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에스퍼를 피하는 방법 (89)화 (89/112)

#89

원래 그렇게 믿을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손톱을 숨긴 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항상 경계해야 했는데. 멋대로 방어를 풀어버렸다.

몰래 자신의 단말기를 쥐고 주변의 연락을 차단하면서 방에서 치료받게 했단 말이지. 구속과 다를 것 없는 행위이자 반테온이 가장 싫어하는 행동이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밖에 나간 델로즈를 찾아야 할까. 찾으면 어떻게 따져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슬리퍼를 벗고 외출복으로 갈아입는 손은 멈추지 않고 움직였다.

***

복도는 한적했다. 천천히 기울어가는 태양이 창을 타고 길게 늘어지고, 주황빛으로 물든 바닥을 밟으며 천천히 거닐었다. 삼삼오오 몰려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만 드문드문 보이는 평화로운 시간이다.

반테온은 이 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그림자까지 주황빛으로 묻히는 순간엔 에스퍼도 가이드도 비발현자도 모두 같은 색으로 보인다.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이상한 현상을 거부하며 고민하던 어린 시절에도 이 시간에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조용히 외진 복도를 걷던 중, 사람의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복도 끝 코너 반대편에서 울리는 소리였다. 젊은 여자의 목소리와 뒤이어지는 적막. 조용한 복도에 작게 혀 차는 소리가 울렸다.

“……게도 기회를 주세요.”

애절하게 매달리는 소리에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딱 한 번 만나주는 것도 안 돼요?”

저렇게 절절한데 대답 한 번은 해주지 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상황에 고개를 저었다. 불쌍하게도 상대는 그런 배려심 따윈 없는 야만인이다.

여자의 것으로 보이는 긴 머리의 키가 작은 그림자. 그리고 맞은편에 미동 없이 서 있는 크고 건장한 그림자. 가이드 숙소 방문을 허가받은 에스퍼 수는 그리 많지 않았고, 그중 저렇게 큰 체구의 에스퍼는 단 한 명을 빼고 찾기 힘들었다. 색이 다를 리 없는 그림자가 유독 까맣게 보인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건 잘 알 텐데. 다른 가이드는 필요 없어.”

“꼭 상대가 가이딩을 위해 필요한 건 아니잖아요.”

반테온은 천천히 팔짱을 끼고 팔뚝을 톡톡 두드렸다. 이해 못 할 상황은 아니다. 델로즈가 여자만 만날 거라 못 박아 둔 사실은 센터 전체에 유명한 이야기였고, 가이드가 아닌 연인의 자리를 노리는 사람이 나타나는 건 당연하다.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날 것이다.

평소라면 델로즈는 반테온이 가까이 있는 걸 기민하게 알아챘겠지만, 억제제와 차단제를 복용한 상태라 그런지 주변에 사람이 있는 걸 모르는 듯 보였다.

“저는 어때요? 적극적인 사람은 취향이 아니에요?”

두 개의 그림자가 가까워졌다. 큰 쪽에 기대듯 들러붙는 모습에 고개를 돌렸다. 한껏 차가워진 가슴으로 델로즈에게 잘못을 캐물으려 왔는데, 이런 모습을 보다니.

머릿속을 채우던 분노가 사그라들었다. 타이밍이 나쁘다. 차라리 나중에 제대로 대화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델로즈는 언제나처럼 자신의 방으로 돌아올 테니, 그때 확실하게 상황을 확인하고 묻는 게 좋을지 몰랐다.

그렇게 마음먹고 돌린 시선에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반테온이 선 곳 몇 미터 떨어진 위치에서 요르민 비서관이 놀란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손가락을 입가에 가져다 대어 조용히 시키고 요르민에게 다가갔다. 소리를 죽여 조심스럽게 걷는 반테온을 바라보더니 눈치껏 작은 소리로 소곤거린다.

“무슨 일이세요?”

“자리를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선객이 있어서요.”

눈짓으로 밖을 가리키자 그녀의 고개가 작게 움직였다.

두 사람은 조용히 발걸음을 죽여 밖으로 나갔다. 건물을 벗어나고 탁 트인 정원 한쪽에 마련된 야외 벤치에 도착하고 나서야 이동을 멈췄다. 의아하게 바라보는 요르민 비서관의 표정에 어색하게 웃으며 조금 전 상황을 설명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방금 복도에서 있었던 일을 들은 요르민 비서관은 쉽게 수긍하고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사실 제법 흔한 일이에요. 오늘처럼 외진 곳에서 고백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람이 많은 곳에서 용기 있게 접근하는 사람들도 있었거든요.”

“그랬습니까?”

이럴 때면 귀족들이란 점잖은 척하면서 속은 속물적이기 그지없다던 델로즈의 평가가 와닿는다. 아무리 탐난다고 하여도 정도가 있어야지. 수치도 모르고 기회를 노리는 모습엔 반테온도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다.

하긴 체면을 차릴 수 있는 것도 자신의 자리가 안정적인 가문의 특권이다. 혈통이 끊겨 3세대 이상 에스퍼를 배출하지 못한 가문은 귀족이란 계급을 잃고 왕실의 명부에서 제명된다. 왕실의 초대를 받지 못하고, 그런 가문과 결혼해 줄 다른 귀족도 없을 터이니 허울뿐인 귀족의 자리도 지킬 수 없다. 몰래 성을 버리고 상인으로 이직하거나 생업을 위해 다른 길을 찾는 경우도 흔하다.

얼마 전 세이라 로클레스로 분장하여 들어온 사칭범도 그런 가문의 사생아였으니까.

가문에서 에스퍼의 명맥이 끊길 위기가 되자 사생아라도 만들어서 최대한 많은 자식을 낳은 것이다. 혹시 많은 자식 중 한 명이라도 발현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그런 것이겠지. 그러나 결과는 매정했다. 사생아들이 에스퍼로 발현되지 않자 모든 지원을 끊었고, 그 가문의 수장 역시 조용히 자취를 감추고 가문 전체가 역사 속으로 사라질 위기였다.

이런 현실에서 에스퍼의 피가 가장 짙은 자연 발생 에스퍼 델로즈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차지하고 싶은 보물로 여겨지겠지.

“여자 가이드가 접근하는 건 세기도 힘들 정도로 흔한 일이에요. 사실 반테온 님과 매칭 한 후…… 아, 실례되는 일이지만, 남자도 이제 괜찮냐고 접근하는 가이드들도 있었어요.”

“남자 가이드들은 무사했습니까?”

“그럴 리가요. 다들 한 대씩 맞고 의료실로 이동했죠. 그래도 죽거나 장애가 생긴 사람은 없어요.”

센터에 처음 왔을 때보다는 많이 유해지셨다며 즐겁게 설명하는 요르민 비서관의 얼굴을 보며 애써 마주 웃었다. 과연 고백하는 사람마다 의료실로 보내는 행동을 부드럽다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으나, 발전한 것은 사실이니까.

“다 반테온 님 덕인 것 같아요. 워낙 매너 있으신 분이라 델로즈 님도 곁에서 배우는 것 아닐까요?”

“과찬이십니다. 다 센터의 교육 덕 아니겠습니까.”

겸손하게 이야기하면서도 씁쓸한 웃음이 맺힌다. 델로즈가 센터의 교육을 모두 헛된 개소리 취급하면서 무시하고 다니는 건 다들 아는 사실이었다. 요르민 비서관의 말대로 처음 들어왔을 때와 비교하면 크나큰 발전이다.

“이제는 제법 태가 나세요. 어떨 땐 다른 귀족들보다 더 귀족다우신걸요.”

요르민 비서관의 말대로 델로즈의 태생을 모르던 사람이 보면 이제 그를 향해 용병 일을 하던 평민이란 생각은 들지 않을 것이다. 어딜 봐도 잘 교육받고 관리받은 귀족. 거만한 모습까지 그의 위세를 설명하는 특징이라 보였다.

“사실 원래도 외모는 뛰어나셨죠. 사실 SS급이 아니었어도 인기가 있으셨을 거예요. 에스퍼 중에서도 몰래 연모하던 분이 많았는걸요. 사실 델로즈 님도 성별을 가리실 뿐이지. 가이드와 에스퍼를 가리진 않으셨으니까요.”

“그랬군요.”

가이드만이 아니라 에스퍼까지 관심을 가질 정도였던가. 전투에 미친 자들이 많으니 호승심에 기웃거리는 에스퍼가 많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런 것 목적만은 아니었나 보다. 새삼 새롭게 알게 된 소식에 많은 생각이 들었다.

“뭐 그것도 반테온 님과 매칭 하기 전 이야기예요. 최근엔 델로즈 님 곁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는걸요.”

그 말에 씁쓸하게 웃었다. 이유는 빤하다. 아직도 현실이라 믿기지 않지만, 그는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고 반테온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도 가이딩을 포기하면서까지 옆에 있고 싶어 했다. 동생의 연락까지 차단할 정도로 구속할 정도이니 집착이 심했다.

겉으론 곁에만 있어도 충분하다고 이야기하면서 속으로 점점 곪아가고 있었다.

“…….”

어딘가 기시감이 드는 순간이다. 비슷하게 묻어두고 미뤄두었던 마음이 하나 있었다. 곪아가는 걸 알면서도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리라 내버려 두었던 관계다.

오랜 시간 연락을 하지 않은 테아로트는 지금 센터에 있는지, 휴가를 냈는지도 모르는 상태다. 반테온도 먼저 연락하지 않았고, 테아로트 역시 반응이 없다. 근래에 다른 소식이 들리지 않는 걸 보면 어디서든 잘 살아있으리라 짐작만 할 뿐이다.

테아로트의 마음처럼, 델로즈의 마음도 받아줄 수 없는 건 똑같았다. 그러니 더 깊어지고 곪기 전에 확실히 거절해야 했다. 요즘 자신도 모르는 사이 델로즈에게 내어주는 공간이 넓어진다. 델로즈가 아무리 병간호를 자청하였다 하더라도 옆에 아무렇지 않게 두는 것 자체가 과거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을 돌보지 않았던 두 부모님의 탓일까. 반테온은 원래부터 순수하게 자신에게 호감을 던지는 상대에게 약했다. 거대한 가문의 후광과 외모를 보고 욕심내는 속물이 아닌, 반테온이라는 존재 자체에 매달리는 것들이 좋았다.

반테온은 스스로가 착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이기적이고 결국 자신의 만족을 위해 알면서 내버려 둔다. 그런 마음을 받아줄 것도 아니면서 잔뜩 만끽하고 즐기다가 거절하고 언제나 끝이 나쁠 걸 알면서도 계속 반복해온 일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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