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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급 에스퍼를 피하는 방법 (93)화 (93/112)

#93

“뭐, 듣고 감명해서 협조할 만큼 대단한 이유는 아닌데. 그렇게 궁금하다면 알려줄게.”

로한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비웃듯이 미소 지었다.

“그저 모자란 것들이 이곳의 지배자인 것처럼 구는 게 아니꼬워서 다 부수고 싶었을 뿐이야.”

“왕족과 귀족들이?”

델로즈가 귀족들에게 거부감을 가지듯 로한도 같은 상태일까. 떠보듯 묻자 로한은 턱을 쓸며 중얼거렸다.

“그들이 유독 건방지긴 하지만. 내가 말하는 건 그들뿐만 아니라 너희 전체가…… 아, 이건 너무 어려운 이야기려나.”

“뭐?”

“아냐, 이건 아직 이른 것 같아. 어차피 말해도 너희들은 절대로 모를 얘기거든.”

말을 끊은 로한은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은근하게 미소 지었다. 마치 어린아이를 타이르고 가르치는 듯한 태도에 반테온의 미간 사이가 주름진다. 지금 이야기가 로한이 가진 적대감의 근본이라는 직감이 강하게 들었다. 어떻게든 정보를 더 캐내야 한단 생각에 한 발짝 더 다가갔다.

“여기까지 온 정성을 생각해서 그 정돈 이야기해줄 수 있잖아?”

서로의 시선이 마주치고 동공의 크기가 보일 정도로 가까워졌음에도 여전히 로한의 주변에 붉은 기운은 보이지 않았다. 반테온이 로한의 팔을 잡자 그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렇게 순순히 나오면 나야 고마운데. 갑자기 고분고분하니 적응하기 어려운걸?”

“싫으면 원래대로 행동할 수도 있어.”

“그건 사양할게. 지금 기분이 아주 좋거든.”

로한은 자신에게 닿은 반테온의 팔을 잡았다. 순간적인 거부감에 뿌리치려는 걸 참고 굳어가는 팔을 진정시켰다. 전처럼 닿자마자 강제로 가이딩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흐음…… 정말 혼자 온 건가? 네 에스퍼는 어떻게 하고.”

“네가 신경 쓸 필욘 없어.”

“여기 온 걸 알면 왕국을 부수는 건 내가 아니라 그 녀석이 될지도 몰라.”

“모든 사람이 다 너처럼 이유 없이 부수고 죽이진 않아.”

“하하하하.”

타박하듯 대꾸한 반테온의 말에 로한이 갑자기 소리 내 웃음을 터트렸다. 허리를 숙이며 크게 웃는 소리가 고요한 숲의 나무 사이로 퍼져 울렸다.

“아, 진짜 웃었다. 그 녀석도 거기서 제법 얌전을 떨고 있는 모양이야.”

“잘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네.”

“물론이지. 나만큼 네 에스퍼에 관해 많이 아는 사람도 드물걸? 우린 동류거든.”

두 사람 다 불안정하고 예측하기 어렵다는 부분에선 로한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했다. 하지만 동류라고 말하기엔 델로즈가 억울할 구석이 많다.

이해하기 어렵고, 무례하고 거칠지만 적어도 사람을 저런 시선으로 바라보진 않았다.

“…….”

갑자기 떠오른 델로즈의 마지막 모습에 괜히 숨이 갑갑했다. 정신이 끊기던 그 새벽, 끝까지 자신을 거부하는 반테온의 태도에 울 듯이 일그러진 얼굴이었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닌 걸 알면서도 거부할 수 없이 머릿속을 차지하는 생각을 억지로 눌러 넣었다.

“마음대로 생각해. 내가 나온 건 그 녀석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니까.”

“뭐, 나야 빠져주면 고맙지. 조금 상대하기 까다로운 녀석이라서.”

어깨를 으쓱인 로한이 슬쩍 상체를 돌렸다.

“이제 궁금한 건 다 물어봤어?”

“정작 제대로 이야기해준 건 없는 것 같은데.”

“적극적인 건 고마운데, 너무 급하게 굴지 마. 날 따라오면 언젠가는 다 알게 될 거니까.”

코앞까지 다가온 로한은 홀린 시선으로 반테온을 응시했다. 속이 훤히 보이는 듯한 붉은 눈동자를 깊이 바라보자 혈관을 타고 징그러운 물체가 떠다니는 듯 소름이 끼쳤다.

“누가 따라간대?”

“가까이서 보니까 더 예쁘네. 만족스러워 할 것 같아.”

눈이 가늘게 휘며 뱀처럼 웃었다. 말투 너머 묘한 만족감이 느껴졌다.

“이야기가 너무 길었으니 이만 이동할까?”

그 말과 동시에 어디선가 강한 바람이 불었다. 시린 공기에도 로한의 얼굴은 색 하나 변하지 않고 그대로다. 겨울에 어울리지 않는 얇은 옷을 입고 있는데도 추운 기색 하나 없었다. 따뜻하게 챙겨 입고 온 반테온의 손끝이 서서히 시리다.

야크 가죽으로 속을 덧댄 장갑으로 막기 힘든 한기다. 점점 한겨울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한두 주가 지나면 눈이 내릴 시기였다. 긴장감에 느끼지 못했던 한기가 이제야 느껴졌다.

본격적으로 이동하려는 로한에게 정보를 얻기는 어려울 것 같고, 몸도 피곤하니 슬슬 끝내는 것이 좋겠지.

반테온은 숲 깊숙이 어두운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을 뚫어지게 노려보며 가슴팍에서 꺼낸 작은 시가 케이스를 열었다.

“불이라도 빌려줄까?”

“필요 없어.”

어차피 피우려고 꺼낸 시가가 아니니까.

반테온은 시가의 중앙부를 잡고 반으로 꺾었다. 안에는 담뱃잎 대신 빨간 불빛을 내며 반짝이는 소형 장치가 들어 있었다. 반테온은 장치를 재빨리 하늘로 집어 던졌다.

-피융

불꽃을 쏜 것처럼 가늘게 올라간 불빛은 금세 하늘로 올라가 터졌다. 멀리서도 볼 수 있는 신호가 산 위로 터져 나갔다.

하늘로 치솟은 불꽃이 파랗게 사라지고 그 자리부터 어둡던 숲속을 채우는 강한 빛이 쏟아졌다. 각막을 찢을 듯 온 세상을 하얗게 덮는 섬광이 모든 수도에서 보이도록 화려하게 퍼졌다.

이곳에 오기 며칠 전 숲에 미리 설치한 조명이 켜진 것이다.

상황을 예상한 반테온은 순간적으로 팔로 눈을 가리고 시야가 빛에 익숙해지길 기다리며 실눈으로 정면을 바라봤다.

“겨우 조명이라. 무슨 장난질일까.”

반테온이 초조하게 기울어가는 달을 바라봤다. 머리 위 정중앙에 뜬 달이 천천히 반대편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뭐 조명이 켜졌을 땐 좀 놀랐는데, 그냥 빛일 뿐이잖아. 나와 불꽃놀이라도 보고 싶었어?”

예상보다 빠르게 움직이려는 로한을 피해 다급하게 손목을 빼려 하자 로한은 반테온 옆으로 위협적으로 다가온다. 어차피 도망갈 곳이나 숨을 곳은 없는 장소다. 반테온이 호흡을 멈추고 뒤로 돌아서는데.

“헤이, 거기 잘생긴 아저씨? 그 가이드가 얌전해 보여도 꽤 성질이 더러워. 함부로 건드리다가 물릴 수 있을걸?”

환한 조명이 시작되는 숲속 너머에서 껄렁한 목소리를 뱉으며 한 인영이 걸어 나왔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터덜터덜 걸어 나오는 남자는 어두운 밤중에도 양 눈을 가리는 짙은 고글과 귀를 막은 커다란 헤드셋을 쓴 특이한 차림새였다. 정수리를 감싸는 헤드셋 아래로 반테온과 같은 색의 은발이 휘날렸다.

“뭐, 잔소리 좀 듣는다고 아프진 않은데 제법 기분이 나쁘거든.”

“누구지?”

“우리 형님이 옛날부터 인기가 많아도 이런 것까지 꼬일 줄은 몰랐네. 수도까지 와서 뒤처리하게 될 줄이야. 하긴 옛날부터 까다로워 보이면서 눈치는 둔해 빠졌지. 역시 동생이란 존재는 형님의 뒤처리를 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난거지.”

“하…….”

듣기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방정스러움에 이마를 짚었다. 분명 도움을 요청한 것도 반테온이고, 적절할 순간에 나타난 것도 맞는데 괜히 부른 것은 아닐까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베이론을 위아래로 훑어보던 로한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하, S급 에스퍼라던 네 동생이군.”

“네, 제가 바로 그 유명한 반테온 에슬란테의 망나니 동생 베이론 에슬란테지요. 거, 실례지만 성함이 어찌 됩니까? 일방적으로 아는 관계는 질색하는 편이라서 말이죠.”

“겨우 구조대 한 명? 내 능력을 알고 있을 텐데.”

지금까지 로한의 행동을 생각하면 구조대를 부른 건 사실상 의미가 없는 행동이었다. 그걸 몰라서 베이론을 데려온 건 아니었다.

“저 우스꽝스러운 꼴은 또 뭐야.”

눈에 띄는 고글과 헤드셋뿐만 아니라 목까지 꽉 잠근 복장에는 가느다란 회로들이 끊임없이 이어져 있었다. 전신을 하나의 기계 갑주로 치장한 듯한 모습에 로한의 비웃음이 터졌다.

그 말에 반테온 대신 베이론이 반응했다.

“이게 어때서? 이게 바로 센터의 하이 테크놀로지를 집약한 그…… 뭐더라? 어쨌든 최첨단 에스퍼 대응 차단…… 이름이 너무 어렵네. 어쨌든 그런 거야.”

로한의 의견에 동의하기 싫으나 베이론의 행색이 우스꽝스럽다는 말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굳이 반박하자면, 로한이 지적한 복장보다 동생의 말과 행동이 더 부끄러웠다. 당장에라도 동생을 끌고 와 교육하고 싶으나 굳이 피가 섞인 혈연을 흉보고 싶지 않아 대신 주제를 돌렸다.

“전에 센터에 침입했을 때 자료를 조사해 보니 이상하더군.”

“그게 왜?”

“너 기계는 조작할 수 없지?”

자료를 받아보니 로한은 제법 많은 기록을 남기고, 관찰 카메라에 모습을 드러내며 흔적을 지우지 않았다. 카메라 안에는 뚜렷하게 금발과 적안을 한 로한의 모습이 남아 있었다.

“짧게 잠입할 건데 그렇게 번거로운 일을 할 리가.”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거겠지.”

단순히 반테온과 편하게 대화하기 위해 야센 건물에 있던 모든 사람의 감각을 차단한 놈이다. 센터에 잠입하여 델로즈에게 접근하는 위험성 높은 일을 하는데 대충 처리할 리가 없다.

센터에 남은 로한의 흔적을 추적해보니 한 가지 결론이 나왔다. 로한의 능력은 ‘차단’과 기억‘왜곡’에 한정되어 있었다. 로한이 마물을 부리는 모습을 보고 사람도 조종할 수 있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그렇지는 않았다. 만약 그가 사람을 조종할 수 있었다면 가이드 세이라의 사칭범을 세뇌하거나, 연구원을 매수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센터장과 중심인물을 조종하여 델로즈를 노렸다면 더 간단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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