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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급 에스퍼를 피하는 방법 (84)화 (84/112)

#84

본관 건물에서 살짝 떨어진 도서관을 멀리서 보자마자 헛웃음이 터진다. 광성 도서관 다음으로 크기가 큰 센터 도서관은, 태양에 비치면 성스럽게 반짝이는 하얀 기둥이 자랑이었다.

이렇게 붉게 빛나는 건물이 절대 아니란 말이다.

멀리서 봐도 건물 전체가 벌겋게 보일 정도로, 불타는 것처럼 붉다. 왜 아무도 이걸 모르고 있는 거지? 이 정도 기운이라면 눈에 보이지 않는 자들도 익사할 것처럼 갑갑함을 느낄 텐데. 어떻게 이 지경이 되도록 조처하지 않은 것일까.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저 안에는 예전처럼 폭주 직전의 델로즈가 있을 것이다. 반테온이 간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그의 상태는 매번 볼 때마다 달라져 있었다. 떨어진 2주 동안 매칭률이 어떻게 바뀌었을지도 알 수 없고, 지금 이성이 있는 상태란 확신도 할 수 없다.

풀숲에 쓰러진 델로즈를 봤을 때보다 심각한 상황이니 정신이 없을 확률이 높겠지. 센터 정 중앙에서 폭주 전조 현상이라. 민폐도 이런 민폐가 따로 없다. 반테온은 미리 준비한 차단제 세 알을 털어 마른 입 안에 넣었다. 물도 없이 천천히 씹는다.

가이딩 효율은 낮아지지만, 이렇게 되면 폭주하는 델로즈의 기운에 휩쓸려 정신을 잃는 일은 없을 것이다. 조금 더 오래 가이딩 해야 하는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지금 상황에서 제어를 잃으면 목숨이 위험하다.

도서관과 가까워지며 주변을 살폈지만, 아무도 없었다. 센터 본관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은 것과 대비되는 현상이다. 센터 본관에선 느끼지 못해도 직접 델로즈의 기운이 닿는 곳은 본능적으로 피하는 것이다. 센터엔 에스퍼뿐만 아니라 일반인과 다름없는 가이드와 비발현자 고용인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까지 접근을 꺼릴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붉은 창문, 붉은 대리석 바닥을 디디며 조금 더 짙은 빨강을 향해 걸었다. 어느 정도 가까워진 걸까. 이제 붉다 못해 자줏빛으로 덩어리처럼 일렁이는 공간 가운데 새까만 흑발과 광포하게 번뜩이는 금안이 보였다.

다행히 정신을 차리고 있었군.

“델로즈.”

이름을 부르자 정면을 초점 없이 응시하던 눈동자가 조금씩 움직였다. 느려진 공기의 흐름만큼 천천히 방향을 헤매더니 반테온을 향했다.

“이건 제법 그럴듯한데?”

환상이라 치부하는 말에 고개를 내저었다. 눈만 뜨고 있을 뿐, 이미 정신은 헛걸 보고 있다. 이대로 시야가 잠기면 폭주로 번지겠지. 오로지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는 상태였다.

“내 말 들려? 지금 가까이 갈 건데 가만히 있어야 해.”

차단제를 먹어서 큰 문제는 없겠지만,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최대한 주도권을 자신이 쥐는 것이 좋다. 그 말을 들은 델로즈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눈만 깜박인다.

“가까이 온다고? 네가 나에게?”

“그래.”

“……왜?”

그리 어려운 말을 한 것 같진 않은데, 델로즈는 눈살을 찌푸리며 서 있는 반테온을 바라봤다. 그 시선이 낯설어 움직이지 않자 이내 델로즈가 자신의 눈썹을 늘어트렸다.

“역시 다가올 리 없지. 넌 날 싫어하잖아.”

정신이 없는 건 확실하다. 기운이 빠진 델로즈의 모습은 여러 번 봤지만, 저렇게 울 것 같은 표정은 처음이었다. 자존심 없이 저돌적으로 다가올 때도 저런 표정은 짓지 않았다.

“싫어하는 건 아냐.”

“그럼 왜 말도 없이 도망갔을까.”

“도망간 것도 아니야.”

“텅 빈 네 침대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넌 모를 거다.”

반테온의 말을 듣지도 않고 자신의 말만 중얼거린다. 어떻게 된 건지 파악한 반테온은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다. 저 까맣고 위협적인 머리통으로 열심히 아래로 파고 들어가 있었다.

“약 기운에 나와 그런 걸 후회하고 있겠지. 다시 보기도 싫을 정도로.”

델로즈 입장에선, 하룻밤 보낸 상대가 아무 말 없이 갑자기 사라졌다. 찾지 않기에 센터장이 잘 정리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줄이야.

“그래서 연락 안 한 거야? 이렇게 될 때까지?”

“싫다고 도망간 사람을 불러서 뭐라고 하지? 살려달라고? 그렇게 애원해서 내 곁에 있어 줄 거라면 벌써 수백 번도 그랬을 거다.”

“그렇다고 폭주하도록 내버려 둘 리 없잖아.”

“그렇겠지. 넌 상냥하니까.”

언제는 매정하다더니 이제는 상냥하다고 말한다. 앞뒤가 맞지 않는 말에 한숨을 쉬었다. 정신이 없는 이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려고 한 제 잘못이다.

델로즈와 두서없는 말을 나누면서도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섣불리 닿을 생각은 없다. 델로즈가 반테온의 존재를 자각한 순간부터 사방으로 퍼지던 붉은 기운이 반테온 쪽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조용히 그 기운을 중화시키며 천천히 시간을 들인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닿지 않고 천천히 기운을 흔들어 중화했다. 효율이 떨어지다 못해 바닥에 버리는 수준이지만 닿는 것보단 나았다.

다행히 아직 힘들거나 어지러운 증상은 없었다. 시간을 끌면서 천천히 진행해야 한다. 차단제 덕에 폭주하는 기운 가운데서도 정신을 차리고 있지만, 그만큼 효율은 떨어진다. 마지막에는 결국 접촉해야 하더라도 정신이 돌아올 때까지는 멀리서 시간을 끌어야 했다.

대화는 그사이 델로즈가 정신을 놓지 않도록 하는 수단이다. 느린 가이딩보다 폭주하는 속도가 더 빨라지면 의미 없다는 걸 알기에 계속 말을 걸어야 했다.

“내가 상냥해?”

“그래. 나에게만 매정하지, 다른 사람에겐 언제나 상냥해.”

그건 대외용 미소라는 거다. 굳이 델로즈에게 내세울 필요가 없으니 원래 성격대로 대할 뿐, 반테온의 본성은 다정함, 상냥함, 배려 깊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호감을 끌어내기 위해 학습한 태도일 뿐이다.

“네게도 상냥했으면 좋겠어?”

“……아니.”

머뭇거리다 대답이 돌아온다. 자신에게만 매정하다 따지더니 이제는 원치 않는다고 말한다. 금색의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이내 가라앉았다.

“그냥 이대로가 좋아…… 아니면 참기 힘들 테니까.”

“뭘 참고 있는데. 전처럼 가둬두고 싶은걸? 다른 에스퍼에게 보이지 않도록?”

자줏빛 덩어리 같던 붉은 기운이 물에 탄 듯 흐려진다. 더 가까이 가는 건 무리다. 옆에 놓인 의자를 꺼내어 앉았다. 슬슬 농도 높은 기운에 정신이 흔들렸다.

“……그래. 그것도 있었지. 괜찮아. 그건 참을 수 있어.”

“진짜 참기 힘든 건 뭐야?”

델로즈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혼탁하게 일렁이던 금안이 빛을 받은 듯 반짝인다. 붉은 기운을 뚫고 바르게 직시하는 시선이 강렬하다. 반테온을 보고 입을 꾹 물더니 천천히 열렸다.

“넌 진짜로군.”

“…….”

정신을 차린 건 고마운데, 정작 중요한 이야기를 듣지 못한 찝찝함이 남았다. 왜 하필 이 타이밍에 정신이 돌아온 걸까.

“환상 속의 네가 이런 질문 할 리가 없지. 항상 내 욕심을 다 아는 듯 다가와서 닿기 직전에 사라지거든. 꿈속에서도 사람 미치게 만들어.”

“참 미안하네.”

자신이 한 행동은 아니지만, 힘들었다니 사과 정도야 힘든 일도 아니다. 속마음 하나 섞이지 않은 말을 하며 어깨를 으쓱이자 델로즈가 빳빳하게 굳은 목을 돌려 풀었다.

“상태가 왜 이래? 새로운 가이드와 매칭률 나쁘지 않았잖아.”

“맞아. 너 그 가이드…….”

이제야 떠오른 듯 이를 악물고 으르릉거린다. 델로즈가 벽에 기댔던 몸을 거칠게 일으켰다. 비틀거리는 다리를 움직이며 이내 빠르게 걸어온다. 잠시 돌아왔던 금안이 다시 흐려진다. 다시 이성을 잃고 일렁이는 기운이 드세게 흘렀다.

“내게 그딴 가이드를 붙이고 달아나?”

“잠깐만 다가오지 마.”

“내가 왜 그 말을 들어야 하지? 그러면 또 도망갈 텐데.”

“멈춰!”

점차 간격이 줄어든다. 제대로 만류하기도 전에 델로즈가 손으로 반테온을 잡아당겼다. 머릿속이 핑글 돌았다. 진해진 농도의 기운 때문에 순간적으로 비틀거리며 넓은 가슴팍 위로 쓰러졌다.

“도망가지 마.”

“지금 닿으면 안 돼. 진정해.”

“조금만, 조금만 만지게 해줘. 그 정돈 괜찮잖아….”

잠시면 되니까. 잠시만. 델로즈는 중얼거리며 반테온의 머리에 고개를 내렸다. 머리카락 위에 비비던 뺨이 내려온다. 양손으로 반테온의 창백한 뺨을 잡고 파고들 듯 입 안을 침범했다.

“너… 으….”

점막을 훑으며 거칠게 비비는 입술이 거칠었다. 벗어나지 못하게 상체를 꽉 끌어안고 숨이 막히도록 입 안을 쪼았다.

“왜 가이딩이…….”

낮게 한탄이 쏟아진다. 차단제를 먹은 가이드는 물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수도꼭지처럼 감질나게 가이딩이 진행된다. 그 사실을 모르는 델로즈는 충족되지 않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숨이 막히도록 키스하면서 등에 닿은 손을 움직였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접촉하기 위한 본능적인 행동이다. 재킷 안에 손을 넣고 바지 안에 들어간 셔츠를 잡아당긴다. 드러난 등판 위를 맨손으로 쓸었다. 온기가 척추에 닿자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노골적으로 성적인 의미를 담은 손길에 어깨가 떨렸다.

“이거 놓…으라고 해도 안 들리겠지. 하…….”

차단제를 먹은 탓에 정신을 잃진 않아도, 문제는 멀쩡한 상태로 델로즈의 행동을 받아내야 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죽든 말든 차단제 따위 먹지 말고 가이딩이나 빨리 끝내버릴걸. 말도 안 되는 후회를 하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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