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전대미문의 사건에 센터는 발칵 뒤집혔다. 신분 위장, 그것도 왕국에서 이름난 가문으로 속여 말하여 센터에 잠입하였고, 아무런 제약 없이 SS급 에스퍼 옆에 붙어 수상한 약물을 투입했다. 철옹성을 자랑하던 센터의 보안 시설이 얇은 기름종이처럼 뚫린 것이다.
센터장은 엄격한 검사를 하리라 전면에 나서 선언하였다.
센터 주요 의원들이 모두 끌려 나와 며칠을 밤을 새우며 뒷조사에 착수했다. 그사이 얼굴이 폭삭 늙은 센터장이 반테온의 서재를 여러 번 찾아왔다. 평소엔 센터장실로 부를 분이 부지런히 오가는 걸 보면 급하긴 급한 모양이다 생각들뿐이다.
사칭범은 핏줄이 끊겨 가는 변방 귀족의 사생아로 밝혀졌다. 자세한 조사는 아직 조사하고 있지만, 중얼거리는 헛소리로는 SS급 에스퍼와 매칭 해 줄 테니, 그를 잡아 가문을 다시 세우면 된다는 말에 협조했다고 한다.
그러곤 자신에게 위장 신분을 준 자를 ‘그분’이라 부르면서 절대자를 칭하듯 맹목적인 신뢰를 보여주었다고 했다. 센터장의 장담대로 엄격한 조사를 받은 사칭범은 며칠간 더 헛소리 같은 허황한 사실을 중얼거리더니 완전히 실성한 사람처럼 정신을 놓았다고 했다.
반테온을 찌르려던 자는 센터 연구실 소속 직원이었다. SS급을 연구하고 싶어 독단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말하였다. 폭주 직전의 수치가 뜰 때까지 기기의 수치를 조작한 것도 본인이고, 사칭범의 신분을 조작해 센터에 잠입시킨 것도 본인이라 고백하였다.
덩달아 델로즈의 첫 번째 폭주도 자신이 주도하여 저질렀다고 고백했다.
세상을 뒤엎을 충격적인 발언이지만, 아쉽게도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 연구원 뒤에 반드시 거대한 배후가 존재할 것이라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뒤집힌 곳은 센터만이 아니었다.
마담 레쏘의 약을 유통하던 가게들, 야센을 중심으로 다섯 군데의 매장이 문을 닫고 전수 조사에 들어갔다. 운영진부터 후원하던 가문까지 모두 엎었음에도 마담 레쏘에 관한 어떤 자료도 얻지 못했다.
모든 사건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그나마 남은 희망이라면 사칭범과 함께 들어온 시종의 정체였다.
세이라 양의 사칭범과 함께 들어온 시종으로 사건이 일어난 날부터 실종 상태였다. 수배령이 내려진 상태이나 그자의 외형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증언이 모두 다르기에 잡을 방법은 요원하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 시종의 정체를 여러 방면으로 의심하는 중이나 반테온은 듣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자가 로한이다. 사칭범의 곁에 붙어 센터에 몰래 들어온 것이겠지.
‘그걸 아는 건 또 나뿐이네.’
사건의 규모에 비해 보잘것없는 결과였다. 이제야 꼬리를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다 뽑힌 깃털 조각만 손에 쥔 기분이다.
푹신한 침대에 등을 기대어 누웠다. 일주일 동안 쉰 몸은 서서히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따뜻한 차를 마시려는데, 탁상에 올려진 단말기가 울렸다. 센터 외부에서 연락이 올 때 울리는 신호음에 몸을 일으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형님. 드디어 통화했네. 이번에 센터를 구했다면서? 뭐 영웅이 되었다던데?]
“……전화했으면 먼저 안부를 묻고 인사를 한 후에 용건을 이야기하는 거란다. 동생아.”
[아니, 우리 사이에 무슨 인사를 해. 지금이라도 할까? 통화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영웅이시여. 부디 미천한 소인과 대화하여 주시옵소서.]
분명 같은 배에서 태어나 같은 환경에서 자랐는데 왜 이렇게 다른 걸까. 동생을 챙기지 못한 제 잘못인가 생각이 들다가도 겨우 4살 어린 동생의 성장 배경까지 책임지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무슨 일로 바쁜 몸이 전화하셨을까?”
[에이. 왕립 에스퍼 센터를 수호하는 형님보다 바쁠 리가 있나.]
“농담은 그만하고.”
[하하하. 아니 정말로 안부 인사야. 수도에 큰일이 있었잖아. 몸은 괜찮아?]
장난스러운 말투에 섞인 걱정에 슬며시 웃었다. 몇 년에 겨우 한 번씩 얼굴을 보는 사이인데, 그래도 핏줄이라고 반테온이 걱정되어 전화하는 기특한 짓도 했다.
“괜찮아. 쉬면 괜찮아지는 증상이니까.”
[그래도 조심해. 알잖아. 우리 부모님을 생각해서라도 무리하지 마. 그러다가 훅 간다?]
“넌 그게 걱정이야? 저주야?”
[당연히 걱정이지. 형님도 알잖아. 내가 워낙 말을 곱게 하는 법을 못 배워서.]
능글맞게 말하는 동생의 태도에 이마를 짚었다.
“베이론 에슬란테.”
[왜?]
“매번 이야기하지만 우린 같은 환경에서 같은 교육을 받았단다? 올바른 화법을 구사하는 법은 태어났을 때부터 질리도록 배웠어.”
[하하하, 그랬……나?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안 나네. 너무 어릴 때 배워서 그래. 20년 전에 배운 게 지금까지 기억날 리 없잖아.]
기억 안 나는 게 아니라, 가르치는 걸 깡그리 무시하고 자란 거겠지. 가정교사였던 체린 부인이 알게 된다면 머리를 싸매고 쓰러질 말이었다. 이미 고령이시니 추가로 걱정거리를 알려드릴 계획은 없지만 말이다.
[형님 반응을 보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보이네. 요즘 놀랄만한 소식만 들려서 내 심장이 멀쩡하게 남아나질 않는단 말이야.]
“자기 가이드 외엔 관심도 없는 놈이 무슨. 말이라도 그렇게 해줘서 고맙네.”
[아, 당연히 우리 자기를 향한 관심과는 다르지. 만약 우리 자기가 날 가이딩 하다 쓰러지는 일이 생겼다면 이미 내가 목매고 죽었어.]
“넌 목매도 안 죽잖아.”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러고 보니 형님 에스퍼는 멀쩡해? 아마 속이 말이 아닐 텐데.]
델로즈의 상태라. 확실히 처음 눈을 떴을 때 멀쩡해 보이진 않았다. 수척한 안색에 눈 아래가 거뭇한 것이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한 몰골이었지. 그도 폭주에서 갓 벗어난 상태이니 휴식이 필요할 텐데 기어코 반테온의 옆을 지켰다.
방으로 돌아온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불안하면 찾아오라고 했던 빈말에 진심으로 출근 도장을 찍어가며 찾아오고 있었다. 별다른 행동도 하지 않고 조용히 기대어 눈을 감고 쉬거나 반테온을 지켜보는 것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지겹지 않은지 며칠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원칙대로라면 델로즈도 폭주의 후유증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기에 원래는 별도로 격리되어야 했다. 기운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반테온 옆에 있으면 어쩔 수 없이 영향을 받을 것이고, 반테온의 회복도 느려질 터라 의료진도 만류했었다.
델로즈는 기어코 차단제를 한 움큼 챙겨 먹으면서 반테온 옆에 고집스럽게 남았다. 가이딩 효율만 떨어지는 가이드와 다르게, 약을 먹은 에스퍼는 귀 한쪽, 눈 한쪽이 막힌 것처럼 갑갑한 기분이라고 들었다. 힘들 게 뻔한데도 뭐가 그리 좋은지 평온한 얼굴로 옆에서 하루를 보내다 사라졌다.
그리 고집을 피우느냐고 마음대로 하라는 심정으로 내버려 뒀다. 지치면 그만두리라 생각하고 내버려 둔 것도 벌써 일주일. 원래 말수가 적은 상대다 보니, 생각보다 신경 쓸 일도 없고, 종종 부려 먹기 편하기도 했다.
이젠 옆에 붙은 석상처럼 취급하면서 심부름을 시키는 경지에 도달했다.
[지금 옆에 없어?]
“잠시 간식 챙기겠다고 나갔어.”
[완전 시종이 따로 없네. 온종일 옆에 있지?]
“잘 시간엔 잠시 나가긴 하는데. 음, 좀 지겨울 지경이야.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옆에서 보고만 있거든.”
[오호, 하긴 보기만 해도 좋을 때지. 형님 상대도 참 노골적이야.]
“그런 거 아니야.”
베이론은 델로즈를 직접 보지 못했으니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이다. 만약 델로즈가 반테온을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보거나, 물론 그래도 기분 나쁘겠지만. 아니면 욕망하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면 당장 쫓아 보냈을 것이다.
델로즈는 그저 무언가 감상하듯 지긋한 시선으로 반테온의 움직임을 따라올 뿐이다. 동생이 이야기하듯 좋아 죽겠다는 느낌으로 보는 건 확실히 아니었다. 그보다는 언제 녹을지 모르는 눈사람을 살피는 느낌이랄까.
[나랑 통화할 때마다 반 죽어 가는 목소리로 받던데. 잘 좀 해줘]
“……네가 델로즈와 통화할 일이 뭐가 있어?”
[몰랐어? 형님에게 연락할 때마다 대신 받아서 형은 쉬는 중이다. 피곤하다 하면서 몇 번 통화했는데. 어. 전달도 안 해줬어?]
“그런 적…… 없어.”
[와, 설마 내가 동생인데 일주일 동안 전화 한 통을 안 했으려고! 난 꾸준히 했어. 매일 했단 말이야.]
반테온의 말에 베이론은 억울해하며 소리를 높였다.
3일간 의식이 없었다고 하여도 벌써 방으로 돌아와 요양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하나뿐인 피붙이의 반응이라기엔 너무 늦었단 생각도 했었다. 워낙 무심한 녀석이라 그러려니 했는데…….
델로즈가 고의로 반테온에게 온 연락을 숨겼다면 그리 기쁘지 않은 행동이다.
반테온은 몸이 아픈 사이 단말기를 잘 확인하지 못했다. 곁에 항상 있던 델로즈가 손을 대는 건 쉬운 일이었을 테지.
[형님? 형님 내 목소리 들려?]
“잘 들려.”
[답이 없어서 놀랐네. 갑자기 기절하거나 그러지 마.]
“몸은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베이론 나 급한 일이 생겨서 그런데 다음에 통화하자.”
단말기 너머로 무언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걸 무시하고 통화를 끊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찬물을 맞은 것처럼 머리가 차가워졌다. 델로즈가 얌전히 반테온에게 맞추어 행동하였기에 잠시 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