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로한의 힘은 사람의 감각을 차단하고 기억을 왜곡하는 능력이었기에 감시 카메라에 그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은 것이다.
정곡을 찌른 것인지 능글맞던 로한의 얼굴이 짜증이 섞인 무표정으로 돌변했다.
“그깟 열등한 것들이 만든 물건까지 신경 쓰면서 움직이라고?”
“그 열등한 것들에게 발목이 잡힐 테니까.”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베이론이 손을 들어 활발하게 흔들었다. 지금 베이론이 보는 시야는 자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고글에 장착된 렌즈를 통하여 한 단계 필터를 거친 광경이었다. 헤드셋 역시 마찬가지다.
로한이 사람의 감각을 어떻게 차단하고 왜곡하는지, 그 방법까지는 파악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베이론의 모든 감각을 막고 기계를 통해 재구성하여 준비했다. 베이론의 시각, 청각, 촉각. 모든 것이 기계를 통해 한 차례 걸러진 후 그에게 전달되었다.
“네가 얼마나 뛰어난진 몰라도 이제 알량하게 사람들 눈을 속여 움직이긴 힘들 거야.”
“하하하.”
베이론을 훑어보고 위아래로 주변을 살피던 로한이 흥이 깨진 듯 웃었다.
“우습군. 우스워. 알량한 지식 좀 쌓았다고 으쓱대는 꼴이란. 너희들은 항상 오만하지.”
여기서 제일 오만한 사람의 말이었다.
“내 속을 뒤집으려 했다면 성공이야. 정말 기분이 나빠지려고 하거든. 이렇게 더러운 느낌은 또 오랜만이네.”
“그거 기쁜 소식이군.”
“……뭐, 어차피 순순히 따라올 거란 생각은 안 했으니까. S급 하나 처리하고 데려간다면 값싼 편이니 참아야지. 대신 편지에 남겼듯이 안전은 기대하지 마.”
로한의 여유로운 말에 베이론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말하면 서운한데. 물론 내가 힘에 비해 컨트롤 같은 건 개나 줘버리고 때려 부수는 것만 잘하고 무식하게 휘두를 줄만 알지만 내 애인은 이런 점도 좋다고…… 아, 이건 너무 나갔나?”
“넌 제발 좀 조용히 있어.”
“어쨌든 그렇게 만만한 사람은 아니라서 말이야. 덤벼. 덤벼.”
진지한 분위기가 베이론이 입을 열 때마다 부서진다. 복싱하듯 스텝을 밟으며 전투 자세를 취하는 동생의 모습에 반테온의 얼굴이 붉어질 지경이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것 같은 베이론의 어깨를 잡았다.
“베이론. 미리 약속한 건 그게 아닐 텐데.”
“아…….”
“…….”
“아 맞다. 맞아. 아저씨가 나 한 명으로 만족을 못 할 수도 있어서 더 준비했거든.”
베이론이 손으로 산 아래쪽을 가리켰다. 반테온의 눈에 보이지 않는 센터 소속 에스퍼 수십 명이 신호에 따라 어두운 아래쪽에 대기하고 있었다. 모두 베이론과 똑같은 복장을 갖추고 방어하고 있었다.
“우리 형님이 워낙 준비성이 철저해서 말이야. 전부 나처럼 전선을 둘둘 휘감고 대기 중이야. 겨우 S급 하나라서 실망했을 텐데 이제 만족스럽나 몰라.”
눈으로 숫자를 세듯 아래를 훑어본 로한이 실소했다.
“질 대신 양이라. 지금 상황에서 눈을 속이는 건 힘들 것 같고…… 역시 그냥 나온 건 아닌가 보군.”
“열심히 준비했지.”
“그런데 과연 모기 한 마리나 서른 마리나 차이가 있을까?”
센터에서 모은 정예를 모기 취급하는 로한의 말에 반테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로한의 능력은 분명 위협적이다. 왜 반테온에게 통하지 않는지는 몰라도, S급 에스퍼의 눈까지 속였다. 과연 그 능력이 봉인된 상태에서 이 정도의 수를 상대할 수 있을까.
“뭐, 너희로선 이게 최선이겠지.”
그런데도 로한의 얼굴에는 긴장된 기색이 조금도 흐르지 않았다. 여유로운 기색에 지금까지 장난스럽게 팔을 휘두르던 베이론이 반테온의 앞을 막아섰다. 매번 장난스럽게 형님 형님 하며 농담을 던지던 베이론의 기색이 날카롭게 다듬어졌다.
“형님은 어쩌다가 저런 놈이랑 엮인 거야?”
“나도 모르지.”
“사람 같지도 않은 놈이랑 어울리고 있어. 잠시 피해 있어 봐.”
혀를 차며 한탄하던 베이론 주변에서 붉은 기운이 점차 거세게 넘실거린다. 산 전체를 덮을 듯 강렬하게 뻗던 기운이 로한의 가까이 다가가더니 그대로 로한의 몸을 뚫고 지나갔다.
형체에 부딪히면 휘거나 흔들리던 기운이 마치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지나듯 로한의 신체를 스친다. 아예 형체가 없는 것처럼 기운이 통과하는 모습에 눈을 홉뜨며 바라보자 눈이 마주친 로한의 표정이 굳었다.
“너무 많은 걸 알게 되면 곤란하거든.”
저벅저벅 걸어오는 로한의 동작이 빨라진다. 경계의 날을 세우며 전투 자세로 몸을 낮추는 베이론의 어깨 너머로 형형한 붉은 눈빛이 움직였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갑자기 사라진 로한의 형체와 위아래가 시야가 바뀐다. 바닥에 다시 발이 닿고야 베이론이 빠르게 반테온의 몸을 옮겼다는 걸 깨달았다. 강제로 움직여진 몸에 비틀거리며 나무에 등을 기대자 베이론이 로한의 몸을 쳐 위쪽으로 강하게 띄웠다.
파열음과 날아오른 로한은 아무렇지 않게 공중에서 몸의 각도를 바꿨다. 마치 땅 위에서 움직이듯 방향을 바꿔 움직이는 로한과 그 앞을 막아서는 베이론의 신형은 눈이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흔들렸다.
에스퍼들의 전투를 가까이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온통 하얗게 빛나던 주변이 베이론의 붉은 기운에 따라 일그러지듯 움직이고, 나뭇가지가 춤추듯 흔들렸다.
붉다 못해 자줏빛으로 일렁이는 중심에 베이론과 로한이 있었다. 갑자기 시작된 전투에 뒤늦게 산 아래에서 대기하던 다른 에스퍼들도 튀어 올라왔다.
“베이론 님을 보조해라.”
“오른쪽으로 붙어!”
소리에 따라 진영을 맞추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마치 진을 짜듯 올가미처럼 촘촘하게 모여 로한을 거미줄로 감싸듯 옭아맸다. 에스퍼들이 뿜어내는 붉은 기운이 파도같이 치솟아 밤하늘을 물들였다가 사그라들기를 반복했다.
사람들 사이에 갇혀 이제 머리카락 한 올 보기도 힘들어진 로한의 상황에도 꽉 쥔 손이 펴지지 않았다. 단둘이 마주했을 때보다 더한 긴장감에 심장이 쿵쿵거렸다.
긴장에 절은 주먹을 꽉 쥐었다. 다른 사람 눈엔 센터 에스퍼들이 로한을 가두고 완전히 우위를 점령한 것으로 보이겠지만, 반테온의 시선엔 달랐다.
온 시야를 벌겋게 태우는 기운의 방향이 일정하게 흘러가면서 한 곳에서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강제로 다른 기류가 침범하여 흩트리듯 흐름이 막혔다.
점차 격해지는 심장 소리가 귀에 닿을 듯 커졌을 때 중앙에서 거대한 폭발 소리가 들렸다.
“피해!”
명령과 동시에 수십 명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져 부딪혔다. 흙먼지가 날리고 가라앉은 하늘에는 한쪽 면이 훤히 뚫린 에스퍼들의 파괴된 진영만 보인다. 로한은 그 사이에서 도망가지도 않고 고고하게 서서 벌레 보듯 아래를 응시하고 있었다.
“진짜 괴물 같은 놈이네.”
로한의 일격에 바닥에 처박힌 베이론은 고개를 털며 상체를 일으켰다. 작게 내뱉은 말 속엔 아까와 같은 여유는 찾을 수 없었다.
바닥에 떨어진 자들도, 아직 공중에 남아 있는 자들도 잔뜩 긴장한 채 로한을 응시했다. 팔짱을 낀 여유로운 태도, 살짝 휘어 웃는 눈매를 바라보며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다.
“이게 끝이야? 거창하게 준비한 것치곤 시시한데.”
“걱정하지 말라고.”
애써 호기롭게 말하는 베이론의 꽉 쥐어진 주먹에 핏줄이 솟아 있었다. 침 한 번 삼키기도 힘든 긴장감에 흐르던 구름마저 멈춘 듯한 순간이었다.
“안 올 거면 내가 다가가도 되겠지?”
로한이 손을 풀고 서서히 몸을 낮췄다. 존재하지 않는 내리막길을 타고 내려오듯 천천히 고도를 낮추더니 바닥에 발을 디뎠다.
순간 반테온의 시선이 로한의 발아래에 멈췄다. 잘못 본 것이 아니다. 바닥에 닿는 순간. 경악 어린 비명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너…….”
튀어나오려는 말을 삼켰다. 처음 조명이 켜졌을 땐 가까이 붙어있어서 자각하지 못했다. 먼 곳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로한의 발아래에는 세상 모든 것들이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할 그림자가 없었다.
머릿속에 로한과 만났던 때가 스쳐 지나갔다. 처음 만난 곳은 야센의 어두운 공간이었다. 두 번째도 만남도 온갖 조명이 화려하게 흔들려 시야가 어지러운 축제의 밤이었지. 세 번째도 야센. 굳이 깊은 야밤에 만나고 싶다고 지정하는 편지까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것투성이였다.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반테온의 시선이 바닥을 향하자 덩달아 아래를 바라본 로한의 입술이 양쪽으로 길게 찢어지며 씨익 웃었다.
“우리 이렇게 밝은 곳에서 보는 건 처음이지?”
과장되게 웃으며 허리를 접는 로한의 발아래에는 다시 봐도 아무것도 없었다.
“축하해. 이걸 들킨 적은 처음이거든.”
“인간이…… 아니야?”
“그걸 내가 이야기해줄 리가 없잖아.”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뱉으며 로한이 다가왔다. 뒷걸음치는 것보다 소매를 잡아당기는 로한의 행동이 더 빨랐다.
“이렇게 다 보여줄 생각까진 없었는데. 대단하긴 대단해.”
지금껏 능글거렸던 태도를 확 바꾼 로한은 한껏 비아냥을 담아 말을 내뱉었다. 들키고 싶지 않은 부분을 들킨 탓인지 웃고 있는 얼굴 너머 불쾌한 감각이 저릿하게 느껴졌다.
“이건 불가능해.”
“너희들 생각엔 그렇겠지.”
당장 반테온의 입을 틀어막을 듯 고개를 내민 로한의 눈동자가 번들거린다. 광증에 가까운 광기에 속이 매슥거릴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