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그래 마음대로 해라.
어차피 정신을 차리기 전까진 반항해도 놓지 않을 것 같으니 잠시만 참자.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 직접적인 접촉을 하면 효율은 높으니까. 점점 농밀하게 척추를 따라 쓸어내리는 손길에 작게 숨을 내쉬었다. 견디기만 하자. 그래도 폭주해서 센터가 폭파되는 것보단 나으니까라는 생각은 허리띠 버클을 잡는 델로즈의 행동에 산산조각이 났다.
“미쳤어? 여기 밖이야!”
“…….”
까만 머리채를 밀었다. 꿈쩍도 하지 않는 머리통에 모골이 송연하다. 아무도 없다고 해도 여긴 도서관이다. 모든 센터 사람들이 사용하는 공공시설에서 설마.
“…….”
델로즈는 셔츠를 빼자 드러난 반테온의 복근을 입술로 쓸다가 배꼽에 혀를 넣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헉 하는 신음이 절로 튀어나온다.
“제발 정신 차리자. 응?”
이제 반테온이 애원하고 싶은 심정이다. 폭주를 막기 위해 접촉할 거란 각오는 했어도 이건 아니다. 도서관에서 사고를 치다니. 이건 각오를 넘어 살면서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일이다.
이성이 사라진 델로즈는 버클을 푸는 것이 어려운지 손가락 끝으로 바스락거리며 허리띠를 잡아당긴다. 두꺼운 가죽이 껌처럼 늘어나는 모습에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건 정말 쓰고 싶지 않은 방법이었는데.
반테온은 재킷 어깨에 달린 견장을 뗐다. 날카로운 부위를 잡고 힘을 줘 팔뚝 안쪽 연한 살을 강하게 눌러 그었다. 찢기는 고통과 함께 가늘게 실선처럼 새어 나오던 피가 손목을 타고 흘렀다.
피가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델로즈의 턱을 잡고 그의 입술에 팔뚝을 거칠게 비볐다. 핏물이 입 속에 들어가도록 가져다 대고 주먹을 쥐었다.
가이딩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다. 가까이에만 머물러도 미약한 효과가 있고, 가장 흔한 방법은 표피 접촉과 점막 접촉이다. 주로 손을 잡거나 키스, 성관계로 이뤄지는 가이딩이었다.
그리고 뒤늦게 밝혀진 방법이 있었다. 가이드의 피를 섭취하여 기운을 가라앉히는 방법이었다. 야만적인 방법이라 직접 쓰이진 않고 위험 지역이나 가이드를 대동할 수 없는 곳에 파견 갈 때 가이드의 피를 정제하여 만든 약물을 사용했다.
피를 직접 먹이는 건 효과가 빠르고 큰 동시에 가이드로선 반갑지 않은 일이다. 상처가 나는 것도 그렇고…….
“…….”
델로즈의 눈에 천천히 이지가 돌아온다. 멍하니 깜박이며 돌아오는 정신을 수습하는 모습을 보며 구역질 나는 숨을 삼켰다. 가이드의 피를 먹은 기운이 순식간에 반테온에게 몰려들었다. 붉은색 덩어리가 상처 주변으로 몰려든다. 피 냄새에 끌리는 피라냐 떼처럼 몸속으로 쉴 새 없이 들어와 내장을 뒤집어 놓는다.
피를 먹이는 건 반작용이 크다. 점막 접촉보다 더 제어하기 힘들었다. 차단제의 효과도 적다. 델로즈의 정신이 조금 돌아왔기에 할 수 있는 도박이다. 설마 쓰러진 사람을 잡고 계속하진 않겠지.
“으….”
“정신이… 돌아왔나 보네.”
“이건 또 뭐야. 왜 그래?”
피 맛에 멍하니 풀린 동공이 천천히 돌아온다. 품에 안은 반테온의 몸이 축 늘어지자, 놀란 델로즈가 그의 어깨를 받쳤다. 피가 난 반테온의 손목을 꽉 쥔 델로즈의 얼굴이 살벌해졌다. 반테온은 그 얼굴을 손바닥으로 밀었다.
“저리… 꺼져 봐….”
힘 풀린 반테온의 다리가 경련하듯 떨린다. 델로즈가 머뭇거리며 반테온의 몸을 책장에 기댄다. 더 힘들어진 몸뚱이가 바닥에 쓰러졌다.
“가이딩 후유증인가?”
“으…….”
상태를 파악하고 뒤로 물러난 델로즈는 신경질적으로 주먹을 쥐고 기대고 있던 벽을 내리친다. 최대한 자제하고 휘둘렀음에도 벽에서 돌조각이 후두두 떨어졌다.
“화도 못 내게 만들지.”
거칠게 말하면서도 온 사방으로 뻗쳐나가던 붉은 기운이 사그라든다. 반테온의 상태가 자신의 기운 때문이라는 걸 깨닫고 제어하려 애를 썼다. 한 번 날뛰기 시작한 힘을 제어하기 힘든지 델로즈의 이마에도 식은땀이 흘렀다.
그 모습을 동정할 여유가 없다. 마찬가지로 힘든 반테온도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겨우 폭주를 막은 건 좋은데, 이 뒤가 문제다. 턱 아래로 뚝뚝 흐르는 땀을 닦았다.
“많이 힘든 건가?”
“폭주 직전의 에스퍼를 달래는 게 쉬울 리가 없잖아. 조금…… 조금만 쉬자.”
차단제의 효과 덕분일까. 정신이 끊어질 것 같으면서도 가느다란 줄처럼 이어졌다. 델로즈가 사방에 닫혔던 창을 열자 차가운 바람이 쏟아진다. 뺨에 서리게 닿는 온도가 시원하다.
전원이 나갈 것 같은 시야를 붙잡고 조용히 눈을 깜박이자 그 모습을 바라본 델로즈가 중얼거렸다.
“……그럼 전에도 이렇게…….”
“뭐?”
“아무것도 아니야.”
싱겁기는. 무슨 말을 하다가 마는지.
정신을 차린 델로즈에게 물어볼 일이 많았다. 대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센터에서 왜 제어하지 않았는지. 새로운 가이드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한 게 넘치지만 입을 벌리는 순간 고통스러운 곡소리만 나갈 것 같아 애써 참았다.
정신이 돌아온 델로즈는 눈을 꼭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널 만나면 화를 낼 생각이었어. 날 그딴 가이드와 붙여두고 도망가다니 이번엔 정말로 가둬둘 생각이었다.”
가두는 건 참을 만하다고 방금 말했으면서, 혼몽한 중에 한 이야기는 생각나지도 않는지 사납게 중얼거렸다. 그의 주변을 감싸던 붉은 기운은 그래도 많이 가라앉았다. 평소보단 거칠긴 해도 이제 폭주할 위험은 없어 보였다.
델로즈가 가이드 이야기를 하니 센터에 급하게 찾아온 용건이 떠올랐다.
“그 가이드…… 세이라 로클레스는?”
“이제 목숨을 구해놨으니 다시 그 여자에게 보내려고 하는 건가?”
델로즈의 입술이 비스듬히 올라간다. 배알이 꼬인 표정에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농담할 때가 아니야. 센터에 있는 건 본인이 아니야. 진짜 세이라 로클레스가 아니란 말이다.”
“뭐?”
“지금 어디에 있어?”
재차 물으며 몸을 일으켰다. 델로즈가 기운을 갈무리한 덕에 상태가 더 나빠지진 않았지만, 어지러운 머릿속은 그대로다. 비틀거리며 일어나 벽을 짚었다.
지금 사태의 유일한 증인이자 실마리였다. 이미 센터에 잠입을 성공한 순간 센터장도, 다른 사람도 믿으면 안 된다. 힘든 숨을 내쉬며 몸을 세웠다.
“너 쉬어야 해.”
“잡은 뒤에. 그 뒤에 쉴 거야.”
잠시 쉬어서 그런지 힘이 빠진 몸이 조금은 움직일 만해졌다. 델로즈도 기운을 추슬렀으니 더 나빠질 일은 없겠지. 다만 엉망으로 뒤집힌 속이 얼마나 버텨줄지 모르겠다. 약물의 힘으로 이어가는 정신이 끊기기 전에 해결할 수 있는 것부터 처리해야 했다.
옮기는 발걸음이 무겁다. 그사이 장갑과 재킷을 단단히 챙겨 입은 델로즈가 몸을 지탱한다. 마주친 얼굴엔 걱정스러움이 잔뜩 묻어 있었다. 방금 폭주에서 벗어나 힘든 건 마찬가지일 텐데 그런 기색 없이 반테온만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안고 가는 건 싫겠지?”
“싫은 게 아니라 힘들어. 아무리 기운을 눌러도 접촉이 길면 영향받으니까. 먼저 가서 잡고 있어 뒤에 따라갈 테니까. 위치는 어디야?”
“지금쯤 가이드 숙소에 있을 거다.”
효율을 생각하면 델로즈가 먼저 가서 잡아야 했다. 그가 진정된 걸 알고 도망치면 번거로워졌다. 델로즈는 수긍하면서도 내키지 않는 눈빛으로 바라보다 겨우 떨어진다. 앞서 나가서 빠르게 체포해야 함에도 끝까지 시선을 떼지 않고 반테온을 바라보며 천천히 멀어졌다.
“어서 가.”
“…….”
“죽이진 말고.”
혹시나 모를 사태를 경고하니 가볍게 혀를 차고 그제야 돌아섰다. 떨어지는 델로즈의 등을 보며 안주머니를 뒤져 각성제 하나를 더 꺼낸다. 차단제에 각성제라. 섞이면 나중에 머리가 아프겠지만 지금은 희생이 불가피한 상황이니까.
입 안에 씁쓸한 가루가 퍼지고 혓바닥에 달라붙는 알약을 삼키니 몽롱하던 정신이 돌아온다. 헝클어진 재킷을 대충 펴고 먼저 나간 델로즈의 뒤를 따랐다.
성한 곳 없는 머릿속과 다르게 약의 힘을 빌린 기분은 상쾌하다. 세이라 로클레스를 잡는다면 이 모든 사태의 원인과 원흉을 파악할 수 있겠지. 드디어 꼬리를 잡았다 싶은 생각에 무거운 발걸음을 억지로 옮겼다.
***
그러고 보니 가이드 숙소의 어디쯤 머무르는지 제대로 묻지 않았다. 센터의 규모가 커서 가이드들의 수도 많았고, 그만큼 건물도 커다랗다. 답지 않게 어수룩한 짓을 했다고 탓하는 것도 잠시. 반테온은 금방 목적지를 찾았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경비, 경비 요원을 불러 주세요!”
넓은 가이드 숙소 한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물건 깨지는 소리와 비명이 난무하는 쪽을 향해 걸었다. 항상 사건을 몰고 다니는 델로즈가 드물게 도움이 되는구나. 하긴 얌전히 찾아가서 정체가 뭐냐고 묻는 건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 일단 멱살부터 잡고 보겠지.
대낮에 가이드 개인 공간을 쳐들어가는 에스퍼를 내버려 둘 리도 없을 테니 한바탕 난리가 났을 터였다. 천천히 걷는 모습이 복도 한쪽을 채운 유리창에 비친다. 나름 정리를 했어도 평소 반테온의 모습 같지 않게 헝클어진 몰골에 잠시 손을 올렸다가 도로 내렸다.
남에게 보이기 싫은 모습이지만 이런 연출도 필요하니까. 일부러 헝클어진 머리를 내버려 둔 채 둥글게 모여 소란을 구경하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쳤다. 반테온의 모습을 보며 화들짝 놀라던 이들은 이내 낯선 시선으로 바라보고 천천히 뒤쪽으로 물러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