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에스퍼를 피하는 방법 (87)화 (87/112)

#87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센터 중앙에서 철저하게 관리받던 델로즈의 상태가 왜 짧은 시간에 최악으로 돌변했느냔 말이다. 델로즈는 돌아온 질문에 씁쓸하게 웃을 뿐이다.

“매칭 테스트를 하고 나서 꾸준히 관측했을 거 아냐. 센터에선 그 지경이 되도록 내버려 뒀어?”

“기기는 모두 내가 정상이라고 하더군.”

“뭐?”

“그 고물 같은 기계에선 내 상태가 모두 정상으로 떴단 말이다. 머리가 부서지고 미친 것 같이 어지러워도 내 상태는 모두 평균 수치였다. 가이딩도 정상적으로 진행된다고 떴지.”

심상치 않은 이야기에 눈썹이 찌푸려진다. 상식과 다른 일이 너무나도 많이 벌어진다. 새로운 정보들은 다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놀라운 것뿐이다. 복잡한 머리를 짚으며 관자놀이를 눌렀다.

세이라를 사칭한 사람이 가이드라 주장하며 델로즈에게 접근했단 사실을 알았을 땐 센터장을 의심했다. 그러나 델로즈의 상태를 보자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아무리 뛰어나다 하여도, 신분을 속인 사람을 센터에 침투시키고, 매칭률을 조작한다 해도 다른 에스퍼의 눈을 모두 가리는 건 센터장이라 하여도 불가능했다.

미리 알아차린 에스퍼는 아무도 없었다. 오죽하면 델로즈가 폭주하려는 그 순간까지 센터 본관에는 태연하게 에스퍼와 가이드가 섞여 돌아다니고 있었다. 붉은 기운이 자욱한 도서관은 본능적으로 피했는지 몰라도 본관은 평소와 같았다. 마치 두꺼운 필터를 씌운 것처럼.

“아…….”

이런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다. 반테온 눈엔 분명히 보이는 것을 아무도 보지 못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상황. 기분 더럽고 불쾌한 순간이 떠올랐다. 야센에서 만났던 로한이 모든 사람을 조종했을 때, 반테온을 제외하고 모두 즐겁게 지내던 숨 막히던 기억이다. 결국, 이번에도 로한의 짓이다. 그런 짓이 가능한 사람이 둘일 리는 없으니까.

“조사는 어떻게 되고 있지?”

“잘. 센터장이 알아서 할 거다.”

“……왜 그리 성의가 없어.”

본인이 폭주할 뻔했는데 조사도 내팽개치고 저렇게 무관심한 태도라니. 무슨 짓이냔 듯 델로즈를 노려보고 있으니, 시선을 느낀 건지 거뭇한 눈가가 움직였다.

“네가 일어나지 않는데 그딴 게 눈에 보일 리가.”

한숨이 섞여 나오는 한탄에 관자놀이를 짚었다. 씁쓸한 표정으로 반테온을 직시하던 델로즈가 낮은 목소리로 읊었다.

“사칭범과 공범은 구속되었으니 알아서 심문할 테고, 그자들이 가지고 있던 약도 성분 조사에 들어갔다. 이유는 모르지만, 수도에 있는 가게 여럿이 문을 닫았다더군.”

마담 레쏘의 약을 유통한 곳을 뒤엎는 중일 것이다. 처음 델로즈가 폭주하였을 땐, 마담 레쏘의 약물을 사용했다고 의심이 되긴 했지만, 단순히 병만 마담 레쏘의 것을 사용한 것인지, 약물이 마담 레쏘가 만든 것인지 확인할 증거는 없는 상태였다. 이번엔 확실히 꼬리를 잡았다.

야센을 포함하여 관련된 가게들이 다 조사받고 있겠지. 크게 기대되진 않는다. 대부분 야센처럼 제 목을 죌 줄 모르고 어리석게 거래한 가게들일 테니까.

“결국, 잡은 건 사칭범과 공범 둘뿐인가? 분명 다른 사람도… 윽.”

침대에 기댔던 몸을 세우자 뻣뻣한 척추가 비명을 지른다. 숨을 고르자 델로즈가 다급히 다가왔다.

“넌 더 쉬어야 해.”

“침대 아래 각도 조절기가 있을 거야. 오른쪽으로 당겨줘.”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말한 대로 허리를 숙여 침대 아래를 더듬었다. 천천히 침대 등판이 떠올라 적당한 각도가 되자 그곳에 기대어 힘을 풀었다.

“거기 레버에 선이 꼬이면 안 되니까 조심해.”

전선이 침대 다리에 엉키지 않도록 지시하자 델로즈가 의아한 표정으로 허리를 폈다.

“이런 것에 익숙해 보이는군.”

찌푸린 미간 아래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뻔하다. 자주 아팠냐, 이렇게 입원할 일이 자주 있었느냐 묻는 말이다. 아무래도 그의 머릿속에 자신은 툭하면 쓰러지고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기름통처럼 보이는 모양이다.

“부모님이 자주 쓰셨어.”

“유전이라도 있는 건가?”

잘 지내는 집안 자체를 병자로 만들 생각인 건가 싶은 마음에 눈을 흘겼다.

“그런 거 없어. 그저 젊을 때 혹사당한 후유증일 뿐이야.”

“혹사라니. 네 부모님이라면 귀족 아닌가? 후유증을 앓을 정도로 혹사를 당할 이유가 없잖아.”

길게 캐묻는 말에 고개를 젖혔다. 개인 침실에 있는 침대와 비교되지 않을 딱딱한 감촉이 뒤통수에 닿는다. 사사로운 개인사를 구구절절 털어놓기 싫어 짧게 말했는데, 델로즈는 쉽게 넘어갈 기색이 없었다.

귀족이라면 모두 아는 에슬란테의 전 가주 이야기다. 굳이 숨길 필요도 없었다.

“한쪽은 평민이셨거든. 가이딩 후유증이지. 뭐.”

“가이딩? 가이딩 때문에 죽을 수도 있는 건가?”

반테온의 말에 충격받은 듯 델로즈의 눈동자가 커진다. 응시하는 시선이 따갑다.

“센터에선 대체 뭘 한 거지? 몸이 상하도록 내버려 두다니 무책임한 것 아닌가.”

“가이드 인권 보호법이 나온 건 몇 년 되지 않았으니까. 그땐 그런 시스템이 없었거든.”

그 법이 제정된 것도 에슬란테의 영향이 컸다. 에슬란테의 안주인이 가이딩 후유증으로 사망하면서 법이 발의되었고, 그 뒤에 후계자로 지목된 반테온이 가이드로 발현하면서 지금 수준으로 강화되었다.

그전까지 가이드는 에스퍼의 부속품처럼 취급되었다. 특히 평민 가이드는 소모품처럼 다뤄졌다. 지금도 그렇지만 가이드 숫자는 항상 부족하였고, 평민 가이드는 평생 여러 에스퍼 사이를 맴돌다가 요절하는 경우가 다수였다.

“…….”

무언가 생각이 많아진 델로즈는 조용히 말을 아끼며 생각에 잠겼다. 뭐, 지금 생각하면 야만적이기 그지없었다. 가이드의 인권을 챙기면서도 충분히 센터는 안정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덩달아 에스퍼의 능력도 혹사하지 않는 방향으로 임무 사이에 필수적으로 휴식기를 넣어 유지하고 있다. 양쪽에게 좋은 변화였다.

“지금 부모님은 괜찮아지신 건가?”

“음…….”

남의 부모님 이야기를 심각한 얼굴로 물어온다. 낮게 가라앉은 금색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 것도 이상하다. 어차피 세상 사람이 다 아는 이야기였다. 델로즈가 모른다는 일이 새삼스러울 정도로 유명한 일이기에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다.

“돌아가셨어. 두 분 다.”

“뭐?”

“가이드였던 어머니는 후유증을 이기지 못해 돌아가시고, 에스퍼였던 아버지도 뒤따라가셨지. 유명한 이야기야.”

“…….”

델로즈의 눈썹이 찌푸려진다. 꽉 다물린 입술을 초조하게 깨물더니 손가락으로 쓸었다.

“미안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괜찮아. 벌써 15년도 넘은 일이니까.”

명복을 빌기에도 오래된 일이다. 괜찮다 위로해도 델로즈의 안색은 더 어두워졌다. 고개를 숙이고 ‘15년 이상’이라고 작게 중얼거린다. 너무 젊어서 돌아가신 것에 충격받은 것일까.

조용히 유지되는 침묵이 이어졌다. 고개를 숙인 채 고민에 빠진 델로즈의 매끈한 흑발이 보인다. 무슨 고민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혼자 있는 공간에서 해줬으면 좋겠다.

“의료진은? 슬슬 내 침실로 이동하고 싶은데.”

“방금 일어났잖아. 지금은 의료실이 나을 거다.”

“방이 더 편해.”

델로즈의 얼굴은 침울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잠시라도 의료실을 떠나면 쓰러질 사람 보는 듯한 표정이다.

“방엔 혼자 내버려 둘 수 없어”

“그러니 더 쉬기 좋지.”

“상태가 나빠지면 어떡하려고 그러는 거지?”

가이딩 후 탈진해서 쓰러진 것이지 어딘가 아픈 것이 아니다. 시간을 들여 푹 쉬면 나을 테니 똑같이 누워있을 거라면 방이 편했다. 그걸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고집을 피운다. 피곤한 몸이 진지한 생각을 거부했다.

“그렇게 걱정이면 네가 와서 보든가. 뭐라고 해도 난 방으로 돌아갈 거야.”

“그거 괜찮군.”

대충 팔을 내저으며 한 말에 델로즈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숨 쉴 틈도 없이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돌변한 태도에 흐릿한 머리가 돌아간다. 방금 내가 뭐라고 말했더라. 깨닫기도 전 델로즈가 몸을 일으켰다.

“이걸 이동하면 되는 건가? 내가 옮겨주지.”

“잠, 잠깐만.”

침대째 들어 올리려는 행동을 만류했다. 적극적인 것도 정도가 있지, 침대가 움직일 때마다 비명을 지르며 움직이는 전선을 잡았다.

“고장 났잖아.”

무식하게 힘만 세서는 그 짧은 시간 침대 지렛대가 흔들리도록 구부려 놨다. 골판지처럼 주름진 매트 위에서 고개를 내저으며 몸을 일으킨다. 서둘러 부축하려는 델로즈에게 이야기했다.

“더 망가트리지 말고 의료진이나 데려와. 퇴원해야 하니까.”

“알았다.”

순순히 긍정하며 뒤돌아서는 델로즈의 등 뒤로 잘 눌렀던 붉은 기운이 슬며시 흘러나와 물결친다. 일정하게 리듬을 타듯 움직이는 동선에 기가 막힌다. 어지간히 기분이 좋은가 보네.

겨우 잡은 꼬리도 헛물켜게 된 상황에서 저런 반응을 보니 긴장이 풀린다. 일단은 쉬자. 반테온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이제 남은 건 센터에서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냐에 달려 있다.

조금 전 기분 좋게 일렁이던 붉은 기운이 눈앞을 아른거린다. 이 심각한 순간에도 웃음이 나오다니, 멍청이와 함께 다녔더니 한심함이 옮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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