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에스퍼를 피하는 방법 (95)화 (95/112)

#95

“볼 만큼 봤으면 이제 떠나자고. 슬슬 지겨워지려 하거든.”

로한이 손등으로 반테온의 뺨을 슬며시 쓸자, 그와 닿은 부분에서 소름이 올라왔다.

“거기서 떨어져!”

뒤에서 달려오던 베이론은 발목이 바닥에 붙은 듯 뻣뻣하게 굳었다. 놀라서 발아래를 바라보는 모습을 보니 의도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로한이 염동력으로 상대를 묶어둔 것이다. 베이론의 바지가 사람 손으로 쥔 듯 주름지며 다리에 조여들었다. S급 에스퍼의 행동을 저렇게 가볍게 막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힘든 기색 하나 없이 발만 고정하는 섬세한 제어에 침을 삼켰다.

다시금 사람이 아니라는 자각에 등골에 소름이 솟는다. 한 발짝 물러서고 싶은 충동을 누르고 꿋꿋하게 그 자리에서 버티자 능글맞게 웃던 로한의 입꼬리가 더 짙어졌다.

“그래야지. 피하면 재미없잖아.”

철저하게 준비했다고 생각했다. 가동 가능한 에스퍼를 모두 동원하고, 일주일 사이에 세뇌를 방어하기 위한 장치를 개발하여 보급했다. 예상대로 로한의 조종은 통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 눈에도 정상적으로 로한의 모습이 보였다.

문제는 부족한 준비가 아니라 예상치를 훨씬 웃도는 로한의 능력이다. 델로즈가 왔더라도 승패를 가늠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S급 에스퍼를 포함한 한 부대를 단순히 기세만으로 제압할 수 있는 존재가 얼마나 될까.

반테온은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채 이를 꽉 깨물었다.

“너도 마음에 들 거야. 조용하고 편안한 곳이거든.”

팔을 잡아당기는 행동에 반항할 수 없었다. 조종당하지 않았음에도 뻣뻣하게 굳은 몸이 로한이 이끄는 대로 움직인다. 천천히 몸을 안아 드는 행동에 힘을 주려 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어디로 끌고 가려는 것일까. 자신에게 가이딩을 바란다며 납치하는 상대에게 이대로 끌려가면,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지. 처음 느끼는 무력감에 목이 콱 조이는 느낌이다.

인간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그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는 상대와 단둘이 남을 수 있다는 공포에 손이 차갑게 식었다. 파리한 손끝으로 로한을 밀어내려 해도 덜덜 떨리는 하찮은 거부에 지나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 지금 해치진 않을 테니까.”

점점 다가오는 로한의 손길이 멈췄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멈춘 듯한 손 주변에 반테온만 알아볼 수 있는 붉은 기운이 실처럼 엉켜서 넘실거린다. 실 끝을 따라가니 익숙한 사람이 고요하게 서 있다.

다른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크고 날렵한 형체가 서서히 다가왔다. 빛에 익숙해진 눈 너머로 짧은 흑발이 흔들리며 붉은 기운 가운데서 춤추듯 흔들렸다.

며칠 만에 보는 모습은 진한 조명과 달밤의 분위기 탓인지 눈썹 아래가 어둠에 감싸여 어떤 표정인지 알기 어려웠다. 전보다 날카로워진 턱이 천천히 움직이더니 고개가 돌아갔다.

“이런 정보는 없었는데. 이왕 온 거 인사라도 할까? 제대로 보는 건 처음이지.”

로한은 강제로 멈춰진 자신의 손목을 회수하여 돌리며 델로즈를 반겼다. 행태만 보면 오래된 친구를 반기는 듯한 말투에 어두운 표정으로 걸어오던 델로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반길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델로즈의 매정한 태도에 로한은 여유롭게 웃을 뿐이다.

“언젠가 부딪칠 거라는 건 서로 알았잖아? 우린 가지고 싶은 게 같으니까.”

그 대답에 어둡던 델로즈의 기세가 더욱 사나워진다. 델로즈가 대꾸 없이 양손을 들어 올렸다. 팔뚝 아래 손이 우득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당장이라도 로한에게 뛰어들 것처럼 꽉 쥐었다. 겨우 숨 막히는 순간에서 벗어난 반테온이 창백한 얼굴로 델로즈를 바라보자, 델로즈는 무표정한 얼굴로 흘낏 반테온을 바라보고 다시 시선을 돌렸다.

짧은 시간 마주친 눈동자는 반테온의 안색처럼 하얗게 가라앉아 있었다. 평소 반테온을 바라보던 깊은 시선도, 마지막으로 함께 있을 때 봤던, 자신을 비난하는 듯한 매서운 눈빛도 아니다. 어떤 감정인지 알 수 없는 눈빛에 손을 꽉 쥐었다.

뒤늦게 따라 올라온 페턴이 헉헉거리며 올라와 반테온에게 꾸벅 인사를 하며 앞을 가로막았다.

“제대로 지켜.”

“적당히 하십시오. 적당히. 다 부수면 저도 힘듭니다.”

델로즈는 페턴의 말에 대꾸도 없이 소매를 걷어붙인 채 걸어갔다. 로한의 웃는 얼굴이 가라앉고 진지한 기색이 어리는 순간 굉음과 함께 땅이 패고, 반테온의 시야에서 두 사람이 사라졌다.

방금 서 있던 바닥의 잡초는 새까만 흙구덩이로 변하고, 무성하던 나무가 쓰러지고 나뭇잎이 공중으로 치솟았다.

“거, 살살하시라니까. 아이고. 이쪽으로 오십시오.”

페턴의 안내에 따라 몸을 옮기자 어느새 이동이 가능해진 베이론이 서둘러 달려왔다.

“형님. 괜찮아? 다친 곳은?”

“무사해.”

“다행이다. 저분을 최후의 수단으로 숨겨둔 건 좋은데, 하나뿐인 동생에게도 숨기면 어떡해. 진짜 잘못되는 줄 알고 식겁했잖아.”

베이론의 짐작은 틀렸다. 반테온은 델로즈를 부른 적이 없었다. 편지를 받았을 때 가장 먼저 델로즈와 함께 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어도, 그걸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매정하게 거래 관계로 남자고 내쳐놓고 며칠 지나지 않아 도와달라 요청할 정도로 뻔뻔하지 못했고, 혼자서도 얼마든지 준비할 수 있을 거란 믿음도 있었다.

결국은 틀렸지만. 씁쓸한 심정으로 공중에서 충돌하는 두 사람을 바라봤다. 바윗덩어리가 유리 조각처럼 깨져서 튀고, 나무가 뽑혀 날아갔다.

“여기는 대장이 해결할 겁니다. 그보다 조금 더 안전한 곳으로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도련님이 다치시면 제가 죽은 목숨이라서요.”

두 사람 틈을 끼어든 페턴이 반대 방향을 가리켰다. 언덕을 내려가다가 반대쪽에서 폭발음이 들리자, 그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눈에 보이지 않는 두 사람의 전투에 흙더미와 바위가 터져 사방으로 날랐다.

바닥에 떨어졌던 다른 센터 요원들이 그 충격을 피해 서둘러 몸을 옮긴다. 부상자를 수습하고 떠나는 자리는 어김없이 깊게 패었고, 거대한 나무가 쓰러졌다.

“뭐,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일단은…… 우리 쪽이 우세해 보이거든. 이쪽으론 안 올 거야.”

베이론이 손으로 눈썹 위를 가리고 멀리 보며 말했다.

“잘 보여?”

“아니. 나도 겨우 따라가는 정도야. 이런 적은 처음이라 새롭네. 원래 저렇게 과격한 편이야?”

S급 에스퍼의 동체 시력으로 두 사람의 움직임을 겨우 따라갈 정도란 말에 페턴이 옆에서 혀를 내둘렀다.

“이번엔 많이 화나셨으니까요. 여길 오는 내내 한마디도 안 하시는데 제 등골이 얼어 부서지는 줄 알았습니다.”

“여긴 언제 온 겁니까?”

“아…….”

잠시 델로즈가 전투하는 쪽을 바라보더니 페턴이 뒤통수를 긁으며 답했다.

“사실 비밀……이라고 하셨는데 말입니다. 여기 에스퍼들이 아래에 잠복할 때부터 반대편에서 대기했습니다.”

“비밀이라면서 이렇게 쉽게 말해도 되는 거야?”

의문을 표하는 베이론의 말에 페턴이 실없이 눈을 휘며 웃었다.

“뭐 어차피 우리 대장이 도련님 말이면 끔벅 죽는데, 이거 말했다고 문제야 있겠습니까. 도련님 기분 상하게 하는 게 더 후환이 클걸요.”

“오호.”

낯간지러운 대답에 베이론이 휘파람 불었다.

“형님. 사랑받고 있잖아.”

“제발 그 가벼운 언사 좀 그만두지 못하겠어?”

센터에서 가장 거친 말투를 쓰는 델로즈가 얌전해지니 가까이 있는 동생이 문제다. 델로즈는 자라온 환경 탓이라 이해하려 노력했는데. 대체 어릴 땐 얌전하던 베이론은 무슨 영향으로 이렇게 되었는지, 다시 생각해도 알 수 없는 현실에 이마를 짚었다.

베이론의 말투를 지적하는 것이 옳을까, 아니면 내용을 지적하는 것이 옳을까 고민하다가 마음을 굳혔다. 어차피 백번 이야기해도 말투를 고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거 아니야. 에스퍼가 매칭된 가이드에게 가지는 호감이 있잖아. 에스퍼라서 나보다 더 잘 알잖아.”

“아닌데?”

“아닙니다.”

칼 같은 대답이 두 사람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정식 매칭도 아니고 임시 매칭 가이드를 눈치 보며 챙길 이유가 어디 있어. 형 기억 안 나? 지금 내 가이드를 찾기 전에 내가 갈아치운 임시 가이드만 두 손가락이 넘어.”

“저도 임시 가이드 변경 신청을 넣은 상태입니다. 매칭률 맞는 가이드라고 다 좋은 건 아니에요.”

두 손을 흔들며 부정하던 베이론이 억울한 투로 하소연했다.

“물론 같은 에스퍼 놈보다는 가이드에게 친절하고 호감이 가겠지만, 저렇게 본인 성격 접어주면서 다 맞추진 않아!”

“맞습니다. 저희 대장님 성격이 얼마나 더러운데요.”

상사의 뒷담을 당당하게 털어놓는 페턴은 둘째 치고, 베이론을 바라봤다. 진심으로 억울해하는 동생에게 무덤덤하게 물었다.

“델로즈가 성격 접어두는지 아닌지는 어떻게 아는데?”

“그걸 어떻게 몰라 날 볼 때랑 형 볼 때 눈빛 자체가 다른데.”

베이론은 어깨를 부르르 떨더니 고개를 저었다.

“멀리서 걸어오는데 내가 다 살벌하던데. 오늘이 돌아가신 부모님 뵈러 가는 날인 줄 알았는데 형을 향하는 순간 엄청 부드러워지더라.”

“…….”

“거, 애절해서 어디 강제로 헤어진 연인 보는 눈빛인 줄 알았어. 보는 내가 떨릴 지경인데 형님은 아무렇지 않았어?”

“난 딱히…….”

“진짜 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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