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신경 쓰지 않아.”
“끔찍하게 싫다는 듯 이야기하더니 이럴 땐 또 괜찮은 건가?”
괜찮다며 꺼낸 이야기에도 델로즈의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럼 어떨 때가 또 예외적인 거지? 도움이 되면 괜찮은 건가?”
“…….”
“너는…… 너무 알기 어려워.”
반테온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델로즈의 얼굴색이 어두워졌다. 더욱 날카로워진 얼굴 가득히 그림자가 내렸다. 잠시 창밖을 응시하던 델로즈는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뒤로 돌아섰다.
델로즈가 몸을 돌리는 순간 살짝 벌어진 셔츠 사이가 눈에 들어왔다. 하얀색 긴 실루엣, 가슴과 어깨를 감싼 붕대가 보였다. 정면에선 보이지 않던 전투의 흔적이었다.
최근 델로즈가 상처 입을 만한 일이 없었다. 쉽게 다칠 사람도 아니었다. 역시 로한을 생포하기가 쉽진 않았던 것일까.
반테온은 반사적으로 뒤돌아선 그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내민 손은 델로즈의 어깨에 닿기도 전에 단단한 손아귀에 잡히고 방향이 틀어졌다. 뒤돌아선 델로즈가 반테온의 팔목을 잡아 옆으로 치운 것이다.
“어…….”
허공에 덩그러니 남겨진 손을 어색하게 회수했다. 말도 없이 상대의 옷 사이를 살펴보려 한 꼴이 된 반테온이 어색하게 변명을 덧붙였다.
“그냥 몸은 괜찮은지 묻고 싶었어.”
더 어두워지기 어려우리라 생각했던 안색이 더 차갑게 가라앉고, 델로즈는 작게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강간범 걱정을 할 여유가 남았나 보군.”
“…….”
“그러니 너를 보고 상냥하다고 이야기하는 거다. 몸은 벌써 괜찮은가 보지?”
차갑게 꽂히는 말에 입을 다물었다. 매정하게 말하는 내용이 언제를 회상하는 것임을 모르지 않았다.
밤새 엉겨 붙었던 악몽 같은 밤, 새벽 달빛에 창백하게 질려서 반테온을 내려다보던 델로즈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날 반테온이 봤던 델로즈의 마지막 모습이 의기소침해져 멀어지는 등이라면, 델로즈가 기억하는 반테온의 마지막 모습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을까.
자신을 강간범이라고 표현하는 그의 목소리엔 고통인지 절망인지 모를 감정이 녹아있었다.
“네 바람대로 공적인 관계로 남고 싶다면 정말 각오하고 거리를 두는 게 좋을 거야. 오늘 같은 예외도 두지 마. 조금의 빈틈이라도 생긴다면…… 나도 모르게 매달릴지 모르니까.”
매몰차게 들리는 목소리에 그렇지 않은 내용을 뱉는다. 여전히 고통스러운 표정 너머로 딱딱하게 굳은 눈동자가 감긴다.
“나에 관해 필요한 내용이 있다면 페턴에게 물어봐. 어지간한 건 그 녀석이 다 알고 있을 테니까. 네가 묻는다면 다 답해줄 거다.”
다시 등을 돌려 멀어지는 발걸음을 도저히 잡을 수가 없었다. 일반인 입장이 통제되어 아무도 없는 복도에 델로즈의 긴 그림자만 흔들리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내민 손을 처음 거절당한 감각이 형언할 수 없이 복잡하다. 괜히 자신의 손바닥만 내려다보고 쥐었다 폈다를 반복한다. 반테온은 그저 위험에 빠진 자신을 구해준 델로즈에게 감사를 남기고 싶었다. 그 생각뿐이었다.
가벼운 감사 인사, 혹시나 모를 안부를 묻는 안부 인사. 안면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나눌 수 있는 평범한 대화를 나누려 했다. 그 말조차 델로즈는 자신을 흔드는 말이라 느꼈다.
앞으로 공적인 일 외 모든 행위를 자제하자는 델로즈의 말은 분명 반테온이 바라던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가장 바라던 일이 실현될 상황인데 왜 기쁘지 않은 걸까.
***
“형님. 이건 오른쪽에 둘게.”
연구원들은 로한을 분석하기 위한 연구에 동원되었고, 행정부는 로한과 연루된 직원을 파악하기 위해 대대적인 재조사에 들어갔다. 자연스럽게 센터의 모든 일정은 일시 중지되었다. 가능한 자신의 숙소에 머물고 외출을 자제하라는 권고가 떨어진 가운데 반테온이 할 수 있는 일은 적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숙소와 서재에 머물기엔 머릿속에 혼란한 일들로 가득하다. 당분간 센터에 머물기로 한 동생을 부려 먹기로 했다. 로한의 정체와 관련 있을 것 같은 서류를 모두 찾았다. 전에는 센터 도서관 내부에서만 조사할 수 있었으나 이동이 쉬운 동생을 부려 먹으면 저택 도서관에 있는 서류부터 왕실에 배치된 금서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 두 줄이 왕실에서 가져온 내용. 금서로 분류되니까 절대 유출하면 안 돼.”
“그래. 구하기 어려웠을 텐데 고생했어.”
“다 우리 자기가 능력 있는 덕이지.”
혈육의 애인 자랑만큼 듣기 괴로운 것도 드물지만 이번만은 도움을 받았기에 못 들은 척 외면했다. 반테온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하여도 왕족만 볼 수 있는 금서를 받은 건 동생의 가이드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뭐, 실마리는 나올 것 같아?”
“이제부터 찾아봐야지. 센터의 자료는 생각보다 쓸만한 게 없었거든.”
“그럴 만도 해. 이걸 누가 믿겠어. 정신계 에스퍼에 그림자가 없는 사람이라니.”
남들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면 정신이 나갔냐고 되물을 말임에도, 실제로 겪었으니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걸 알기에 베이론도 투덜거리면서 충실히 자료를 모아왔다.
베이론은 서류 작업은 작성이 아니라고 몸을 비틀면서도 반테온의 지시대로 정리했다. 부지런히 움직인 덕에 산처럼 쌓인 서류가 얼추 정리되었다.
“대단하긴 하더라. 사실 만나보면 한 번 제대로 붙어보려고 했는데, 엄두도 못 내겠던데?”
“응?”
“SS급 에스퍼 말이야.”
뜬금없이 델로즈의 이야기를 꺼낸 베이론은 손을 움직이면서 중얼거렸다.
“형님 믿고 치근덕대 보긴 했는데, 아니었으면 말도 못 붙이겠더라. 세상이 참 불공평해.”
“네가 그런 말을 하니 이상하네.”
세상 모든 혜택을 타고 태어난 동생이 세상을 탓하다니. 자신이 남들에게 하소연하면 이런 느낌일까. 투정 섞인 말에 슬쩍 웃으며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그 정도로 강해 보여?”
“어느 정도 비빌 구석이 보여야 파고들 텐데 틈이 하나도 없달까. 분명 가만히 서 있는데 날 누르고 있는 것 같아.”
“난 잘 모르겠던데. 압박을 느낀 적은 없어서.”
무표정하게 있을 때 인상이 사납다거나, 행동이 거칠다는 생각은 한 적이 있으나 베이론이 표현한 느낌은 받아본 적이 없다. 고개를 흔들자 베이론이 피식 웃는다.
“그렇게 사랑받고 있다고 티 내지 않아도 되거든?”
“그런 거 아니야.”
“보기 좋은데 왜 자꾸 거절해. 형님 취향이 아니라서?”
“…….”
“취향 다 부질없다니까. 그러다 다른 가이드에게 가면 서운하다?”
“그럴 리가.”
다른 가이드를 만나라며 등 떠밀고 자리까지 비워준 반테온이다.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베이론에게 즉답하자,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코웃음이 돌아왔다. 자신의 가이드를 심장처럼 아끼는 동생은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반테온과 델로즈는 그런 애틋한 사이가 아니었다.
시작부터 꼬이고 꼬여서, 겨우 잘해보자 싶으면 새로운 문제가 튀어나오는. 태생부터 모두 어긋난 그런 관계였다. 그날 불의의 사고로 델로즈가 폭주하지 않았다면 얽히지도 않았을 평행선의 존재다.
“다른 가이드가 나타나면 난 바로 인수하고 멀어질 거야.”
“진짜로 나타나야 형님 마음을 알 텐데. 그 전에 델로즈를 담당하던 가이드는 없어? 혹시 보게 되면 형님도 모르던 질투심이 살아난다던가…….”
“한심한 소리 하지 마.”
연애 소설을 너무 많이 읽었다. 누가 유치하게 전 가이드를 질투하는 짓을 한단 말인가. 생각만 해도 끔찍한 가정에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센터에 오자마자 한 번씩 테스트해본 가이드만 수십 명일 텐데. 기분 상하려면 벌써 상했겠지.”
“센터 오기 전에도 있었을 것 아니야. 발현하고 몇 년 지나고 센터에 왔다면서. 그 전엔 누구랑 가이딩 했대?”
“그냥 버텼다고 하더라.”
“뭐, 종종 평민 중에 발견 안 된 가이드들도 있으니까 그런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으려나. 더 아는 건 없어? 센터에 오기 전 이야기 같은 거.”
베이론의 질문에 분주하게 움직이던 손이 멈췄다.
“과거…….”
“응?”
“베이론 너 델로즈를 봤을 때 압박감을 느꼈다고 했지?”
“그렇지.”
“얼마나?”
빠르게 되묻자 베이론이 질문을 이해 못 했는지 얼굴을 찌푸리고 고개를 기울였다.
“뭘 물어보는지 모르겠어. 갑자기 왜 그래?”
“델로즈를 봤을 때 느낀 압박감과 로한을 봤을 때 느낀 정도가 같아?”
SS급과 정체도 모를 상대를 비교하라는 말에 베이론은 의아하면서도 농담도 꺼내지 못할 진지한 반테온의 분위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 녀석을 처음 봤을 땐 그냥 재수 없는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투할 때 분위기가 확 바뀌긴 했지. 압박감이 있긴 있었는데. 음, 아무리 그래도 델로즈에 비하면…….”
기억을 되짚으며 진지하게 턱을 괸 동생의 말을 기다린다. 왜 지금 로한의 말이 갑자기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나만큼 네 에스퍼에 관해 많이 아는 사람도 드물걸? 우린 동류거든.’
델로즈를 향해 동류라고 쉽게 말하던 로한과 그런 로한을 보며 날을 세우던 델로즈의 행동이 떠오른다. 마물이 하늘에서 비처럼 내렸을 때도 반테온을 보호하려 하였지 위기감을 느끼지 않던 델로즈다. 로한의 세뇌가 반테온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날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