나면 업무에 지장이 생겼다.

슬슬 센터를 떠날 때가 된 걸지도 모르겠다.

착잡한 심정으로 정리하던 서류를 치운다. 깨끗한 책상 위에는 뜯지 않은 두꺼운 서류 봉투가 있었다. 커다랗게 왕국의 문양으로 밀봉된 서류 위쪽을 페이퍼 나이프로 긋는다.

여러 장의 두꺼운 종이로 이뤄진 서류를 펼치며 웃었다. 예상과 다르지 않은 내용이다. 안에는 유력 가문의 자제들 초상화와 신상 정보가 적혀있었다. 모두 청혼서였다. 사진 기술이 발달했음에도 아직 청혼서 같은 정식 서류에는 초상화를 사용했다. 시간이 오래되면 색이 바래는 사진과 다르게 오래 유지된다는 이유였다.

“지긋지긋하네.”

최근 몇 달간은 델로즈와 반테온의 사이에 집중하여 이런 짓을 안 하더니, 저택에 들어앉자마자 또다시 독촉이다. 사실 반테온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결혼을 늦게까지 안 하고 있는 건 맞다. 확실한 가주 후계로 지정된 지도 벌써 10년이 지났는데 약혼자도, 정식 매칭한 에스퍼도 없었다.

남들 보기엔 반테온의 옆자리는 아직 주인 없는 금광쯤으로 보이겠지. 혼인만 맺으면 약속된 영광과 부가 떨어질 관계. 그 자리에 침 흘리는 사람이 많은 만큼 반테온에게 들어오는 청혼서는 손가락으로 세기 힘들 정도다.

세력이 강한 가문끼리 결탁해서 좋을 것 없는 왕국이 반테온의 혼인을 주선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서류의 가장 첫 번째. 제일 위에 놓인 초상화를 들고 웃었다. 익숙한 얼굴이다. 현 국왕의 다섯 번째 아들이었던가. 두 번째 후궁에게서 늦게 본 왕자는 국왕이 가장 애지중지하는 막내였다.

이미 상대가 정해진 첫째와 둘째를 제외해도 세, 네 번째 자식이 있는데 하필 20대 초반의 다섯째 아들이라. 반테온의 취향까지 고려해주겠단 관대한 처사에 눈물이 날 지경이다.

명목상으론 혼기가 찬 귀족의 프로필을 모두 전해준다고 말하지만, 서류 처음에 왕족이 있는데 무시할 것이냐 압박 주는 것이다.

대놓고 왕족의 프로필만 보냈다가 반테온이 거절하면 왕국의 꼴이 우습게 될 것이고, 그렇다고 다른 사람을 고르면 왕국을 무시하는 행동으로 보이게 된다.

이런 형식의 서류라면 반테온이 아직 결혼 생각이 없다고 제안을 거절해도 ‘왕족’을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 자체를 미루는 것이 되니까.

다섯 번째 왕자의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확실히 취향에 맞는 얼굴이다. 연한 갈색이 아니라 화려한 금발이라는 게 조금 걸리지만, 그래도 말갛게 생긴 외모에 환한 미소는 끌리는 구석이 있었다. 물론 지금까지 만난 상대처럼 가볍게 만나기엔 후환이 크기에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어디 살펴나 볼까.’

왕족도 반테온 취향에 맞춰서 상대를 들이미는데, 다른 가문은 어떤 상대를 내세웠는지 구경이나 해보자 싶었다.

대부분 반테온보다 나이가 어렸고 성별은 다양했다. 반테온은 혹시나 하는 위험 때문에 자연 임신이 되지 않는 남자 상대를 선호했을 뿐, 성별을 따지진 않았다. 모두 짠 듯 귀엽고 단아한 외모를 가진 이들의 초상화를 보면서 작게 웃고 말았다. 다들 단단히 준비했다. 아무리 숨기지 않았다지만, 공공연한 취향도 아닐 텐데.

“이건…….”

서류를 흥미롭게 넘기던 그의 손에 한 장의 사진이 잡혔다. 가려서 그렸음에도 병색이 남아 있는 창백한 얼굴. 분명 에슬란테에 들어올 인물이라면 괜찮은 가문의 사람일 터인데, 낯선 얼굴이다. 아마 사교계에 발을 들이지 않은 여식이겠지.

초상화 뒤에 적힌 이름을 빠르게 확인한다.

‘세이라 로클레스.’

뭐?

사진을 든 손이 그대로 멈췄다. 익숙한 이름이다. 분명 이번에 발현하여 델로즈와 매칭 테스트받은 가이드였다. 로클레스가 여식의 프로필을 보낸 건 왕실이니 절대 틀릴 리 없는 정보다.

동명이인도 아닐 것이다. 뼈대 없는 평민이라면 몰라도 유례 깊은 귀족 집안에서 자식에게 같은 이름을 준다? 어림도 없는 일이다.

가이드 세이라는 오래 병석에 있다가 최근 갑자기 몸이 좋아지고 가이드로 발현하여 센터로 찾아왔다고 했었다. 그리고 수많은 에스퍼 중 하필이면 가장 영향력이 큰 델로즈와 높은 매칭률이 나왔다. 무언가 뒤가 찝찝한 상황이다.

‘누군가 농간을 부렸어. 아니면 다 속고 있거나…….’

세이라의 초상화를 천천히 훑었다. 창백한 얼굴에 살짝 야윈 볼. 분홍빛으로 생기를 내려 한 볼 터치에 색이 짙은 눈동자. 그림이라 차이는 있다고 하여도 분명히 다른 사람이다.

등받이 깊숙이 묻었던 상체를 올렸다. 다시 한번 얼굴을 살핀다. 확실히 다르다. 사진과 그림의 차이 때문이라 하여도 반테온이 센터장에게 받아서 봤던 사진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어떻게 아무도 모를 수가 있지? 아무리 병색이 깊어 나오지 않았다고 해도 이걸 모두 믿고 넘어갔다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옷장에 걸린 재킷을 꺼내 걸쳤다.

“어디 가십니까?”

옆에서 서류를 처리하던 재정관이 물었다. 의아하게 바라보는 시선에 답했다.

“센터에 간다.”

“지금 말입니까? 잠시 들르시는 겁니까?”

“아니. 이대로 복귀할 거야.”

반테온이 알아챈 것이 사실이라면, 가벼운 일이 아니다. 잠시 가서 살펴봐서 해결될 일도 아니고, 가이딩 받았을 델로즈의 상태도 우려된다. 괜한 노파심에 그치면 좋을 테지만, 아니라면 어떻게 하지.

당황하는 재정관을 뒤로하고 움직이는 걸음이 빨라진다. 항시 대기 중인 기사를 호출하여 자동차에 올라탔다. 다급히 경호 인원들이 자리를 채우고 시동이 걸린 차체가 움직였다.

유리창 너머로 휙휙 지나가는 광경을 바라보면서도 머릿속에 남지 않는다. 모든 뇌세포가 가지고 있는 정보의 연결고리를 찾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처음부터 짚어봐야 한다. 갑작스러운 델로즈의 폭주와 마담 레쏘의 약, 누구와도 매칭되지 않았던 현상, 격리 후 내려간 매칭률, 그리고 뒤늦게 발현하여 찾아온 정체를 속인 가이드까지.

펼쳐놓으면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들이지만, 절대 무관하지 않다는 예감이 머릿속을 점령했다. 반테온의 예상이 옳다면 지금 델로즈의 상태는 절대 정상이 아닐 것이다. 상대가 노리는 게 무엇인지 몰라도 지금 그걸 알 수 있는 건 반테온밖에 없었다.

“속도를 올려.”

차체 앞쪽에 있는 모터가 조용히 증폭된다. 점차 창밖 풍경이 빠르게 흘러가는 걸 눈도 감지 않고 노려봤다.

***

오랜만에 돌아온 센터는 그전과 그대로였다. 아니, 그전과 같아 보이지만 뭔가 달랐다. 아무리 수도 복구를 위해 자리를 비운 인원이 많다고 해도 평소보다 과하게 조용했다.

아니, 사람 수는 그대로였다. 반테온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그대로고 자신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똑같았다. 이상한 건 사람이 아니다. 센터 주변 풍경을 돌아보자 어딘가 삭막한 공기가 흘렀다.

주변을 살펴봐도 눈에 보이는 풍경은 그대로다. 발걸음을 멈추고 고요해진 복도 가운데 서자 이질감을 깨달았다. 센터 곳곳에 조성된 공원에선 언제나 작은 새소리나 바스락거리는 풀잎 소리가 들렸다. 지금은 고요하다. 물소리조차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바람이 사라진 것처럼 정적이 흘렀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 아니다. 언젠가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 있었다. 언젠가 야센에서 돌아오던 밤이었다. 이슬에 젖은 흙을 밟으며 걷던 길이 딱 이런 느낌이었다. 그날 밤 반테온이 무엇을 봤던가. 온통 붉어진 세상과 그사이에 누워있던 폭주 직전의 델로즈를 만났지.

“잠깐.”

옆에 서 있던 사람을 아무나 불러 세웠다. 몸을 떨며 놀라는 사람을 향해 상냥하게 웃었다.

“혹시 델로즈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어… 그… 그분이라면… 평소엔 도서관에 계실 텐데… 그 제, 제게 어떤….”

“감사합니다.”

말을 더듬으며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가려는 사람을 외면하고 그대로 도서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전처럼 사람 적은 구석에 앉아있겠지. 서둘러 발을 재촉하여 도서관이 눈에 보이는 거리까지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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