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제, 제게 왜 이러세요. 델로즈 님. 전 아무것도 몰라요. 제가 세이라가 아니라니 갑자기 왜, 왜 그런 말씀을…….”
“그건 네가 제일 잘 알겠지.”
방 안에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덜덜 떠는 한 여성과 거칠게 멱살을 잡은 델로즈의 모습이 보였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보인다. 그래도 여성이라고 다짜고짜 패지는 않았나 보다. 반항하지 못하는 상대에게 해를 끼치는 건 반테온도 원하는 일이 아니었기에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런 때 인사드리게 돼서 아쉽군요. 세이라 로클레스 양. 제가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네, 네 당연히…… 반테온 님이시죠? 델로즈 님의 전 가이딩을 맡으셨던…….”
델로즈의 가이딩을 맡았던 사람이라. 처음 듣는 평가에 웃음이 나왔다. 확실히 귀족으로 살던 사람은 아니었다. 에슬란테의 성을 가진 반테온을 단순히 가이드라 칭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호, 혹시 반테온 님이 제가 세이라가 아니라고 하신 건가요? 델로즈 님의 가이드 자리를 뺏겨서 그러시는 거라면 정말 억울해요.”
“이런 서운합니다. 결혼할 뻔한 상대를 그리 오해하다니요.”
“네?”
눈이 동그랗게 커지는 세이라를 향해 비스듬히 고개를 숙였다. 가까이에서 보니 더 확실해졌다. 저택에서 받은 청혼서의 얼굴과 완전히 다른 얼굴이었다. 분위기는 닮았다고 하나 헷갈릴 수 없을 정도로 확연히 다르다.
“다시 한번 인사드립니다. 로클레스 가문에서 보낸 청혼서는 잘 받았습니다. 직접 보내주신 성의에 인사를 드리려고 왔습니다……만 초상화와는 조금 다르시군요.”
“…….”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요.”
눈을 홉뜬 세이라의 표정이 점점 가늘어진다. 사납게 눈꼬리가 올라간 세이라는 주변을 살피더니 재빠르게 움직여 벽에 등을 붙였다.
“저, 저는 정말로 세이라……어…….”
“초상화 속 초록색 눈이 정말 인상 깊었습니다만, 실제로 보니 푸른색이시군요. 초록이라곤 전혀 없는…….”
“비켜!”
세이라라 주장하던 사칭범이 소리치며 반테온을 밀친다. 가슴을 맞은 반테온이 휘청거리자 사칭범은 그대로 문을 향해 달려나갔다. 상황을 구경하며 벽처럼 가로막은 사람을 밀어냈다. 젊은 여성이라 생각하기 힘든 힘에 구경꾼들이 종잇장처럼 밀려났다. 복도로 탈출하려던 사칭범의 몸이 미끄러지듯 넘어졌다.
“악!”
비명을 지르며 엎어지는 세이라의 몸을 델로즈가 멱살째 잡고 들었다. 목을 잡혀 숨통이 끊길 듯 꺽꺽대며 공중에 들린 발을 내저었다. 안 된다. 저러다가 죽으면…….
“델로즈!”
“안 죽여.”
델로즈는 몸에서 반쯤 힘이 빠진 사칭범을 바닥에 패대기쳤다. 바닥에 넓은 치맛자락이 펼쳐진다. 엉망이 된 긴 머리카락이 하얀 피부를 가렸다. 수상한 사람인 걸 알지만 본능적인 거부감에 인상이 찌푸려진다.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인지 입을 가리며 바라보는 사이에서 매정한 델로즈의 목소리가 나왔다.
“신기한 놈이군. 분명 매칭률은 나올 텐데 닿을수록 기분이 더러워졌단 말이야.”
유일하게 동정심을 가지지 않은 델로즈가 캐물었다.
“속셈이 뭐지?”
“나, 나는 속았어. 분명 알아볼 사람이 없을 거라고…… 아, 아냐 뭐가 잘못됐어. 그분께서 실수하실 리가. 나는…… 나는 그냥 버려진 거야.”
사칭범은 횡설수설하며 바닥을 보고 중얼거렸다. 산발이 된 머리카락이 바닥을 쓸었다. 갈 곳 잃고 흔들리던 사칭범의 시선이 침대 아래를 향했다. 델로즈도 그것을 눈치채고 먼저 걸어 침대를 걷어찼다. 커다란 침대가 굉음을 내며 옆으로 밀려나며 부서지고, 그 아래에서 낡은 가죽 가방이 나왔다. 가방을 거칠게 들어 올리자 바닥을 기던 사칭범의 얼굴에 절망이 깃들었다.
“이게 네 마지막 발악인가.”
가방을 거꾸로 뒤집어 탈탈 털었다. 나오는 것은 많지 않았다. 낡은 수첩과 가죽 펜, 싸구려 가죽에서 나오는 먼지와 실오라기 등. 가방을 찢을 듯이 뒤집자 마지막으로 쨍 소리를 내며 작은 유리병이 떨어졌다. 지금껏 나온 물건과 다르게 고급스러운 세공과 바닥에 부딪혀도 깨지지 않는 단단한 유리병은 온통 붉게 빛나고 있었다.
“이건가 보군.”
“도, 돌려줘! 그건 내 것이야!”
“델로즈. 이리 줘.”
다른 사람 눈에는 저 병이 투명하게 보일 거라 장담한다. 반테온 눈에만 붉게 보이는 액체는 분명 마담 레쏘의 약이다. 여기서 이걸 또 보게 될 줄이야. 델로즈가 반테온 쪽으로 병을 던졌다.
손가락만 한 작은 병이 손에 잡혔다. 매끄럽게 잡히는 느낌에 힘든 몸도 잊고 슬며시 웃었다. 드디어 꼬리를 잡았다. 이 약이 정확히 어떤 역할을 하는지 몰라도 지금부터 파헤쳐보면 되겠지.
“이제 이 녀석만 넘기면 되겠군.”
“정체는 천천히 캐내면 되겠지.”
센터 가장 중심에 있는 가이드 숙소다. 이곳에서 탈출할 방법도 없을 테니 지금부터 천천히 신문하면 된다. 델로즈는 사칭범이 자결하지 못하도록 천을 말아 입 안에 넣고 손을 묶었다. 용병 일을 했다더니 죄인을 다루는 솜씨가 능숙했다.
반테온은 병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원흉인 약도 손에 넣었고, 델로즈의 폭주도 막았다.
몸 상해가면 고생한 보람이 있는 결과였다.
만족스럽게 병을 쥐어 재킷 안주머니에 넣는 순간, 반테온을 바라보던 델로즈의 눈이 커진다. 시선은 등 뒤를 향하고, 머리부터 까맣게 그림자가 덮쳤다.
“죽어!”
“반테온!”
지금까지 군중 사이에 숨어있다가 남자가 돌진했다.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는 반테온의 심장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쇳조각이 조명에 반사되고, 반테온의 몸에 닿기도 전에 강한 힘에 휘둘려 바닥에 처박혔다.
“끅!”
무형의 힘에 눌려서 뼈가 으스러지고 살이 찢기는 징그러운 소리가 들린다. 뒤따라 끄륵 하고 숨넘어가는 소리가 목구멍에서 튀어나왔다. 무자비하게 그 살덩이를 짓누르고 있을 델로즈를 향해 외쳤다.
“죽이면 안 돼. 한패라면 정보를 캐야 해.”
“칼에 닿진 않았지?”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델로즈가 힘을 풀었다.
멀쩡하던 사람이 순식간에 곤죽이 되는 모습은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다. 진절머리를 내며 멀어지는 반테온에게 시선이 아프게 박힌다. 정신을 잃을 만도 한데, 발밑에 찌그러진 남자는 끝까지 살기 어린 시선으로 반테온을 날카롭게 바라본다. 손가락 하나 꿈쩍할 수 없는 상태에서도 집요하게 노려보는 남자 주변에서 붉은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망할 에스퍼.
반테온이 뒷걸음치는 것보다 남자가 눈을 부릅뜨는 것이 빨랐다.
마지막 발악하듯 힘을 방출하는 남자의 붉은 기운이 순식간에 반테온을 덮친다. 평소라면 간지러울 에스퍼의 기운이 이미 한계에 다다른 몸에 쏟아진다. 붉은 기운은 한 곳에 집중되어 움직인다. 아직 아물지 않은 팔뚝 상처가 아려오더니, 근육이 끊어질 듯 아팠다.
이제 정말 못 버티겠다. 범인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정신력으로, 약 기운으로 버티던 얇은 신경 줄이 실처럼 끊어졌다.
“으…….”
반테온의 정신이 멀어지고 몸이 무너지는 와중에 걱정스럽게 달려오는 델로즈의 다급한 움직임이 보였다.
그 광경을 마지막으로 세상이 까맣게 변했다. 커다란 손이 머리를 받쳐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는 감각을 느끼며 그대로 눈을 감았다.
***
요즘 들어 정신을 잃는 일이 많은 것 같다. 손가락으로 멍하니 횟수를 세다가 포기하고 내렸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기절한 횟수를 기억한다고 누가 상을 주는 것도 아닌데.
허탈한 심정으로 낯선 천장을 바라봤다. 의료실일까. 델로즈가 옮기진 못했을 테니 다른 사람의 도움을 청한 것이겠지. 싸한 소독약 냄새와 온통 하얀 벽 사이로 보이는 창문으로 바깥을 살펴보니 층수가 제법 높아 보였다. 불편한 손등에는 얇은 바늘과 링거가 이어져 있었다.
한때는 세상 좋은 운을 다 타고났다고 생각했다. 알고 보면 반테온의 앞길에 이런 일이 예정되었기에 미리 다 쥐여준 걸지도 모르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꼬일 리가 없다. 몸을 일으키려는 팔에 기운 한 톨 남지 않았다.
바스락거리며 움직이자 조금 떨어진 곳에서 힘없이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린다. 의자에 앉아 몸을 숙인 채 고개를 떨군 델로즈의 모습이 보였다. 폭주하는 기운에 괴로워할 때보다 더 초췌한 얼굴에 혀를 찼다. 대체 얼마나 저렇게 있었던 걸까.
“얼마나….”
입을 열자 목구멍이 따가웠다. 건조하게 말라서 들러붙은 감각에 콜록대니 옆에 있던 물병이 천천히 움직이며 잔에 물을 채웠다. 델로즈의 짓이다. 자신의 앞으로 이동된 잔을 잡자 여전히 음울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3일 정도 누워있었다.”
3일이나 가만히 있었으니 당연히 몸이 정상일 수 없다. 뻐근한 어깨를 펴고 상체를 움직였다. 붕대를 감은 팔이 조금 불편할 뿐 다른 곳은 멀쩡하다.
델로즈의 상태도 괜찮아 보였다. 정신을 잃을 때 봤던 모습 그대로 거친 기색은 남아 있으나 이해할 수 있는 범위의 움직임이다.
창백한 델로즈의 얼굴을 보자 여러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사칭범은 어떻게 되었는지, 공범의 정체는 누구인지. 누가 이런 일을 꾸몄고, 마담 레쏘의 약은 제대로 분석 중인지.
갖은 질문 중에 하나가 툭 튀어나왔다.
“넌 왜 그 상태였던 거지?”
“그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