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그랬던 과거처럼 델로즈의 맹목적인 행동에도 자꾸 하나씩 물러지는 것이다. 옆에 두기 편하고, 갈구하는 애정이 달콤해서. 받을 생각도 없으면서 앞에서 사탕을 흔들듯 애정만 즐기는 행동이다.
그 때문에 테아로트 때도, 케슬란 때도 힘들었던 걸 알면서도 자꾸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마침 그런 상황을 봤던 탓일까. 갑자기 머릿속이 맑아지는 기분이다.
화를 내려고 델로즈를 찾았으나, 단순히 구속을 따지는 것이 답이 아니었다.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남아 있었다.
델로즈에게 상대가 부족하진 않을 테니 새로운 상대에게 눈이 가도록. 더 미련 없이 버려야 했다.
“저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제가 환자를 너무 오래 잡고 있었네요.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아, 맞아.”
요르민 비서관을 품에 안은 서류 가방에서 주섬주섬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물류 센터에서 보낸 공문이에요. 반테온 님의 상태가 좋아질 때까지 위문품과 선물을 모두 보관하고 있는데요, 이제 보관할 공간이 없어서 물품 수령을 해 달라는 내용이에요.”
“아, 조만간 정리할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이번 센터에서 일어난 사건이 퍼진 후 지금까지 들어온 선물이 우스울 수준으로 많은 양의 물건이 들어왔다. 오죽하면 한 가문에 한 가지 성의만 받겠다고, 나머지는 돌려주겠다고 공문까지 보냈어야 했다. 반테온의 방은 몸 회복을 위한 시설까지 들여놓은 탓에 그런 물건이 들여놓을 자리가 없었다.
센터 측에서 선의로 맡아주기로 했는데, 더 이상 수용할 공간이 없는 모양이다.
공문을 잘 접어 넣고 요르민 선생님을 배웅했다.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지자 등을 돌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방에 들어가면 델로즈가 도착해 있겠지.
갑자기 방을 향하는 동작이 물속처럼 갑갑하고 무거웠다.
***
방에 들어서자 향긋한 홍차 향이 따스하게 피어오른다. 테이블 위에는 잘 차려진 케이크와 차가 준비되어 있고, 잠시 자리를 비운 침대 역시 깔끔하게 정돈되었다. 평생 정리 정돈 따위 신경 쓸 것 같지 않아 보이던 델로즈는 생각보다 깔끔한 구석이 있었다.
처음엔 낯선 듯 헤매던 소품들도 익숙하게 다루고 차도 적당하게 우려 쓴맛과 떫은맛 없이 은은하고 우아한 본연의 맛만 남겼다.
“어딜 다녀왔나 보군. 차는 새로 따라줄까? 조금 식었어.”
“아냐. 이 정도는 괜찮아.”
아직 손끝에 닿는 사기 찻잔이 따뜻하다. 언제 올지 모르는 반테온을 위해 꾸준히 찻잔을 데우고 새로 차를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정성이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침대 한쪽에 앉았다. 푹신한 매트리스를 쓰다듬었다. 시트를 깔끔하게 펼쳐서 아랫부분을 기둥 사이에 넣어 고정하고, 윗부분까지 판판하게 펴져 있다. 더는 손댈 곳 없이 완벽한 정리였다.
반테온이 좋아하던 차도 마다하고 침대에 멍하니 앉아있으니 의아해진 델로즈가 물었다.
“무슨 일 있었나?”
“너, 내 단말기 만졌어?”
반테온이 꺼낸 질문에 델로즈의 손이 멈춘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여유를 뺏긴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베이론이랑 통화했다고 들었어.”
“…….”
“왜 숨겼어?”
델로즈는 굳은 채 변명도 꺼내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물고 멈췄던 델로즈가 천천히 창밖을 바라봤다. 밖은 이미 저물고 있는 해로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놈도 에스퍼겠지? 목소리가 어려 보이던데.”
뜬금없이 베이론의 정체를 추측하는 내용이었다.
“네 주변엔 얼마나 많은 에스퍼가 있는 거지?”
“지금 그게 중요하진 않을 텐데.”
현실을 벗어나는 질문을 지적하자 델로즈의 표정이 무너졌다. 찌푸려진 얼굴로 자신의 머리를 헤집었다. 거친 손길에 잘 정돈되었던 머리가 헝클어졌다.
“구속하지 않을 거라면서. 내가 싫어하는 행동은 하지 않겠단 이야기는 다 거짓말이야?”
“아니다.”
“그럼 이건 무슨 상황이야?”
재차 캐물었다. 앞과 뒤가 다른 말에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었다. 차라리 베이론의 연락을 전하는 걸 깜박했다고, 믿기는 힘들겠지만, 고의가 아니라는 말이 돌아오길 바랐다. 그러나 어두워진 델로즈의 표정은 그것이 아님을 확연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널 속이려고 그런 건 아니었어. 그냥…….”
말을 흐리던 델로즈는 숨을 내쉬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전까진 참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확신했는데, 너와 닿은 뒤부터 내 마음을 조절할 수가 없어.”
“…….”
“내가, 내가 아닌 것처럼 느껴져. 가끔 참을 수 없는 충동이 올라온다. 그래서… 아니. 다 변명이겠지.”
델로즈는 허탈하게 말을 내뱉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한 번 손에 넣으니 에스퍼의 독점욕 때문에 참기 어려워진 것이겠지. 그 욕심 때문에 결국 자신의 것도 아닌 반테온을 마음대로 소유하려고 한 것이다. 반테온이 싫어하니 참아보겠다고 말하면서, 결국, 다른 에스퍼와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난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남의 손에 흔들리는 게 제일 싫어. 내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도 질색이야. 어떤 상황에서도.”
“…….”
“좋아. 제대로 말해두지 않은 내 탓도 있으니까.”
델로즈를 만나면 입장을 확실히 밝히기로 했다. 지금이 딱 좋은 시기였다. 반테온에게 온 연락을 차단한 것에 화내는 것 보다, 확실하게 앞날을 정리하는 것이 좋았다.
“저번 일 때문에 오해하는 게 있는 것 같은데. 그건 사고야. 단순히 치료를 위한 행위였을 뿐이야. 그날 밤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 줬으면 좋겠어.”
“단순한 치료라…….”
“그러니 그 일로 날 가진 것처럼 굴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기분 나쁘니까.”
무언가 반박하고 싶은 말을 억지로 삼키는 기색이었다. 불편해하는 걸 알면서도 반테온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난 너와 그런 관계가 될 생각이 없어. 밤을 보낼 상대가 필요하다면 다른 사람을 찾아보도록 해. 상대가 부족해 보이지도 않던데.”
마지막 말을 들은 델로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반테온이 말하는 상대가 누군지를 머릿속을 되짚다가 오늘 스쳐 지나간 여자 가이드까지 닿았다.
“쓸데없는 걸 보고 온 모양이군. 그거라면 이미 거절했….”
“괜찮아. 그런 걸 변명할 필요도 없고 알려줄 필요도 없어. 에스퍼와 가이드가 만나는 게 뭐가 문제라고.”
“…….”
“그리고 우리가 그런 걸 일일이 보고해야 할 사이도 아니잖아. 그냥 편하게 만나. 제법 괜찮은 상대 같던데.”
“내겐 다른 가이드가 필요 없다는 걸 알 텐데.”
“가이딩이 되지 않는다고 만나지 못할 이유는 없지.”
말을 끝내자 얼굴 측면에 박히는 시선이 따갑도록 와닿았다.
“또 그러는군. 계속해서 날 어디론가 보내려고 하지.”
델로즈가 입매를 짓이기며 낮게 중얼거렸다.
“정체도 모를 여자 가이드가 나타나자 기다렸다는 듯 도망치더니 이번엔 또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거지? 내가 속인 게 화가 났다면 차라리 그렇게 말해. 다른 사람을 들이밀 생각 하지 말고.”
“들이미는 게 아니야. 사실을 말하는 거지.”
죄책감으로 어둡게 가라앉았던 델로즈의 눈빛이 돌변했다. 고요하던 금색이 불꽃이 튀듯 번지며 주변으로 흉흉한 기세가 퍼졌다.
“아하. 이제 가이딩은 떠맡기는 게 불가능하다 싶으니 다른 사람에게 욕구라도 풀고 오라는 건가? 과연 세간의 평가대로 배려심도 깊어. 내 아랫도리 사정까지 걱정해주고 말이야.”
“그래. 그 말대로 그렇게 하면 돼. 그러다가 마음 맞는 사람과 만나도 좋을 거야. 너라면 어딜 가도 환영받을 테니까.”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흘리던 델로즈는 천천히 걸어 반테온 앞에 섰다. 고개 위로 길고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좋아. 상냥한 설명에 감사를 표하고 싶을 지경이네. 그래 내 몸값을 높게 쳐줘서 고마운데 말이야.”
“…….”
“이왕 친절하게 배려해 줄 거면, 직접 해결해주는 건 어때? 다른 사람 찾을 필요 없이 너한테도 얼마든지 세울 수 있다는 걸 알잖아.”
델로즈는 몸을 숙여 반테온 옆을 손으로 짚었다. 매트리스가 푹 들어가고 그 위에 무게를 실어 가까이 밀착했다.
“그날 제법 좋아했던 것 같은데. 계속 갔잖아.”
농밀한 표현에 얼굴이 굳었다. 애써 떠올리지 않으려 외면했던 일이 떠오르자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뗐다.
“그딴 저급스러운 소리 할 거면 저리 꺼져. 어차피 약 때문에 기억도 안 나니까. 차라리 사례를 바란다고 말하면 제대로 챙겨주지.”
“사례?”
“그래. 사례. 아니면 보상. 도움을 받았으니 그 정도는 해 줘야지.”
점차 고개를 붙이는 델로즈를 밀었다. 신경질적으로 치워버리듯 손을 저었다. 조금 뒤로 밀려 나간 델로즈의 입이 길게 찢어지며 사납게 웃었다.
“하하하하. 사례? 사례라…… 그거 좋지.”
팽팽하게 당겨진 줄이 끊어지듯 허리를 숙여 큰 소리로 폭소하던 델로즈가 흉흉한 시선이 들어 올렸다.
“제법 흥미롭네. 그래. 어디 그 유명한 에슬란테의 사례가 얼마나 대단할지 기대되는걸. 뭘 해줄 거지? 금화? 토지?”
“네가 바라는 대로. 앞으로 내가 원치 않는 일에 절대 개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뭐든 들어주지.”
“역시 통이 커. 몸을 바친 보람은 있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