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멈춘 걸음을 다시 옮겼다. 한 걸음, 두 걸음 델로즈에게 가까워졌다.
“반테온. 저리 가.”
호통치는 목소리의 끝이 떨린다. 강한 척 외친 목소리엔 숨길 수 없는 공포가 서려 있었다. 무엇이 그리 무서울까. 굳이 본인에게 확인하지 않아도 뻔했다. 미련한 에스퍼는 폭주의 순간에도 자신의 목숨이 아니라, 반테온의 목숨을 앗아갈까 봐 떨었다.
혀를 차며 그 모습을 바라봤다. 자신의 심장이 뚫리는 순간까지 소년에게 닿으려던 로한의 모습. 자신의 속이 파먹히는 순간까지 반테온을 대피시키려는 델로즈의 행동.
이보다 약한 것이 어디 있을까. 세상에 이보다 연약한 것이 또 있을까.
“델로즈. 고개 들어 봐.”
홀린 듯 마주 보는 얼굴엔 지금껏 본 적 없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 모습에 반테온은 웃었다. 테아로트가 권하는 억제제와 차단제를 거절할 때, 이런 상황을 예견했을지도 모른다.
반테온의 의도를 눈치챈 델로즈의 눈빛이 흔들렸다.
“제발…… 그러지 마.”
델로즈가 애원하는 목소리. 꽉 쥔 주먹 위로 피가 흐르는 상처 입은 몸. 가이드의 걸음 하나 제지하지 못하도록 약해진 에스퍼.
목구멍에서 한 번 더 치밀어 오르는 핏덩이를 바닥에 뱉었다. 델로즈의 얼굴이 까맣게 질렸다. 반테온의 몸은 이미 한계였다.
모든 게 엉망인 상황에서 반테온의 머릿속은 더없이 여유로웠다. 괜찮았다. 모든 것이 다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델로즈. 넌 모르나 본데.”
지척까지 가까워진 델로즈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반테온은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상냥하게 웃었다.
“내 에스퍼는 절대 나 안 죽여.”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반테온은 망설임 없이 델로즈의 품에 뛰어들었다. 까맣게 밀려서 희미해지는 의식 너머로 비명처럼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러웠다.
***
손가락으로 으깨질 무디고 무딘 철 조각. 손톱보다 약한 유리 파편. 별것 아닌 물건들이 사방을 포위하며 빙빙 돌았다. 성가시고 번거롭다. 왜 이런 것들까지 귀찮게 하는 것일까.
머리카락 한 가닥 자르지 못할 무딘 것들이 귀찮게 시야를 떠나지 않았다. 어두운 공간,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곳에서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할지 주변을 돌아봤다.
해를 끼칠 것 하나 없는 공간에서 이유 없는 긴장감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서 여기를 벗어나야 한다고, 무언가 찾아서 떠나야 한다고 소리 없는 아우성이 귓가를 맴돌았다.
눈 옆을 스치는 물건을 대수롭지 않게 쳐내며 긴 어둠을 걷자 작은 틈에서 환한 빛이 쏟아졌다. 눈이 시릴 듯 내리쬐는 빛이 저를 불렀다.
저곳에 가야 한다.
빨리 달려야 했다. 어서 움직여야 하는데, 다리에 힘을 줘도 바닥에 붙은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안 된다. 이대로 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면서, 심장이 옥죄듯 다급해졌다. 억지로 힘을 줘 발목이 뜯길 듯 강하게 내딛자 겨우 발목이 움직였다.
이제 갈 수 있어.
그렇게 생각했을 때, 주변을 성가시게 떠돌던 물건들이 빠른 속도로 달려 빛을 향해 달렸다.
어둠의 끝, 환한 빛이 있는 중앙. 날카로운 것들이 향하는 곳엔 은발의 남자가 서 있다.
‘안 돼!’
절규하며 외친 비명은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남자는 미동 없이 먼 곳을 바라봤다. 고고하고 당당하게. 정면을 보며 자신에게 날라오는 흉기를 마주 봤다. 제발 피하라고, 제발 도망치라 외치는 소리 없는 비명이 입 안에 갇혔다.
스치기만 해도 살갗이 찢어질 약한 몸 위로 흉기가 쏟아진다. 하얗게 드러난 목덜미에 날카로운 쇳덩이가 닿는 순간 멀리서 내리쬐던 환한 빛이 눈앞으로 쏟아졌다.
새하얀 점멸이었다.
“아….”
딱딱한 혓바닥이 겨우 풀린다. 경련이 일 것 같은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숙인다. 끔찍한 꿈이다. 양 손가락이 저리듯 떨리기에 여러 번 쥐었다가 펴며 긴장을 풀었다.
최근 들어 델로즈가 매일 꾸고 있는 꿈이었다. 언제나 반테온의 몸이 갈기갈기 조각나기 직전에야 겨우 벗어나는 끔찍한 꿈.
양손으로 거칠게 마른세수한다. 꿈. 그딴 꿈 따위 깨고 나면 별것 아닌 허상일 뿐이다. 나약하게 꿈에 휘둘리는 짓 따위 적성에 맞지 않는다. 그것보다 더 괴로운 건 현실이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하얀 옷을 차려입은 치료사가 델로즈 곁으로 다가온다. 정확히는 델로즈 앞에 놓인 침대에 멈춰 섰다.
꿈속에서 봤던 여리기 그지없는 몸이 창백하게 누워 치료사의 손길에 흔들린다. 익숙하게 젖은 수건으로 몸을 닦고 침구를 정돈하는 동안 시체처럼 늘어진 반테온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미 계절이 지났다. 눈이 내리던 겨울이 흘러 꽃잎이 흩날리는 봄이 돌아왔고 곧 여름을 알리는 더운 바람이 불어오는데도 반테온은 눈을 뜨지 않았다.
혈관이 비치는 투명한 몸은 형편없이 말라가고 있다. 긴 시간 동안 경관식으로 유지해도 점점 야위어 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원래도 위태롭던 몸이 가루가 되어 사라질 것 같은 불안감에 한순간도 곁을 떠나지 못했다.
델로즈가 텅 빈 던전 안에서 홀로 이지를 가지고 움직이다 처음 만난 인간들은 똑같았다. 모두 이기적이고 속물적이었다. 자신의 잇속만 챙기고 같은 인간의 등에 칼을 꽂는 걸 서슴지 않았다. 그중 남자로 분류되는 인간은 최악이었다. 시끄럽고 지저분했다. 욕심도 감추지 못하고 무엇이라도 되는 양 거들먹거리는 꼴이 우스웠다.
하찮고 무능한 생명체, 자신과 같은 모양을 했다는 것조차 경멸하던 존재였는데.
차라리 반테온도 그랬다면 좋았을 것을.
그는 방패 하나 없는 몸으로 위험한 곳에 먼저 뛰어들고 미끼로 나섰다. 귀족이라는 허영에 취한 족속들 사이에서 혼자 고고하게 빛났다.
광산에서 앞장설 때부터 그랬다. 가장 귀한 핏줄을 타고났다면서 가장 위험한 곳에 앞장섰다. 무심한 태도로 별것 아니라는 듯 움직이는 행동 하나하나에 델로즈의 심장이 타들어 갔다. 위험한 일에 미끼로 나서며 종이 한 장에 다치는 몸으로 사지로 걸어 들어갔다.
작열하는 사막의 공기가 아직 델로즈를 감싸고 있었다.
폭주의 고통에서 몸부림치던 순간, 델로즈에게 닿은 손길은 성자의 자비가 아니었다. 모든 것을 망가트릴 악마의 미소처럼, 절망적이고 달콤한 저주였다. 멈춰야 하는 걸 알면서도 망할 본능은 반테온을 탐하고 싶어 했다.
반테온이 자신의 목을 끌어안고 쓰러지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목덜미에 닿은 손가락의 감촉이 지금까지 자신의 목을 잔인하게 옥죄었다. 아마 이 감각은 평생 자신을 떠나지 않겠지.
옭아맨 목줄이 매 순간 델로즈의 숨통을 쪼여왔다.
시체처럼 하얗게 늘어진 반테온의 몸을 볼 때마다 얼음에 갇혀있던 볼품없는 소년이 떠올랐다. 어리석은 에스퍼의 품에 안겨 죽어있던 가이드의 시체.
반테온도 그렇게 영원히 눈을 감아버리는 것은 아닐까. 자신도 로한처럼 심장에서 피를 쏟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게 되는 걸까.
마르고 비틀어진 반테온의 몸을 안은 채로….
“…으….”
미약한 소리와 함께 긴 속눈썹으로 그림자 진 눈매가 흔들렸다. 바람에 흔들리듯 미약하고 미세한 움직임이었다.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 헛것이 보이는 것일까.
그리 의심하면서도 델로즈의 몸이 움직였다. 침대를 짚고 가까이 다가가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상체를 숙였다.
약하게 유지되던 숨소리가 천천히 흔들렸다. 자신의 심장 박동이 점차 거세게 요동치고, 정맥을 타는 혈액의 소리마저 시끄럽다고 느껴질 때쯤. 반테온의 눈꺼풀이 한 번 더 움직였다. 착각이 아니었다.
델로즈는 자신이 본 것이 허상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한참을 굳어 있던 델로즈는 그 미약한 움직임이 진짜인지 확인하기 위해 떨리는 목소리로 그리운 이의 이름을 불렀다.
“반테온?”
강한 부름에 응답하듯 봄날 하늘처럼 푸른 눈동자가 천천히 개화했다. 티 없이 찬란한 크리스털처럼 투명한 눈이 서서히 뜨였다.
시선을 맞추지 못해 눈동자가 허공에서 흔들렸다. 빛에 적응하듯 미세하게 찌푸려진 시선이 델로즈를 향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호흡이 멈췄다. 방금까지 거세게 날뛰던 델로즈의 심장이 거짓말처럼 바닥에 떨어졌다 올라왔다.
“너… 정신이….”
힘겹게 입을 연 델로즈는 더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열린 입으로 심장이 튀어 나갈 것 같이 두근거렸다.
반테온의 하얗게 질린 입술이 겨우 움직여 서로 떨어졌다. 힘없어 굳어버린 얼굴이 미약하게 미소 지었다.
“거봐. 내가 맞았잖아….”
잔뜩 갈라지고 거친 목소리를 내며 반테온은 웃었다. 자신이 옳지 않았냐고. 내 에스퍼가 자신을 죽일 리 없다고. 마지막 유언처럼 남긴 말이 이뤄지지 않았느냐고.
죽음의 언덕에서 돌아온 반테온은 승전보를 알리는 전사처럼 당당하게 웃었다. 반테온의 눈매가 반달처럼 하얗게 휘었다.
델로즈는 한 손으로 자신의 가슴께를 꽉 눌렀다. 꿈이 아니다. 그가 숨을 쉬고 있었다. 눈을 뜨고 있었다. 환상이 아니었다.
반테온의 가슴이 점차 강하게 위아래로 오르내릴 때마다, 그 작은 움직임에 세상이 흔들렸다.
“…그래.”
애써 뱉은 델로즈의 말은 형편없이 떨렸다. 물기 가득한 음성으로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얀 이불 위로 물방울이 떨어져 회색으로 변했다.
반테온이 사막에서 돌아온 지 100일을 넘기기 직전에 일어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