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테아로트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빠른 속도로 달려들었지만, 로한의 손끝에 가볍게 제지당했다. 당연한 이야기다. 애초에 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힘의 격차가 존재했다.
“헉…….”
로한이 한 손으로 가슴팍을 짚고 가볍게 미는 동작만으로 테아로트의 허리가 꺾였다. 테아로트가 가쁜 호흡을 내쉬며 바닥에 무릎 꿇고, 쓰러진다. 일격에 반쯤 풀려버린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기도 힘든 짧은 시간에 테아로트는 모든 기력을 뺏긴 노인처럼 바닥을 짚고 사지를 떨었다.
호기롭게 덤빈 행동에 비하면 초라한 결말이었다.
한 손을 허리에 짚은 로한은 쥐를 가지고 노는 고양이보다 한가해 보였다. 기분이 좋은지 씨익 웃더니 아량을 베풀듯 거만하게 말했다.
“지금까지 도와준 건 고마우니 살려는 줄게.”
“개……새끼…….”
“쓰러지면 안 돼. 정신 차려야지. 그래야 몸이 바뀐 후에 네 소중한 사람을 살릴 것 아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얼음 속 소년은 이미 생명이 없는 것처럼 창백한 얼굴로 굳어 있었다. 몸이 바뀐다면 길어도 몇 분. 아니 바로 즉사할지도 몰랐다. 센터의 의료 기술이 있어도 힘들 상황에 여기 있는 거라곤 알량한 알약 몇 조각.
테아로트가 멀쩡하게 정신을 유지해도, 반테온에게 남은 미래는 하나였다.
지금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 반테온의 입가에서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 나온다.
모든 사람이 부러워할 인생으로 태어나서 마지막엔 악당에게 몸을 뺏겨 죽는다니. 삼류 극본으로도 쓰지 못할 우스갯소리였다.
너무 화가 나면 머리가 차가워진다고 하던가. 반테온은 냉정해진 머리로 자기 일이 아닌 것처럼 상황을 바라봤다.
위기를 벗어날 방법이 있을까? 사막 한가운데서 자신의 몸을 뺏으려는 SS급 에스퍼와 쓰러진 A급 에스퍼.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가이드의 몸을 가지고.
고개를 숙인 채 부들부들 떨기만 하는 테아로트에게 흥미를 잃었는지, 로한은 반테온을 바라보며 거만하게 이야기했다.
“유언이라도 남기려면 남겨.”
“필요 없어.”
“하하하. 마지막까지 정말 마음에 드네. 우리 애도 너처럼 당돌할 때가 있었거든. 종종 그리웠어. 이제 곧 볼 수 있겠지.”
죽음 앞에 선 사람에게 과거 얘기나 하며 시시덕거리던 로한은 웃음을 멈추고 순식간에 표정을 바꿨다. 인간의 탈을 쓴 뱀이 허물을 벗었다.
“그럼 농담은 여기까지 하고 이제 시작할까?”
로한이 반테온의 팔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몸에 힘을 주어 버티려고 했지만, 허망하게 끌려갔다. 로한의 손이 닿자, 얼음에서 천천히 물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약했던 물줄기가 빗줄기처럼 거세졌다가, 이내 폭포처럼 흘러 바닥을 흥건하게 채웠다.
그 위로 반테온의 손이 올려졌다.
얼음이 조금 더 녹으면 이 손은 로한의 본체와 닿을 것이다. 의지와 상관없이 가이딩이 진행되고, 모든 것이 끝나면 저 소년과 바뀌겠지.
반테온의 시선이 쓰러진 테아로트를 향했다. 바닥에 엎드린 채 몸을 일으키지 못하는 그와 시선이 부딪혔다. 광기에 젖었던 눈빛이 괴롭게 일그러져 있었다.
익숙한 눈빛이다. 테아로트는 매번 스스로 자책할 때 저런 표정을 지었다. 홀로 에스퍼로 발현하고 미안하다 사죄할 때도 저런 얼굴이었지.
“작별 인사라도 해.”
“…….”
작별 인사라는 말에 왜 눈앞의 테아로트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떠오를까. 일그러진 테아로트의 얼굴 위로 까만 머리카락이 겹쳤다. 사나운 금안이 아프게 일그러지는 모습이 선하다.
이렇게 사라질 몸인 줄 알았으면, 괜한 고집 피우지 말고 한 번이라도 더 가이딩 해줄 걸 그랬나. 조금이라도 더 버틸 수 있게. 거래니 계약이니 하는 쓸데없는 고집은 치우고 대해줄걸.
뒤늦은 후회가 심장 위에 무겁게 가라앉았다.
결국, 녹은 얼음 사이로 로한의 본체가 드러났다. 반테온은 손에 닿는 사람의 감촉에 눈을 질끈 감았다. 오랫동안 얼어서 딱딱하고 차가운 로한의 팔은 시리게 차가웠다. 지금껏 본 적 없던 로한의 붉은 기운이 반테온을 향해 쏟아지는 순간, 세상이 거꾸로 돌았다.
“반테!”
속을 뒤집는 기운에 구역질이 치솟는다. 목을 조이는 듯한 압박감이 들고, 전신의 혈관이 터질 듯 박동 쳤다. 선연히 느껴지는 고통에 꽉 감은 눈가가 달아오른다.
녹아내리는 물줄기에 떨어진 눈물이 섞이고, 목을 가누기 힘들 만큼 무거운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정신이 까맣게 사라지는 경험을 최근 자주 겪었다. 이번엔 기절로 끝나지 않겠지만.
내가 죽으면…… 많이 슬퍼하겠지.
희미한 정신 속에서 하늘에서 빛이 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
창가에 드는 햇볕이 따뜻했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아도 늦은 봄이었던 것 같다.
“반테는 의젓하니까. 혼자서도 괜찮지?”
어머니는 언제나 힘이 없으셨다. 앙상한 손가락에 창백한 얼굴로 상냥하게 웃으셨다. 병약한 눈꼬리엔 항상 미안함이 가득했다.
“저는 괜찮아요.”
매번 똑같이 대답했다. 이미 힘든 분에게 짐을 얹기 싫었으니까. 괜찮지 않아도 괜찮은 척 의연하게 웃었다. 그렇게 대답할 때마다 어머니의 얼굴은 더 어두워지는 걸 어린 반테온은 몰랐다.
“베이론을 부탁할게. 어린 네게 이런 부탁만 해서 미안하구나.”
“걱정하지 마세요.”
반테온은 자신이 어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은 혼자 밥을 먹을 수 있었고, 나무도 오를 수 있었다. 이제 겨우 기둥을 잡고 일어서는 동생과는 달랐다. 당연히 베이론은 반테온이 챙겨야 하는 연약한 동생이었다.
의젓한 대답에도 어머니는 매번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자신이 미덥지 못한 것일까. 속상한 마음이 올랐다.
“저는 이제 다 컸는걸요. 그렇죠. 아버지?”
“그래.”
동의를 구하는 말에 아버지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아버지의 시선은 오롯이 어머니를 향하고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달랐다. 아버지는 반테온과 베이론을 바라본 적이 없었다.
서운하진 않았다. 어머니는 아프시니까. 자신과 동생은 건강했다. 약도 먹지 않았고, 열도 나지 않았다. 아버지의 행동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아버지도 너희를 사랑하신단다’라고 말씀하셨으니까. 그러니 괜찮았다.
그날은 어머니가 매우 아픈 날이었다. 종종 오르던 열이 3일 동안 내리지 않고 계속되었고, 말보다 거친 기침을 많이 뱉었다. 저택에 상주하던 주치의 3명이 모두 고개를 저으며 어머니의 침실을 떠났다.
방으로 돌아가라는 유모도 물리치고 닫힌 방문 앞에 한참을 쪼그려 앉아있었다. 평소와는 다르다. 어린 반테온도 그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형아…….”
이제 제법 두 발로 뛰고 말도 곧잘 하는 베이론이 어눌하게 말하며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원래라면 베이론과 놀아줄 시간이던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쪼그려있던 몸을 일으켰다. 뒤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베이론의 유모를 안심시키고 어린 동생을 안아 올렸다.
“엄마 아파?”
“아니야.”
동그란 등을 토닥였다. 말랑한 볼때기가 뺨에 닿자 심란한 마음이 가라앉았다. 어머니가 아픈 건 한두 해가 아니니까. 이번에도 괜찮을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내일이면 웃으며 상냥하게 이름을 불러 주겠지.
“엄마 볼래.”
베이론이 반테온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투정 부린다. 맑고 동그란 눈동자와 마주치자 마음이 편안해진다. 어머니도 동생을 보면 힘이 날지도 몰랐다.
어머니는 반테온과 베이론을 아꼈으니까. 둘이 함께 가서 응원한다면 마법처럼 힘이 나서 번쩍 두 사람을 안아줄지도 몰랐다.
반테온은 닫힌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안쪽에는 침대에 누워있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등이 보였다. 동생의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발을 들였다.
“나가!”
천둥 같은 호통이 떨어졌다. 세 걸음을 채 걷지도 못하고 제자리에 멈췄다. 아버지가 소리친 건 처음이다. 따뜻하진 않아도 엄하진 않은 분이었다. 낯선 모습에 반테온은 제대로 반응하지도 못했다.
“어, 어머니를 보려고…….”
“너희만 아니었으면 아플 일도 없었어! 이깟 핏줄 따위가 뭐라고!”
아버지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혼란한 머릿속에선 어떤 말도 해석하지 못했다. 그저 화가 난 아버지가 자신들에게 소리쳤다는 충격이 망치처럼 온몸을 내리쳤다.
“흐아아앙”
어린 베이론이 놀라서 울음을 터트리지 않았다면, 그 소리를 들은 유모가 재빠르게 들어와 두 사람을 끌어내지 않았다면 반테온은 그 자리에서 영원히 석상처럼 굳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때 그의 심장 반쪽이 돌로 변한 걸지도 모르겠다.
그 후의 기억은 희미했다. 어떻게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는지, 그날이 어떻게 지났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만은 분명했다. 어머니는 거짓말을 했다.
아버지는 자신들을 사랑하지 않았다.
반테온은 엉엉 우는 동생을 끌어안고 다짐했다. 내가 동생을 지켜야 한다. 자신은 괜찮다. 반테온은 이미 다 컸으니까. 엄마 말대로 의젓하게 자랐으니까. 하지만 동생은 다르다. 아직 어리고 보살핌이 필요한 어린아이였다.
그러니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려면 더 강해져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