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아무도 믿지 말고, 누구에게도 기대지 말자. 남에게 의지하니까 실망하는 것이다. 자신을 믿는 어리고 약한 것들을 지켜야 했다.
자신보다 강한 것은 피하자. 자신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것들을 모두 배척하고 살자. 굳어버린 심장이 다시 상처받지 않도록, 무슨 일이 있어도 약한 것들은 지킬 수 있도록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이불 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몸을 웅크리고 그렇게 울었다.
다음 날, 에슬란테 저택에는 장례를 알리는 까만 깃발이 걸렸다. 며칠 후 아버지의 죽음을 알리는 까만 깃발이 성벽 위에서 함께 휘날렸다.
***
눈물이 흐른다. 축축한 액체가 귓바퀴를 타고 바닥에 떨어졌다. 사지가 따로 떨어진 듯 팔다리에 감각이 없었다. 겨우 눈꺼풀을 올리는 행동에도 관자놀이가 찔린 듯 아팠다.
“흐…….”
폐 깊숙한 곳에서 신음이 올라온다. 뱉은 숨에 섞인 괴로움에 자신을 가리던 그림자가 움직였다.
“반테? 정신이 든 거야? 아…… 다행이다.”
물기 어린 목소리가 탄성을 질렀다. 반테온의 몸 위에 차가운 물방울이 떨어졌다. 아픈 건 난데 왜 네가 울고, 난리냐고. 따지고 싶어도 입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미안해. 정말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바보 같은 테아로트. 항상 그랬다. 똑똑한 척, 신경 써서 챙기는 척 생색은 다 내면서 언제나 마무리가 허술했다.
“바…보야.”
“네가 눈을 못 뜨는 줄 알았어. 다시는 못 보는 줄 알았어.”
이번엔 정말로 그럴뻔했다. 천천히 돌아오는 시야 속에서 반테온은 자신이 왜 살아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겨우 감각이 돌아오는 팔을 움직여 들었다.
눈에 보이는 손은 분명히 자신의 것이다. 길고 단정한 손톱과 하얀 피부는 얼음 속 소년과 다르다. 로한이 쉽게 소년을 포기할 것으로 보이진 않았는데, 어떻게 멈춘 것일까.
반테온이 궁금해하던 답은 다른 곳에서 들렸다.
-쾅!
하늘이 무너지는 굉음이 들렸다. 먼 곳에서 들리듯 울리면서 가까이에서 터지듯 거대하다.
“델로즈가 왔어.”
테아로트가 허탈하게 대답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과 미련을 완전히 접은 허무함이 섞였다.
“개자식의 가이딩이 끝나고 나머지 얼음을 녹이려던 찰나에 나타나더라.”
“너는 왜 그랬어?”
“네가 너무 탐나서.”
무심하게 나온 말에 테아로트를 바라봤다.
“그거 알아? 난 처음에 네가 너무 미웠어. 너희 어머니가 우리 아버지를 뺏어간 것 같았거든.”
테아로트의 아버지는 다른 사람과 이미 결혼을 했으면서도 반테온의 어머니를 사랑했다. 아무리 사랑이 없는 정략결혼이었다고 하여도 유부남이 다른 사람을. 그것도 형의 부인을 사랑하다니. 펠아토의 복잡한 마음은 알 수 없지만, 테아로트의 가정이 그리 평안하지 않았다는 건 들어서 알고 있었다. 어린 테아로트에겐 당연한 원망이었다.
“아버지가 빠진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가 싶어서 본가에 몰래 찾아갔다가 혼자 있는 널 봤지. 보자마자 다른 생각은 다 사라지더라.”
“그때부터 멍청했네.”
“그러게.”
맥 빠지게 돌아오는 대답에 작게 웃었다. 이렇게 한가한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아무 일도 없던 예전처럼 테아로트와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과거는 되돌릴 수 없다.
“넌 이제 어떻게 할 건데.”
“글쎄. 자수할까?”
“유언이라도 들어줄까?”
“그래 주면 고맙지.”
중죄인을 풀어주고 반테온을 납치했다. 센터 중요 정보를 유출하기도 했다. 하나만 저질러도 사형인 중죄를 여러 건 저질렀으니, 사형을 면하기 어려웠다. 곱게 단두대에 오르는 것도 사치겠지.
힘이 들어가지 않는 입술을 꽉 물었다.
“왜 그랬어. 멍청아.”
“…….”
“진짜 왜 그랬어.”
뒤늦은 원망이다. 힘이 남았으면 멱살을 잡고 흔들고 싶은 심정으로 외쳤다. 바보 같아도 하나뿐인 친우다. 미련해도 가족 같은 친구다.
감각이 돌아오는 몸을 일으켜 기대어 앉았다. 아직도 뒤섞인 속이 움직일 때마다 요동친다. 덜덜 떨리는 팔로 겨우 몸을 지탱했다. 부축하려 다가오는 손을 쳐냈다. 테아로트는 대답 없이 씁쓸하게 웃었다.
허탈한 그의 고개 뒤로 거대한 모래 폭풍이 일어난다. 반테온의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모래 소용돌이 안에서 두 명의 SS급이 맞붙고 있었다. 반테온은 속이 보이지도 않는 모래 폭풍을 응시했다. 과연 누가 이기게 될 것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델로즈는 이기기 힘들 거야.”
“뭐?”
테아로트는 반테온과 같은 방향을 바라봤다.
“같은 등급이라고 해도 경험이 다르니까. 이제 자연 발생 에스퍼에 관한 건 알아냈지?”
“그래.”
“로한은 정신체로 이미 수백 년을 살았어. 그에 비하면 델로즈는 태어난 지 몇 년 되지 않았으니까.”
같은 힘을 지녔어도 숙련도에 따라 힘의 차이가 극명하게 났다. 선생님 위치에서 갓 발현한 에스퍼부터 숙련된 에스퍼까지 살펴본 반테온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테아로트의 말대로 델로즈는 로한을 이기기 힘들었다. 정신계라고 해도 육체적 능력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걸 베이론을 통해 들었다. 정신체일 때 동등한 상태라 하였으니 몸을 찾은 지금은 승산이 없겠지.
센터에 잡혀 왔을 땐, 반테온을 노리기 위해 고의로 져줬을 것이다. 붕대를 감고 있던 델로즈와 멀쩡하게 묶여 있는 로한의 모습을 보면서도 왜 그 생각을 못 했는지, 한심할 지경이다.
반테온은 멀리서 거대하게 일어나는 모래 폭풍을 바라봤다. 안에서 치열한 전투가 일어나고 있을 테지.
이길 수 없다는 걸 알아도 델로즈는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패배를 예상하면서도 끝까지 싸우겠지. 반테온이 여기에 있으니까.
테아로트는 자신의 품에서 작은 약병을 꺼냈다. 병을 부어 억제제와 차단제를 쥐었다.
“이거 먹어. 좀 괜찮아질 거야.”
“치워.”
테아로트가 내민 알약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하얀 약이 모래 구덩이를 굴렀다.
“반테!”
약 따위를 먹을 때가 아니었다. 움직여야 했다.
떨리는 팔을 움직여 벽을 짚었다. 움직이려 다리에 힘을 줬지만, 갓 태어난 사슴처럼 덜덜 흔들린다. 말을 듣지 않는 몸뚱이에 이를 악물었다. 몸을 일으키자마자 울컥거리며 투명한 위액을 토해냈다.
“으….”
목구멍에 남은 신맛에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움직이려 하자, 테아로트가 안절부절못하며 뒤에 붙었다.
“내가 미운 건 알겠는데. 이건 제발 먹어 줘. 이러다가 큰일 나.”
울먹일 듯 애원하는 테아로트를 무시하고 소매로 입가를 닦았다. 기분은 더러워도 정신은 돌아왔다.
지금 약을 먹으면 안 된다. 아직 반테온에게는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다시 약을 꺼내는 테아로트를 뒤로하고 천천히 걸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전신이 비명을 지른다. 몸의 고통에 정신이 잠시 돌아오고 사라지고를 반복했다.
테아로트에게 납치당했을 땐 늦은 오후였다. 사막에선 눈을 떴을 땐 새로운 해가 뜨고 있었으니 날이 지난 것이겠지. 지금은 그 해가 다시 지고 있었다. 반테온이 기절했던 시간을 생각하면 델로즈와 로한은 벌써 몇 시간째 맞붙고 있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델로즈가 불리했다.
“가야 해.”
두 사람의 전투로 지하에 있던 건축물 일부가 표면 위로 올라왔다. 반테온이 누워있던 곳도 그렇게 올라온 건물 바닥이었다. 다시 이 아래로 내려가야 로한이 봉인되어 있던 공간이 나왔다.
그곳에 가야만 했다.
걸을 때마다 자극받은 속이 한 번 더 뒤집혔다. 걸음을 멈추고 다시 벽을 잡았다. 재차 올라오는 위액을 바닥에 뱉어낸다. 투명한 위액에 벌건 피가 섞여 나왔다.
“반테… 피가 나. 진짜 위험해.”
고개를 푹 숙이며 애원하는 테아로트를 무시했다.
“이러다 진짜 죽어.”
“시끄러워.”
반테온의 시야는 테아로트와 다르게 붉었다. 바로 옆에 A급인 테아로트부터, 먼 곳에서 요동치는 SS급 두 명의 기운까지. 한껏 예민해진 반테온에게 저 기운은 독이다. 여기에 계속 머물다간 테아로트의 말대로 죽을지도 몰랐다.
그게 뭐가 어때서?
죽을 걸 알면서 싸우는 멍청이가 이미 저기 있는데, 반테온이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멀리서 거대하게 이는 모래 폭풍을 바라봤다.
점차 가까워지는 위치에 마음이 조급해진다. 델로즈는 가능한 반테온에게 멀어지려 할 것이고, 로한은 다가오려 하겠지. 두 사람이 반테온이 있는 곳과 가까워진다는 건 델로즈가 밀리고 있다는 뜻이다.
“방해하지 마.”
애타게 바라보던 테아로트의 고개가 떨어졌다. 기운 없이 늘어진 어깨를 밀어내고 천천히 계단은 밟았다. 모래알이 굴러서 저 아래로 떨어진다. 자리에 기둥처럼 멈췄던 테아로트는 세 걸음 떨어진 곳에서 뒤를 따라왔다. 그것까지 말릴 기력은 없기에 무시하고 걸었다.
격렬한 전투 때문에 지상으로 드러난 구조물이 태양 아래 반짝였다. 기둥 사이사이에 말라붙은 화분의 흔적과 카펫을 보면 사막이 생기기 전에 번화했던 과거가 짐작되었다.
“왜 여길 다시 온 거야?”
반테온이 기절하기 전 마지막 있던 공간에 도착했다. 아직 녹다 만 얼음이 남은 벽이 태양에 반사되어 사방으로 반짝였다. 눈에 보이는 것처럼 흔한 얼음이라면. 몇 초도 버티지 못하고 녹았어야 했다. 얼음은 여전히 굳건하게 똑같이 버티고 있었다. 로한의 육체만 빠져나간 채, 상처 입은 소년만 품은 상태 그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