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에스퍼를 피하는 방법 (106)화 (106/112)

#106

이걸 어떻게 녹여야 할까. 충격에는 약하지 않을까. 날카로운 것을 찾아 주변을 헤매는 모습에 테아로트가 다가왔다.

“내가 할게.”

제안을 거절하고 싶었으나 반테온의 힘으론 무리였다. 열과 빛에 녹지 않는 얼음이라면, 에스퍼의 힘에 반응하는 구조일 것이다. 예상대로 테아로트가 얼음에 힘을 불어넣자 천천히 녹아내렸다. 얼음 앞에 선 테아로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로한의 힘에는 폭포처럼 흘러내리던 물줄기가 이슬처럼 맺혀서 방울진다. 확연한 힘의 차이에 얼음이 녹는 속도가 느렸다. 테아로트의 얼굴이 찌푸려진다. 힘든 작업에 투정이 나올 만도 한데, 이마에 땀을 흘리며 묵묵히 얼음을 녹였다.

천천히 녹던 얼음에 금이 갔다. 가느다란 실처럼 그이던 균열은 점차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퍼졌다. 투둑. 바닥에 떨어지는 얼음 조각을 밟자 발바닥에서 시린 한기가 느껴졌다.

두꺼운 신발 밑창을 뚫고 올라오는 냉한 기운에 혀를 찼다. 수백 년 동안 유지된 얼음이다. 쉽게 깨지진 않겠지. 시간이 한참 지나자 드디어 소년의 신체 일부가 밖으로 드러났다.

반테온은 떨어진 얼음 조각 사이로 형태를 보이는 창백한 손가락을 잡았다. 마른 나뭇가지처럼 빳빳했다.

“쯧.”

바보같이. 이곳엔 미련한 놈들뿐이다. 에스퍼라는 것들은 왜 이렇게 한심하고, 가여울까.

반테온은 균열이 보이는 얼음 조각을 있는 힘껏 부쉈다. 과격한 태도에 테아로트가 손을 들어 만류했다.

“이 아이 다친 상태라서 그렇게 깨면 위험할지도 몰라.”

“상관없어. 이미 죽었으니까.”

잔뜩 차가워진 손가락을 잡자 알 수 있었다. 얼어붙은 것과 감촉이 다른 딱딱함과 등 쪽으로 벌겋게 모인 핏기는 이미 사후경직이 온 시체였다.

이미 죽어버린 가이드를 끌어안고 수백 년을 떠돌다니. 한심한 것도 정도가 있지. 괜한 답답함에 짜증이 날 것 같은 미련함이다. 반테온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빠진 테아로트 역시 어두운 시선으로 어린 소년을 바라봤다.

“이걸 확인하고 싶어서 내려온 거야?”

“꺼내.”

대답 없이 지시를 내렸다. 테아로트는 반테온의 반응에 씁쓸하게 웃으며 얼음 속 소년의 팔을 쥐었다.

얼어붙은 몸은 쉽게 꺼내기 힘들었다. 이미 기력이 다한 테아로트가 겨우겨우 소년의 몸을 꺼내어 바닥에 옮겼다.

가까이에서 보니 더 확실하다. 어린 티를 벗지 못한 남자아이. 온몸이 난도질당하고 피를 흘린 채 얼어버린 가여운 아이.

채 수습도 하지 못하고 얼음에 갇혔는지 흐트러진 복장을 정리하려고 손을 뻗었다. 소년의 몸에 손이 닿으려는 순간, 멀리서 점차 가까워지던 폭발음이 바로 옆에서 들렸다.

건축물 한쪽이 무너지며 거대한 모래 폭풍이 생겼다. 그 여파로 반테온이 서 있는 벽 바로 왼쪽에 균열이 생겼다.

“……!”

아슬아슬하게 옆을 스쳐 무너지는 대리석을 피해 뒤로 물러섰다. 건조한 바람을 몰고 온 로한이 벽 사이로 저벅저벅 걸어왔다. 봉인이 풀린 후 처음 보는 모습에 침을 삼켰다.

창백한 얼굴 중앙에 피처럼 불길하기 빛나는 붉은 눈동자와 산발이 되어 날리는 금발은 인간보다 마물에 가까웠다. 과하게 부푼 근육이 충격의 여파에 꿈틀거렸다. 그가 걸을 때마다 그림자가 함께 움직인다. 다른 에스퍼와 똑같이 붉은 기운이 넘실거리는 완벽한 본체의 모습이었다.

“거기서 떨어져!”

로한이 이를 갈며 고함을 질렀다. 성난 핏줄이 주먹부터 목덜미까지 흉측하게 올라왔다. 심장을 찔린 짐승의 포효였다. 짐승의 시선은 얼음 밖으로 노출된 소년의 몸을 향해 달렸다.

당장이라도 반테온을 찢어 죽일 것 같은 위세에 침을 삼켰다.

처음 얼음을 깰 때 세운 계획과 일치했다. 반테온은 단순히 소년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힘든 몸을 끌고 아래로 내려와, 번거로운 일을 벌인 게 아니었다. 애초에 로한을 이곳으로 부르기 위해 저지른 행동이었다.

로한의 몸에서 쏟아지는 붉은 기운에 숨이 턱 막히는 목을 가다듬고 시체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섰다.

델로즈가 이기면 그의 손에 구조될 것이고, 델로즈가 지더라도 테아로트의 도움을 받아 기력이 빠진 로한에게서 도망칠 수 있겠지.

그걸 알면서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남이 구해주기만을 기다리다니, 우스울 정도로 한심한 꼴 아닌가.

반테온은 바닥에 떨어진 돌조각을 쥐어 올렸다. 양손으로 잡아 남은 힘을 쥐어짜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돌의 날카로운 쪽이 향하는 곳엔 얼음처럼 굳은 소년의 육신이 있었다.

소년은 기구한 삶을 살았을지도 몰랐다. 평생 편안한 마음으로 원하는 것 하나 쥘 수 없는 시간을 보냈을 수도 있겠지. 채 성인이 되지 못한 나이에 싸늘한 주검이 된 아이에겐 미안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는 순간에도 소년의 심장을 향해 돌조각을 내려찍는 속도는 줄어들지 않았다.

“안 돼!”

로한의 절규를 따라 그의 몸에서 쏟아져나오는 붉은 빛이 반테온에게 돌격한다. 에스퍼의 기운에 잔뜩 민감해진 몸이 휘청거렸다. 언제까지 버텨줄까. 제발 이 몸이 조금만 더 버티기를. 로한을 완전히 유인할 때까지만. 간절히 애원하는 가운데, 반테온의 시야에 새까만 인영이 보였다.

로한이 뿜은 붉은 기운이 멈췄다. 허공에서 연기처럼 흩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투둑.

로한의 몸을 꿰뚫은 두꺼운 팔이 뽑혀 나갔다. 피와 살점이 떨어지고 근육이 끊기는 끔찍한 소리를 내며 피에 젖은 금발이 바닥에 처박힌다. 그 위로 숨을 몰아쉬며 조용히 서서 내려다보는 델로즈의 모습이 그림처럼 눈에 박혔다.

피투성이가 된 채로. 온몸에 상처를 입고 붉게 일렁이는 기운에 잡아먹힐 것 같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시간이 멈췄다.

“……로……한…….”

심장을 꿰뚫리고 쓰러지는 로한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왔다. 왜일까. 왜 이 순간에 자신의 이름을 저리 간절하게 부르는 것일까. 겨우 꿈틀거리던 로한의 손끝이 소년을 향했다.

끝까지 소년에게 다가가려는 듯, 절실한 로한의 행동은 목을 밟아 마지막 생명을 끄는 델로즈의 발아래에서 완전히 멈췄다.

“…….”

끝났다.

모든 것이 정리되자 반테온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꽉 다문 입매 너머로 거친 숨소리만 들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델로즈가 조용히 뒷걸음질 쳐서 반테온에게서 멀어졌다. 푹 숙인 얼굴은 앞머리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델로즈의 모습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숨을 깊게 들이쉬며 빠르게 오르락거리는 가슴팍이 아니면 망가진 조각상이라 생각될 만큼 상처 입은 몸이었다. 치열한 전투의 흔적에 본능적으로 손을 뻗는 순간 머리 한쪽 실이 끊긴 것처럼 어지러웠다.

긴장이 풀린 탓일까? 몸을 억지로 일으키려는 순간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무언가 깨달았다.

몸을 찾은 로한에게서 쏟아지던 붉은 기운 때문에 시야가 온통 붉게 보였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풍경이 멀쩡하게 보였다. 분명 델로즈의 상태도 정상이 아닐 텐데.

바닥에 주저앉은 델로즈 주변에는 반테온이 평생 봐왔던 붉은 기운이 천천히 흐려지고 있었다.

분명 처음 봤을 때 새까말 정도로 붉던 기운이 가라앉았다. 목숨이 오가는 전투를 치렀으니 가이딩 없이 안정될 리가 없을 텐데. 델로즈 주변을 감싼 기운이 테를 만들며 천천히 가라앉았다.

마치 억지로 누르는 것처럼.

“델로즈.”

반테온의 부름이 들리지 않는 듯 미동도 없었다. 그래. 가장 미련하고 한심한 에스퍼는 여기 있었지. 매번 자신을 밀어내는 가이드가 뭐 그리 좋다고 목숨을 걸고 싸우고, 또 조용히 혼자 고통을 참는다.

델로즈 주변에서 잠시 통제를 벗어난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났다가 다시 사그라들었다. 기운이 가라앉는 것이 아니었다. 거칠게 요동치는 것을 델로즈가 억지로 제어하는 것이다.

붉은 기운은 겉으로 발산되는 대신, 뱀처럼 꼬이며 주인의 몸을 타고 올랐다. 점점 델로즈의 모습이 까맣게 변한다. 상태가 점차 나빠지고 있었다.

반테온은 숨을 내쉬고 몸을 일으켰다.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그 움직임에 꽉 다물렸던 델로즈의 입이 열렸다.

“가까이 오지 마.”

단호한 거절에 발이 멈췄다.

“지금 내게 오면 위험하니까.”

“…….”

폭주하는 과정도 몇 번 보니 익숙하다. 억지로 누른 기운이 보이지 않아도 요동치는 공기의 흐름이 델로즈를 중심으로 모여든다. 거대한 힘의 이동, 대기가 술렁이는 느낌은 폭주 전에 나타나는 징조였다. 델로즈의 기운이 주인의 속을 파고들며 조용히 폭주하고 있었다. 로한에게 억지로 가이딩 당해 예민한 몸이 저릿하다.

“저 망할 놈이랑 여길 떠나.”

“넌 어떻게 하려고?”

“……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다.”

매정한 말과 다르게 쓸쓸한 목소리가 가슴을 스친다. 반테온이 떠나면 이곳에 홀로 남아서 폭주할 것이다. 전신을 찢는 고통 속에서 끝까지 버티고 견디다가 통제를 잃은 힘에 자멸하겠지. 알면서도 유일한 구명줄인 반테온을 떠나보내려고 했다.

고개를 숙인 델로즈가 힘 빠진 웃음소리를 내었다.

“왜 그런 표정이야.”

“…….”

“내가 죽으면 가장 속 시원할 사람이 너 아닌가?”

고통으로 숙인 고개 탓에 델로즈의 표정은 알 수 없었다. 단단한 어깨 아래로 꽉 쥔 주먹이 보였다. 고통을 참기 위해 강하게 쥔 주먹 아래로 피가 흘렀다. 미련하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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