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베이론에게 매번 들어서 알고 있는 사실인데도 이번만은 부정하고 싶은 기분이다. 평소와 다른 시선이라는 생각은 했어도 헤어진 연인을 바라본다니. 낯간지러운 설명을 들을만한 사이가…….
맞구나.
고개를 숙이고 싶었지만, 그러면 마음이 더 티 날 것 같아 슬며시 옆으로 돌렸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베이론의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이상한 기색을 눈치챈 동생이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뭐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무 일도 없어.”
“에이. 거짓말.”
굳이 돌린 고개 옆으로 몸을 옮겨 얼굴을 마주 보는 동생의 얼굴을 신경질적으로 밀었다. 아프지도 않을 놈이 엄살을 피우며 밀리는 척했다.
“아이고, 내 잘생긴 얼굴 다 망가지네.”
“엄살 피우지 마.”
“형님. 형님. 아니 진짜로 도와주고 싶어서 그런다니까? 이래 봬도 내가 연애 경험은 형님보다 많잖아.”
가슴을 펴고 외치는 베이론의 얼굴엔 자부심이 가득했다. 누가 보면 천하의 카사노바라도 되는 듯한 태도에 헛웃음이 나왔다.
“지금 가이드가 첫 연애 상대잖아. 만난 사람은 내가 더 많을 텐데?”
“지금이 첫 연애라도 벌써 4년 차인걸? 그리고 형님이 지금까지 한 게 어디 연애야? 그냥 놀이였지.”
“…….”
“몇 달에 한 번씩 바뀌는 상대를 애인이라고 말하진 않지. 놀이 중에서도 가벼운 놀이 상대잖아. 펜촉처럼 몇 번 쓰고 버리는.”
“그렇게 말하니 내가 꼭 쓰레기 같구나.”
“부정하진 않겠어.”
의기양양한 베이론의 태도에 한숨을 쉬었다. 위기에서 벗어난 지 몇 분이나 됐다고 다시 장난스럽고 가벼운 태도로 돌아온 건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반테온의 뒤에서, 조심스럽게 대기하던 페턴이 고갤 내밀었다.
“도련님들. 방해해서 죄송한데요. 슬슬 자리를 옮기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
동생의 헛소리에 휘말려 반테온까지 현실을 잊었다. 페턴이 베이론에게 눈짓하자 기민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반테온을 보호하며 언덕을 내려갔다.
아래에 준비된 진지에 들어가자 이번 작전에 동원된 요원들이 부상당한 동료들을 치료하며 바쁘게 돌아다녔다. 그 앞에서 이번 작전의 지휘를 맡은 소텐루 대장이 나와 인사했다.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최대한 준비했는데, 이렇게 부족할지는 몰랐습니다. 송구스럽습니다.”
“아닙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반테온은 편지를 받자마자 센터장을 찾아갔다. 혼자 와 달라는 요청에 순진하게 혼자 찾아갈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렇게 급조한 부대와 세뇌를 막기 위한 준비를 철저하게 했어도 부족했다.
“반테온 님이 친히 미끼 역할까지 맡아주셨는데…….”
처음 로한의 편지를 본 사람들은 바로 급습하여 체포하자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그런 상황에서 홀로 미끼로 나서겠다며 작전을 제안한 것도 반테온이었다. 위험한 수이나, 지금이 아니면 다른 정보를 얻을 수 없을 테니까.
그 덕에 로한의 능력치는 예측과 틀어졌어도 정보는 제법 건질 수 있었다.
“대체 정체가 뭡니까. 저 사람. 아닌 사람은 맞는 겁니까?”
“……그러게요.”
문제는 정보를 얻었어도 조합할 수 없는 내용이 넘쳤다. 그에게 들었던 내용을 하나하나 복기해 봐도 마치 정신 나간 사람이 두서없이 내뱉은 이야기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다.
머릿속이 혼란한 가운데 무언가 터져 나가는 굉음이 들렸다. 소리는 들려도 형태는 보이지 않는 방향을 바라봤다.
“소텐루 대장께선 지금 전투가 보이십니까?”
“부끄럽지만 제 능력으로는 무리입니다. 확실한 건 제법 거리가 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군요.”
“그럼 반테온 님 먼저 센터로 모시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소리가 생생하게 들리지만, A급 에스퍼의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먼 거리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초저녁부터 귀신에게 홀린 것처럼 상식을 벗어난 일에 고개를 저으며 안내를 따라 걸었다.
멀리서 오랜만에 만난 동료들과 해후를 나누던 베이론이 재빨리 붙어 반테온의 옆 좌석에 앉는다. 생글거리며 환하게 웃는 얼굴이 어두운 차 안에서 빛났다.
정신이 없어서 깨닫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게 얼마 만에 직접 마주하는 것인지. 성인이 된 이후 단둘이 시간을 보낸 날이 언젠지 까마득하다. 반테온은 이미 자신보다 훌쩍 커버린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신과 똑 닮은 형제의 은발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듯 살랑거렸다.
“형은 옛날부터 쓰다듬는 걸 참 좋아했어.”
“그랬나?”
“예전에 키우던 새까만 사냥개 기억나? 위험하다고 가까이 가지 말라 해도 꼭 옆에 가서 쓰다듬었잖아.”
어린 시절 저택에서 키우던 사냥개 한 마리가 있었다. 어린 반테온의 키만큼 컸던 그 아이를 제법 좋아해서 자주 보러 갔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듣고 보니 그랬던 것 같기도 하네. 덩치는 커도 순했는데.”
“순해? 사육사들도 쩔쩔매던 놈이었는 걸. 이상하게 형만 오면 몸을 숙이고 쓰다듬어 달라고 뒹굴었던 거지.”
그런 말은 어렴풋이 들은 것 같기도 하다. 자신 앞에서만 순하면 되지, 하는 마음에 귓등으로 넘겼던 듯했다.
“형님의 에스퍼를 보니까 그때 기억이 좀 나긴 하더라. 어쩜 맹수들에게 인기 있는 건 변함이 없어?”
“사람을 개랑 똑같이 취급하지 마.”
“오.”
베이론이 속에서 깊은 감탄을 내뱉었다.
“의외로 저 에스퍼가 제법 마음에 드나 봐?”
“대체 어딜 봐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방금 그 어색한 만남을 눈으로 봤으면서 베이론이 어째서 이런 평가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동생은 입꼬리를 올리며 신나게 이야기했다.
“형님이 말만 정중하게 할 뿐이지 사람에 관해선 누구보다 엄격하잖아. 진짜 마음에 안 들었으면 개보다 못하니까 개랑 비교하지 말라고 했을걸?”
“…….”
합리적인 추론에 입이 막혀 괜히 먼 곳만 바라봤다. 처음 델로즈를 만났을 때 마음속으로 내렸던 평가를 떠올리면 동생의 말이 맞았다. 동물이 뭔가, 지렁이보다 못하다고 평가를 내리지 않았던가.
“잘 지내봐.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느긋하게 말하는 베이론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하늘을 온통 붉게 뒤덮은 붉은 기운 탓에 벌겋게 보이는 둥근 달을 바라보며 못 들은 척 묵묵히 풍경만 바라봤다.
형제를 실은 자동차는 매끄럽게 달려 센터를 향한다. 잠시 후, 목적지에 도착한 두 사람은 각자의 숙소를 들어가 쉽게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했다.
그리고 다음 날, 로한이 체포되어 지하 감옥에 수용됐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로한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처음 든 생각은 이렇게 쉽게? 라는 배부른 소리였다. 지금까지 로한의 행태와 악랄한 능력을 생각하면 이리 쉽게 잡혔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하지만 수감 번호와 독방 위치까지 친절하게 적힌 센터장의 메시지를 받고 나서야 현실을 인정했다.
두 번째 든 생각은 앞으로 어떻게 하지? 라는 것이었다. 로한이 수용된 감옥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그 생각은 답을 내릴 수 없었다. 저벅저벅 허공에 올리는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죄수들을 가두던 지하 감옥 일부는 시설을 갖춰 독방으로 개조하였고, 독방보다 더 아래 있는 감옥은 열악한 시설을 방치한 채 그대로 쓰이고 있었다.
습기가 차다 못해 구두 밑창에 물기가 질척이는 바닥과 손으로 벽을 짚기 싫을 정도로 가득한 이끼. 그리고 드문드문 설치된 조명도 어둡게 깜박이는, 델로즈가 갇혔었던 독방과 비교할 수 없이 열악한 시설이다.
“벌써 와계셨군요.”
로한이 수용된 감옥 앞엔 이미 여러 사람이 서 있었다. 반테온에게 소식을 전달한 센터장과 센터 간부들이었다. 센터장에게 의례적인 미소로 인사를 건네자 특유의 인자한 웃음이 돌아왔다.
“허허허. 이런 상황에 가만히 앉아있을 순 없어서 말입니다. 안을 보시겠습니까?”
센터장의 안내에 따라 로한이 갇힌 감옥으로 향했다. 두 사람이 지나가기도 좁은 복도를 조심스럽게 걸어 한참을 들어가자, 철창 사이로 전신이 묶인 로한의 모습이 보였다.
눈은 두꺼운 안대로 가려져 있고, 입에는 가죽 재갈이 물려 있었다. 양손은 의자 뒤로 묶였고, 다리는 바닥에 고정되었다.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태로 마네킹처럼 빳빳하게 미동도 없이 앉아있었다.
사방에 조명을 켜 놓았지만, 여전히 그림자는 찾을 수 없었다.
감옥 앞에 서서 로한을 바라보는 센터장에게 물었다.
“의식은 있는 겁니까?”
“진정제를 주사했습니다. S급 에스퍼에게 쓰는 양보다 2배가 넘게 투여하니 겨우 조용해지더군요.”
S급 에스퍼에게 처방되는 진정제의 두 배라. 에스퍼에게 쓰이는 진정제는 독 성분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반인은 1/10만 맞아도 사망할 양이었다. 그걸 S급의 두 배나 처방했다라….
“그럼 이자는 이제 어떻게 됩니까?”
“센터에서 몇 가지 측정과 조사를 마친 후 국경 베르닐 산맥에 유배될 겁니다.”
온갖 생체 수치와 연구를 마친 후 사람이 생존하기 어려운 북쪽 지대에 보내겠다는 말이었다. 베이론이 근무하는 북쪽 마물굴보다 더 위쪽에 위치한 베르닐 산맥은 혹독한 추위와 가파른 절벽으로 유명한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