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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급 에스퍼를 피하는 방법 (92)화 (92/112)

#92

아직 몸에 남은 울긋불긋한 흔적을 볼 때면 그날이 자꾸 떠오르지만, 결국은 끝난 일이다. 델로즈와 반테온의 사이에 있었던 일은 단순한 거래로 끝났고 다시 임시 매칭 관계인 가이드와 에스퍼로 돌아왔다.

“계속 계시면 좋지만, 괜찮으시겠습니까? 몸이 회복된 지 얼마 되지 않았잖아요.”

“언제는 가문의 일 좀 신경 쓰라더니.”

“그것도 멀쩡하실 때 이야기죠. 제가 설마 아픈 분께 일하라고 하겠습니까. 그렇게 양심이 없진 않습니다.”

재정관이 억울한 듯 어깨를 늘어트렸다. 풀 죽은 모습에 그런가? 하고 떠올려봐도 그랬던 과거가 떠오르지 않았다. 몸이 아프면 쉬라고 했었던가.

“왜 그런 기억이 없지?”

“지금껏 반테온 님이 아프실 때가 거의 없었으니까요. 워낙 건강 체질이지 않으십니까.”

“……그랬었지.”

최근 침대 신세를 자주 져서 잠시 잊고 있었다. 반테온은 어릴 적부터 심한 감기 한 번 앓지 않고 넘어간 건강한 아이였다. 사실 아플 틈이 없다는 말이 더 적합했다. 몸이 아픈 어머니 때문에 저택에는 온갖 약재와 보약이 쌓여 있었다. 본디 타고난 체력도 나쁘지 않은 상태였고 왕실보다 뛰어난 의료 시설을 갖추고 있으니, 아플 틈도 없이 자랐다.

지금은 다 부질없는 이야기다. 아직도 혹사당한 허리가 움직일 때마다 뻐근하다. 사정없이 벌어진 허벅지도 근육통을 호소했다. 지금도 델로즈가 허리를 양손으로 움켜쥐던 감각이 남아 있는 듯하다.

바쁘게 돌아다니는 인부 사이를 마지막으로 돌아봤다. 다시 목록에 집중하는 재정관 너머로 묘하게 붉은빛이 보인다. 반테온은 재정관의 어깨를 톡톡 쳤다.

“저거 가져와 봐. 빨간색 상자.”

“네? 저 작은 상자 말입니까?”

“그래. 회색 옷 입은 남자 손에 들린 물건.”

되물으며 고개를 갸웃거린 재정관은 들고 있던 펜으로 머리 옆을 긁었다. 반테온의 말에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지금 들고 있는 건 하얀 상자인데요.”

“상관없어. 가져와.”

반테온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상자를 노려봤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재정관이 바쁘게 달려가 인부가 들어 옮기는 상자를 받아왔다. 폭이 좁고 길쭉한 상자. 포장도 간단하고, 문양도 없는 상자를 이리저리 살폈다.

“특이하긴 하네요. 어디서 보냈는지 인장도 없고. 그냥 버릴까요?”

“아니, 아냐. 이건 내가 따로 챙길게.”

작은 물건 하나 담겼을 만한 가벼운 상자였다. 가까이서 보니 하얗고 불투명한 포장지 밖으로 붉은 기운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걸 쥐어 든 반테온의 얼굴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쉽게 물러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반테온에게 초대장을 보낼 줄이야.

반테온의 눈에만 붉게 보이는, 하얗게 반투명한 상자. 이제는 익숙하다 못해 질릴 상황에 혀를 찼다.

“왜 그러십니까? 표정이 불편해 보이십니다.”

“난 이제 돌아가도 되겠지?”

“네, 네. 나중에 최종 정리본을 올릴 테니 확인만 해주십시오.”

반테온은 걸음을 옮겨 흐린 태양이 밝히는 정원으로 향했다. 이제 쌀쌀한 바람이 불던 계절은 완벽히 겨울로 접어들고 있었다. 반테온은 목을 스치는 바람에 두꺼운 재킷 지퍼를 목 끝까지 채워 여몄다.

앙상해진 나뭇가지가 지나가는 바람에 힘없이 흔들렸다. 이런 날씨라면 내일쯤 눈이 올지도 모르겠다. 천천히 흐르는 바람과 다르게 반테온의 발걸음은 빨랐다.

서둘러 서재로 돌아와 문을 잠갔다. 커튼으로 빛을 가리고 책상 위에 올려진 스탠드를 켰다. 어두워진 공간에서 보니 더 확실하다. 상자에서 새어 나오는 붉은 기운이 더 강렬하게 움직였다.

그림자 한 조각 남기지 않은 로한의 행적을 어찌 찾을지 고민했었다. 그런데 먼저 단서를 남겨주다니, 빌어먹게 고마울 지경이다.

상자를 열어 곧바로 뒤집었다. 과격한 행동에 안에 담긴 예쁜 브로치가 바닥을 나뒹군다.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한 채 상자 바닥에 담긴 편지를 집었다.

어울리지 않게 고운 편지지와 예쁜 필기체에 인상을 찌푸리며 한 줄씩 읽어 내려갔다.

[이걸 발견했다면 내가 누군지 인사를 하지 않아도 알겠지? 반가워. 직접 얼굴을 보고 싶었는데, 이번엔 기회가 좋지 않았어. 그래서 다음엔 단둘이 보고 싶은데, 허락해 줄 수 있을까? 단둘이서 말이야. 괜찮다면 다음 주 금요일 밤 10시. 포샤 언덕 천연목 아래에서 즐거운 데이트를 할 수 있다면 좋겠어. 너라면 승낙하리라 믿어.

PS. 난 부끄러움이 많은 편이라 다른 사람을 데려오면 안전은 보장할 수 없어.]

능글맞은 문장 속에 녹아있는 노골적이고 뻔뻔한 속내에 입꼬리가 비틀어 올라간다. 이 정도 배짱은 있으니, 센터에 직접 침입하여 수작을 벌인 거겠지. 편지지를 잘 펼쳐 책상 위에 올렸다.

로한의 바람대로 반테온이 혼자 나간다면 결과는 뻔했다. 자신과 함께 가자, 데리러 가겠다라고 말하던 상대이니 반테온이 홀로 나간다면 환호를 지르며 납치하려 들 것이다.

그렇다고 나가지 않으면, 완벽히 존재를 숨긴 로한이 언제 다시 연락이 올지 몰랐다. 얼마든지 센터의 틈을 비집어 안으로 들어올 능력이 있는 상대다. 또 어떤 방법을 써서 침입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로한의 정확한 외형을 아는 건 딱 두 사람. 그와 만나 대화했던 건 오직 반테온뿐이다. 언제가 되더라도, 결국 반테온이 나서야 했다. 다른 사람이 그 위험한 녀석을 잡을 확률은 0에 가까웠다.

단둘이 만나자는 제안이 위험한 건 맞지만, 이대로 버리기엔 아까운 기회다.

팔랑거리는 편지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사실 이 뻔뻔한 편지가 도착한 순간부터 답은 정해져 있었다. 거절할 수도 없고, 거절해선 안 되는 만남.

반테온은 신경질적으로 편지를 반으로 찢어 타오르는 양초 위에 태워버렸다. 까맣게 타오른 종이는 어느새 얇고 까만 실처럼 공중으로 날아 사라져 버렸다.

***

겨울에 접어든 언덕은 차가운 밤공기와 섞여 삭막하고 고요했다. 두꺼운 외출용 복장을 여미고 묵묵히 까만 나무 기둥 사이를 헤쳐 걸었다. 유독 달빛이 밝아서 작은 랜턴 하나로도 흙더미 사이 듬성듬성 박혀있는 돌바닥이 훤히 보였다.

빛이 반사되는 돌계단을 밟아 올라가니 어느덧 달빛이 직선으로 내리쬐는 공터에 도착했다. 아무도 없을 시간. 고요하게 잡초만 흔들리는 공간 정중앙에 우뚝 솟은 검은 실루엣이 보였다.

“정말로 혼자 와 줄지는 몰랐는데.”

놀랍다는 말과 다르게 로한은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달빛을 역광 삼아 양팔을 벌리고 환영하는 태도에 미간을 찌푸리며 천천히 다가갔다.

“잡으러 오라 부르는데 피하는 것도 취향은 아니라서.”

“좋아. 좋아. 훌륭한 선택이야. 물론 원하는 바를 이룬다면 말이지.”

반테온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을 것이란 확신이 가득 찬 말투였다.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당당한 태도에 탐탁지 않게 미간을 찌푸리며 다가갔다. 가까워지자 그의 외형이 더 자세히 보였다.

언제나 그렇듯 반테온의 눈에는 달빛보다 짙은 금발에 혈액이 모두 투영되는 듯한 붉은 눈동자였다. 로한을 봤던 사람마다 증언하는 모습이 달랐다. 어떤 이는 흑발이라 설명하였고, 어떤 이는 적발이라 이야기했다. 반테온에겐 처음부터 끝까지 저 모습 그대로였다.

점차 가까워지던 발걸음이 더뎌졌다.

“조금 더 가까이 와주지 않을래? 오래 기다렸던 순간이라 조금 설레거든.”

“날 데려가려고 부른 거겠지?”

“그래.”

“그럼 하나만 물어보지.”

반테온의 질문에 로한은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왜 날 데려가려는 거지?”

짤막한 의문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로한은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

“에스퍼가 가이드를 원하는 이유가 뭐가 있겠어. 당연히 가이딩을 위해서지. 아, 물론 사심이 없진 않아. 그 건방진 태도가 제법 취향이거든.”

반테온이 허락한다면 조금 더 많은 걸 부탁할지도 모른다며 로한이 능글맞게 웃었다. 따라갈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는 반테온은 그저 팔짱만 낀 채 허황된 소리를 귓등으로 넘겼다.

“단순히 가이딩이 필요하면 이렇게 복잡하게 접근할 필요도 없지. 센터에 등록만 했어도 알아서 어울리는 상대를 매칭 해 줬을 텐데.”

“센터? 자기들이 모든 걸 통제할 수 있을 거라 여기는 그 오만한 머저리들 속에 들어가란 말은 아니겠지? 농담도 정도껏 해줘. 불쾌할 지경이니까.”

기분 탓이 아니다. 여러 번 느꼈던 대로 로한은 센터를 포함한 왕국 제도 전체에 강한 적대감을 가졌다. 다른 에스퍼처럼 붉은 기운이 보이지 않는 부분부터 확실히 다른 사람들과는 결이 달랐다.

“그렇게까지 왕국을 적대하는 이유가 뭐야?”

“글쎄. 그건 말하고 싶지 않은걸.”

로한은 지금까지 협조적이던 태도를 철회하고 비릿하게 말을 아끼기 시작했다. 왕국에 관한 거부감은 단순한 선호도를 넘어 본능적인 거부감에 가까워 보였다.

“알려줄 필요가 없잖아. 긴 이야기 할 것 없이 널 데려가기만 하면 되니까.”

“혹시 모르지. 이유가 타당하면 너에게 협조할지도. 내가 얌전히 따라가면 네게도 좋은 일일 텐데?”

“흠…….”

여기까지 홀로 온 이상 반테온이 도망칠 방법은 많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 맨몸으로 이곳을 찾아오리란 기대는 로한도 하지 않았을 터였다. 무언가 숨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의심하겠지. 그 예상이 맞는지 로한은 조심스러운 태도로 주변을 훑어봤다. 어두운 공간 속 반테온과 자신 둘만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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