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에스퍼를 피하는 방법 (100)화 (100/112)

#100

그런 의문을 가지고 찾아본 결과는 놀라웠다. 혹시 수명도 인간과 다르지 않을까 하는 기우와는 다르게 모두 인간과 비슷하게 40세에서 70세 사이에 사망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사인은 모두 자살.

매칭 한 가이드가 죽자 모두 따라 죽었다는 기록이었다. 자연적으로 수명이 다하여 죽은 자연 발생 에스퍼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자연 발생 에스퍼의 수명이 언제까지인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처음부터 성인의 모습으로 세상에 나타나는 생명체다. 수명이 인간과 같을 리가 없겠지. 어디서 태어나는지, 어떻게 태어나는지. 심지어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생명체.

베이론의 체감대로라면 로한도 SS급 에스퍼일 것이다. 기록에 남은 SS급 에스퍼는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오래전, 가이드의 부재로 폭주하여 죽었다고 알려진 첫 번째 자연 발생 에스퍼이자 첫 번째 SS급 에스퍼.

만약에 로한이 그 에스퍼라면,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도 가능하겠지.

‘내가 미친 건 아니겠지.’

최근 겪었던 일이 힘들어서 그릇된 판단을 하는 건 아니냐고 되물어도 결론은 똑같다.

말도 안 되는 가정이라 치우고 싶어도 최근 일어난 사건들이 이것이 진실이라 외쳤다.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사실에 비틀거리며 일어난 반테온은 단말기를 양손으로 쥐고 고민했다.

‘이 사실을 누구에게 이야기해야 하지? 아니, 이걸 믿고 들어줄 사람은 누가 있지.’

처음 반테온에게 에스퍼의 존재를 질문했던 센터장이라면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을지 몰랐다. 그렇다면 센터장에게 가야 할까?

잠시 흘러가던 생각에 머리를 강하게 저었다. 센터장을 믿을 수 없다. 센터장은 종종 반테온에게 이상한 질문을 했었다. 그자라면 질문을 던진 순간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가만히 사태를 지켜본 인물이다.

다음 후보는 델로즈. 당사자인 델로즈라면 사실을 알고 있겠지. 그에게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누구보다 뚜렷한 답을 내려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델로즈가 만약 사실이라고 이야기한다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건지 아직 마음이 바로 잡히지 않았다. 아직 얼굴을 마주 볼 용기도 나지 않았다. 그래도 이번엔 불편함 때문에 델로즈를 피하는 실수를 하면 안 되겠지.

이 상황에 가장 확실한 답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반테온은 단말기를 켰다. 숨을 한 번 들이쉬고 메시지를 남겼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니 만나고 싶어. 내일 내 서재에서 만나자.]

복잡한 심경으로 송신 버튼을 누르고 단말기를 꼭 쥐었다. 잠시 후 화면이 밝아졌다. 화면에는 하얗게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떴다.

벌써 답장이 온 것일까. 긴장되는 마음으로 화면을 누르자 짧은 문장이 떠올랐다. 발신인은 델로즈가 아니라 오랜만에 보는 사람의 코드였다.

[반테. 오랜만이야. 나는 이제 곧 수도를 떠날 거야. 염치없다는 건 알지만 마지막 배웅을 해줄 수 있을까? 괜찮다면 오늘 오후 4시에 서재 앞 정원으로 와줘. 기다릴게.]

최근 복잡한 일이 많아 잠시 잊고 있었던 테아로트의 메시지였다. 안 그래도 심란한 가슴 한구석이 돌덩이에 눌린 듯 불편해졌다. 지금처럼 복잡한 머리로 만나고 싶지 않은 상대다. 동시에 오랜만에 보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예전이라면 지금처럼 심란할 때 가장 먼저 찾아가서 사실을 공유했을 친우였으니까.

반테온은 한숨을 쉬며 단말기를 내려놨다. 그래. 로한이 잡혀있는 이상 더 위험한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 사실은 조금 늦게 밝혀도 괜찮겠지.

[그래.]

짧게 답장을 보낸 후 화면을 껐다.

***

가장 외지고 조용한 곳을 선택한 서재의 위치 탓에 햇살이 화사한 오후임에도 정원엔 아무도 없었다. 로한을 잡은 이후 불필요한 외부 산책을 금지했기 때문에 원래도 한가하던 정원엔 사람 그림자도 찾기 어려웠다.

그 사이 의자 위로 적갈색 머리통이 동그랗게 솟아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뒷모습에 숨을 가다듬고 다가간다. 이미 반테온이 온 걸 알면서도 테아로트는 조용히 앞만 바라보며 기다렸다.

“왔어?”

지척에 다가와 발소리가 멈추고 나서야 인사를 건네며 몸을 돌린다. 오랜만에 본 얼굴은 그전과 다를 것 없었다. 항상 봐오던 표정 그대로 머쓱하게 웃었다.

“어떤 얼굴로 봐야 하나 고민했는데, 보니까 또 좋네.”

“테아로트…….”

“오늘이 마지막이니까 좀 봐 줘.”

정리하지 못한 미련이 가득 남은 말투에 반테온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어쩔 수 없는 것일까. 시간을 들여 멀어지면, 멀리 떨어지면 괜찮을지도 모른단 예상이 무색하게 테아로트는 그대로였다.

“이게 좀 오래돼서…… 네가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쉽게 사라질 마음이 아니더라.”

“오늘 떠나는 거야?”

“아버지랑 한 판 하고 약속했거든. 여전히 정정하셔.”

테아로트는 손을 들어 가볍게 흔들었다. 팔목 아래로 시퍼런 멍 자국이 보인다. A급인 테아로트가 같은 등급의 아버지에게 일방적으로 맞았을 린 없으니, 자발적으로 처벌에 응한 것이리라.

“좀 처맞으면 정신이 들까 싶었는데. 그냥 아프기만 했어.”

“치료는 받았어?”

“이 정돈 침 바르면 나아.”

씨익 웃는 눈매 옆에도 자세히 보니 연한 멍 자국이 남아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다 큰 아들을 사정없이 매타작하셨나 보다.

“한심한 건 나랑 똑같으면서 나만 구박하셔. 알고 있지? 우리 아버지 아직 너희 어머니를…….”

“쉿.”

가족의 흠을 오픈된 곳에서 뱉는 테아로트를 제지했다. 귀가 밝은 자라면 공공연히 아는 사실이라 하여도 이런 곳에서 말할 주제는 아니다. 뜨끔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주변을 살펴보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야 다시 입을 열었다.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조절이 어렵네.”

“마지막이라고 하지 마.”

테아로트는 슬쩍 웃을 뿐 답을 돌려주지 않았다. 바보같이. 마음만 정리하면 얼마든지 돌아올 수 있는데 미리 마지막을 가정하는 태도가 답답했다.

“가면 언제 돌아올 거야?”

“글쎄. 마음이 정리되면 돌아오겠지.”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테아로트는 머뭇거리며 열었던 입을 몇 번 다물며 다시 고민한다. 기약 없는 망설임에 반테온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게 언젠데.”

“그래도 좀 기쁜데? 너라면 정리되기 전엔 돌아올 생각도 말라고 매정하게 말할 줄 알았는데. 내가 돌아오길 바라는 거야?”

매번 귀찮다고 타박하고, 실없다고 구박해도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유일한 친구이자 가족 같은 존재였다. 당연한 소리를 늘어놓는 그의 말에 짜증이 치솟았다.

“당연하잖아. 친구니까.”

“그렇지. 우린 친구였지.”

고개를 푹 숙이고 속으로 자조하듯 내뱉은 테아로트는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널 정말 친구로 생각할 수 있을 때 돌아올게. 시간은…… 약속하기 힘들고 그냥 노력은 해볼게. 기다려 줄 거지?”

“몰라. 생각해보고.”

“또 매정하게 말한다. 오래 못 볼 건데 좀 다정하게 말해줘.”

다정한 말을 들을 짓을 해야 다정한 말이 나오지. 저렇게 답답하게 구는데 상냥한 말을 바라다니 꿈이 컸다. 따뜻한 대답 대신 팔짱을 끼고 바라봤다.

“너도 마음대로 구는데 내가 왜 그래야 해.”

“그래. 그래야 너답지.”

비꼬는 말투에도 끝까지 미련이 넘치는 테아로트의 모습을 더는 보기 싫었다. 그의 말대로 정리가 되면 돌아오겠지. 매정하게 돌아서는 반테온의 뒤에 허탈한 테아로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동안 몸조심하고. 나 없어도 잘 지내겠지만, 그래도 종종 생각도 해줘.”

“안 할 거야. 무게 잡지 마. 그냥 여행 가는 거면서.”

다른 사람이 들으면 세상을 구하는 모험이라도 떠나는 줄 알겠네. 자기 마음 하나 간수 못 해서 떠나는 녀석이 말은 많았다. 전국을 떠돌면서 좋은 것, 맛있는 것들을 실컷 즐기면 저 딱딱하게 굳은 머리가 녹아 오겠지.

세상에 반테온 말고도 좋은 것들이 많다는 걸 깨달을 것이다. 등 뒤에서 소리치는 테아로트의 소리가 들렸다.

“델로즈도 조심해. 너무 가까워지지 말고.”

“신경 쓰지 마.”

대답 대신 몸을 돌려 손을 흔들었다. 잡상인을 쫓아내듯 팔을 올려 훠이 훠이 휘저었다.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테아로트의 동작이 딱딱하게 굳더니 눈이 커졌다.

“어…?”

테아로트는 무얼 보고 놀란 것인지, 시선을 고정한 채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뭐야, 너 무슨 일 있었어?”

“그런 거 없어.”

“없을 리가.”

테아로트가 빠른 걸음 다가와 반테온의 양어깨를 쥐었다. 정면으로 바라본 테아로트의 눈 속에는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감정이 일렁거렸다. 분노인지, 질투인지 알 수 없는 까만 감정이 가득 차 있었다.

반테온은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영문을 몰라 되물었다.

“갑자기 왜 이래?”

“너 손목에 이거 뭐야. 무슨 자국이야?”

테아로트가 거친 손길로 반테온의 팔을 잡아당기자 소매 사이에 하얀 맨살이 드러났다. 그 안에는 얼마 전 델로즈가 물고 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동그랗고 붉게 박힌 자국은 한눈에 봐도 입술로 만든 자국이었다.

긴 팔 아래 가려졌으리라 생각한 흔적이 손을 흔들 때 보인 것 같았다.

“그냥 부딪혔어.”

“장난쳐? 내가 부딪힌 거랑 이걸 구분 못 할 것 같아? 어떤 놈이 이랬어?”

“…….”

“케슬란, 아니 그 망할 꼬맹이도 좌천되었고, 한동안 새로운 상대를 만날 틈도 없…… 너.”

질투는 불씨가 되어 테아로트의 눈에서 새까만 불꽃이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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