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에스퍼를 피하는 방법 (103)화 (103/112)

#103

신경질적으로 외쳐도 테아로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반테온의 거절을 못 들은 척 다시 손을 뻗었다. 재차 뿌리치려 내민 팔이 잡힌다. 언제 장갑이 벗겨진 것인지, 반테온의 손이 드러나 있었다. 가이드와 에스퍼가 맨살로 닿는 접촉이다. 반테온이 거절하려 해도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기운에 이를 악물었다.

“조금만 이러고 있자.”

“급한 건 알겠는데 순서는 지켜야지.”

테아로트의 행동을 멈추게 만든 목소리가 반테온의 뒤에서 들렸다. 어딜 다녀온 것인지 모래투성이가 된 로한이 머리를 흔들며 다가왔다.

“준비 끝났어. 내려가지.”

“…….”

로한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자, 사막 사이에 텅 빈 곳이 열려 있었다. 테아로트의 부축에 받아 억지로 걸어가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고개를 빼고 끝이 보이지 않는 공간을 살폈다. 이내 로한이 망설임 없이 먼저 내려갔다.

뒤에서 대기하던 테아로트가 동의도 없이 반테온의 몸을 들었다. 놀라서 경직되는 몸을 아무렇지도 않게 안아 올리곤 그대로 로한의 뒤를 따랐다.

지하는 생각보다 넓었다. 위에 남아 있던 대리석 신전처럼 사방이 하얀 돌로 만들어진 공간이다. 중간중간엔 촛불이 꺼진 촛대가 세워져 있었다. 본 적도 없는 건축 양식과 낯선 광경에 잠시 심각한 상황을 잊고 두리번거렸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태양이 사라지고 반테온의 눈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을 두 사람은 거침없이 나아갔다.

지상의 열기가 잊힐 정도로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위치에 다다르자, 반테온의 시야에 거대한 물체가 보였다.

“이건…….”

유리처럼 투명하고, 크기가 엄청난 얼음이었다. 타는 듯한 사막 지하에 이런 물체가 있다니. 얼음에서 빛이 나오고 있어, 내부가 환하게 보였다.

거대한 얼음 안에는 익숙한 사람이 웅크린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눈앞에 선 로한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었다.

“이 모습으로 만나는 건 처음이지?”

“네 본체인가 보군.”

“역시 내 정체를 알아냈구나. 기특하네.”

사람을 우습게 보며 내뱉는 칭찬 따위 기쁘지 않았다. 로한은 과장되게 손을 들었다가 내리며 허리를 숙였다.

“정식으로 인사해야겠네. 나는 너희가 첫 번째 에스퍼라고 부르는 존재이자, 이 사막을 만든 최초의 SS급 에스퍼의 정신체지.”

로한의 본체는 아주 작고 마른 남자아이를 품에 소중하게 안고 얼음 속에 갇혀 있었다.

이러니 그림자가 없을 수밖에. 애초에 형체가 없는 존재였다. 그제야 풀리지 않았던 수수께끼가 해결되었다. 동시에 불안함이 가슴을 스친다. 정신체로 돌아다닐 수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도 못했으며, 정신체로도 강한 로한이 육체를 찾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제 봉인을 풀 거야. 넌 봉인이 풀린 날 가이딩 해주면 돼.”

“누구 마음대로?”

“언제까지 여유롭게 굴까. 네겐 선택지가 없다는 걸 알 텐데?”

로한의 말에 혀를 찼다. 그의 말이 옳다. 누구의 도움도 구할 수 없는 공간엔 이상해진 테아로트와 로한밖에 없었다. 결국, 그가 바라는 대로 흘러갈 테지.

힐끔 눈동자를 돌려 테아로트를 바라봤다. 두 사람끼리 미리 이야기된 내용인지 미동도 없었다. 반테온 혼자의 힘으로는 벗어나기 힘든 상황이었다.

“저 아이는? 쟤도 가이딩 해야 하는 거야?”

“…….”

반테온이 얼음 속 아이를 가리켰다. 로한의 본체가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는 아이였다. 그 손짓에 지금껏 평온한 표정이던 로한의 얼굴에 금이 갔다.

“아니. 저 아이는 에스퍼가 아니야.”

미세하게 균열이 생긴 표정이 잠시 괴롭게 일그러졌지만, 금세 평소대로 돌아온다. 눈이 잘못되었나 싶을 정도로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럼 누군데?”

“괴물의 첫 가이드. 그리고 마지막 가이드.”

사람답지도 않던 로한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숨을 잠시 고르고는 평소와 같은 말투로 이야기했다.

“뒤에 알게 될 거야. 일단 내 몸을 먼저 움직여 볼까.”

“잠깐만.”

반테온이 움직이려는 로한을 막았다.

“네가 첫 번째 에스퍼라면 폭주…를 했다고 들었는데.”

“맞아.”

“죽기 직전에 봉인된 건가?”

로한은 짙게 미소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일 아니라는 듯 여유로운 모습에 입술을 꽉 물었다.

“지금 폭주 직전의 SS급 에스퍼를 진정시키란 말이야?”

“죽진 않을 거야. 여러 번 해봤잖아.”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분명 폭주 직전의 델로즈를 가이딩 하면서 죽지는 않았다. 죽을 것처럼 아팠을 뿐이다. 그땐 완전히 가이딩 한 것도 아니었으며, 가이딩 후 며칠 동안 의학의 도움을 받았다. 이런 사막 한가운데에서 의료 기구도 없이 진행하는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다.

생명의 위협에 등골에 한기가 스민다. 몸을 뒤로 빼려다 뒤에 선 테아로트와 부딪혔다.

“너도…… 합의한 거야?”

“걱정하지 마. 필요한 약은 내가 챙겨왔어. 힘들겠지만 참아줘. 잠시만 잠들었다 깨면 우리 둘만의 세상이 되어 있을 거야.”

주머니에서 약통을 꺼내는 테아로트의 모습에 이를 악물었다. 델로즈를 진정시킬 때 먹었던 억제제와 차단제, 그리고 진통제가 있었다. 정말 딱 죽이지 않을 정도로 준비했네. 피할 수 없는 올가미가 발목부터 전신을 파고들었다.

선택지는 없다. 로한의 바람대로 그를 가이딩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걱정하지 마. 처음부터 완벽하게 요구하진 않을 테니까.”

“정말 눈물 나게 고맙네.”

먹잇감 생각해 주는 악어의 행동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럼 네 에스퍼가 찾아오기 전에 시작해볼까?”

델로즈를 언급하는 말에 무심코 하늘을 바라봤다. 돌로 이뤄진 천장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델로즈가 찾아올 수 있을까. 이럴 줄 알았으면 파트너 간 위치 추적 장치를 달자는 말에 동의할 걸 그랬다. 헛된 후회만 늘어 갔다.

“이리와.”

테아로트의 손에 끌려 강제로 얼음 앞에 도착했다. 얼음 속 두 사람의 모습이 자세히 보인다. 지금과 똑같은 로한의 모습과 얼음 속 작은 소년.

반테온은 손을 뻗어 얼음을 만졌다. 로한의 상태는 멀리서 봤을 때와 똑같았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본 소년은 피로 새까맣게 덮인 옷을 입고 있었다. 앙상한 팔과 다리엔 쓸리고 찢긴 상처가 가득했다. 옷을 물들인 피의 양을 봐도 생명이 위험한 상황이었을 터. 창백한 얼굴과 핏기가 없는 입술이 보였다.

“이 아이는 죽은 거야?”

“아직은.”

“얼음을 깨면 어떻게 되는 거지?”

“곧 죽겠지.”

묘한 기시감에 로한을 바라봤다. 조금 전, 로한이 소년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로한은 분명히 괴로워 보였다. 그리움과 고통이 가득한 목소리로 회상했는데, 지금은 죽어도 상관없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의아한 눈으로 바라봐도 로한은 언제나 같은 얼굴로 평온할 뿐이다. 잠시의 흔들림은 기분 탓이었을까. 그러기엔 소년을 안고 있는 로한의 몸짓은 간절하기 그지없다. 상처에 닿을까 조심스럽게 들어 올린 모습은 거짓이 아니었다.

“소중한 사람 아니야?”

“…….”

“아니면 마음이 식었어? 오래 봉인되다 보니 필요 없어진 거야?”

“시끄러워.”

일부러 소년을 건드리자, 바로 반응이 돌아온다. 은은하게 감돌던 미소가 사라지고 딱딱해진 눈매로 반테온을 응시했다. 심장의 위치를 들킨 골렘처럼 경직된 얼굴이다.

가이딩을 시도하지 않고 꿋꿋이 소년의 이야기를 묻자 굳었던 로한의 입매가 느슨해졌다.

“그렇게 궁금해?”

“널 가이딩 하면 내 수명도 많이 줄어들 텐데 그 정도는 들어도 되지 않을까?”

“그렇지.”

로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 번 끄덕이며 긍정하더니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는다. 눈동자가 기분 나쁘게 빛났다.

“하긴 모르고 진행하면 너도 억울할 테니까. 그냥 알려줄게.”

“…….”

“아직 죽지 않았지만, 네 말대로 많이 다쳤어. 피도 많이 흘려서 위험했지. 그래서…….”

무기질 같은 로한의 눈동자가 반테온을 향한다. 뱀의 동공처럼 길게 늘어졌다.

“남은 숨이 끊어지기 전에 새로운 육신을 줄 거야. 저 상처 입고 낡은 몸과 다르게 아름답고 건강한 것으로 말이야.”

징그러운 시선이 반테온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고 내려갔다. 보석을 품평하듯 징그러운 눈빛에 움츠러들려는 어깨를 오기로 폈다.

“대륙에서 가장 아름다운 은발에 호수같이 푸른 눈이면 좋겠지.”

“…….”

로한의 번들거리는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반테온은 눈살을 찌푸리며 반사적으로 은발로 덮인 자신의 목을 감쌌다.

“무슨 개소리야!”

뒤에서 테아로트가 소리쳤다. 로한의 말에 배신감 가득한 눈을 이글거리며 반테온의 앞을 막아섰다.

“약속이 다르잖아! 가이딩이 끝나면, 반테온은 내게 넘겨주겠다고 약속했을 텐데?”

“물론 넘겨줄 거야. 물론 육체는 좀 바뀌겠지만. 아, 바뀐 후 죽을 수도 있는데 그것까진 약속한 적 없잖아.”

능글맞게 웃으며 뱉은 로한의 말에 테아로트 주변에 붉은 기운이 차올랐다. 사방을 채울 듯 부푼 기운에도 로한은 여유롭게 웃었다.

바보 같은 녀석. 애초에 로한 같은 녀석을 믿은 것부터 잘못된 거다.

그제야 로한의 속셈을 알게 된 테아로트는 치아가 갈리도록 입을 강하게 다물었다. 반테온 앞에 선 등이 거칠게 요동쳤다. 그대로 주먹을 꽉 쥐고 몸을 숙였다. 찢어지는 시선으로 지그시 로한을 노려보더니 양발로 바닥을 차고 빠르게 도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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