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창가로 들어오는 햇살은 이미 피부를 태울 듯 따가웠다. 의식을 잃은 사이 겨울이 통째로 지나가 버렸다. 목숨을 건진 것이 기적이라며 호들갑 떠는 사람들 속에서도 체감하지 못했는데, 초록빛으로 덮인 정원을 보니 그제야 얼마나 위험한 상황이었는지 와닿았다.
아, 와닿는 사실은 한 가지 더 있었다. 따뜻해진 날씨와 반대로 메말라버린 델로즈의 모습이 더 충격적이었다. 커다란 덩치가 날카롭게 말라 있었다.
‘울 줄은 몰랐는데.’
눈물을 숨기지도 못하고 뚝뚝 떨구던 모습이 그림처럼 머릿속에 남아버렸다. 다 큰 어른의 우는 모습이 한심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안쓰러워 보이다니.
피어오르는 감정이 낯설면서도 그리 싫지 않았다. 지금까지 부정한 시간만으로 충분했다. 되짚어보면 이미 기울어버린 마음을 고집스럽게 돌려 잡았던 시간이 길었으니까.
“아직 바람이 차다.”
옆으로 다가온 델로즈와 눈이 마주쳤다. 묵묵히 다가와 창문을 닫는 손길을 만류했다.
“바람도 시원한데 열어 놔.”
“그러다 감기 걸려.”
무릎 위에 올려놓은 담요는 늦봄에 어울리지 않게 포근하고 두꺼웠다. 어깨에 두른 겉옷도 여름에 가까운 날씨엔 과한 두께였다. 과보호도 이런 과보호가 없었다.
더 우스운 건, 이렇게 몸을 싸매고 있는데도 덥지 않은 자신의 몸이었다. 무리한 가이딩을 두 번이나 연달아 진행해서일까. 침대에 누워있던 기간이 길어서일까.
건강 체질이던 몸은 원래 상태로 돌아오지 않았다. 마른기침을 달고 살고, 탄탄하던 팔이 말라갈수록 델로즈의 얼굴도 날카롭게 깎였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머뭇거리는 델로즈를 불렀다. 손짓에 따라 다가온 그의 팔을 당기자 자연스럽게 옆에 몸을 낮춰 앉는다.
“이러면 따뜻하잖아.”
체온이 높은 몸을 끌어안자 담요와는 다른 온기가 전해진다. 딱딱하게 굳었던 델로즈의 어깨가 천천히 풀리더니 그대로 반테온을 마주 안았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몸을 맞댈 일이 있을 날을 상상해본 적이 있던가.
등을 감싸 안는 커다란 손과 머리 위에 닿는 단단한 턱에 안정감을 느낄 거라곤 꿈에도 예상 못 했었지.
델로즈가 조심스럽게 반테온의 몸을 안아 들었다. 그가 앉아있던 휠체어를 옆으로 치우고 창문으로 걸어갔다. 커다란 몸에 안겨 있으니 창 바로 앞에 서도 춥지 않았다.
긴 잠에서 깨자마자 이런 평안한 시간이 다가온 건 아니었다. 로한을 해결하고, 눈을 떴을 때 모든 것이 해결되었으니 행복한 미래만 남았습니다. 같은 동화 같은 세상이 펼쳐지지 않았다.
반테온은 납치된 피해자인 동시에, 공범인 테아로트가 소속된 가문의 차기 가주였다.
피해자인 동시에 범죄자를 심판해야 할 재판장이 된 반테온은 눈을 뜨자마자 밀린 업무의 산에 부딪혔다. 원로원은 조심스럽게 안부를 물어오고, 치료를 진행하면서도 슬그머니 업무를 물었다. 델로즈가 원로원 책상이 가루가 되도록 엎지 않았다면, 반테온은 한 번 더 침대에 누워야 했을지도 몰랐다.
현실과 타협하여 적당히 선별된 자료만 처리하던 중,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업무도 있었다.
“아직 소식은 없지?”
“…아직.”
주어를 말하지 않아도 델로즈에게서 바로 답이 돌아올 정도로 반테온이 신경 쓰는 문제였다. 씁쓸해지는 대답에 괜히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반테온은 자신의 오랜 친우를 생각했다.
친구라고 생각했던 건 반테온 혼자였을 지도 모르지만.
기절한 델로즈와 반테온을 그 사막에서 데려온 건 테아로트였다. 기절한 반테온의 입 안에 억지로 차단제와 진통제를 갈아 넣고 가장 가까운 마을로 옮겨 놓았다.
만약 가이딩 하고 살았어도, 테아로트가 두 사람을 옮겨주지 않았다면 사막에서 다시 뜨는 해에 그대로 타 죽었겠지.
마을에 도착한 테아로트는 센터에 연락을 취한 후 그대로 사라졌다. 며칠 후, 사막 중앙에서 거대한 폭발이 관측되었다.
후에 사막에 들어간 조사팀은 반테온이 증언한 유적과 비슷한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수개월 동안 땅을 파도 대리석 조각 하나 건지지 못하였다. 한때 왕국을 이루던 유적이 모두 가루가 될 정도로 강한 폭발. 테아로트가 일으킨 것이겠지.
이미 로한에게 상처 입은 테아로트가 사막을 횡단한 후 그런 일을 하기엔 힘이 부족했다. 센터의 연구원들은 테아로트는 그 유적과 함께 자폭했다고 추측했다.
하지만 반테온은 그 보고를 믿지 않았다. 시체가 나오기 전까지 테아로트의 사망에 도장을 찍을 수 없었다.
-똑똑.
“들어오세요.”
노크 소리에 대답하자 때마침 펠아토가 들어왔다. 손에는 반테온이 새로 처리해야 할 서류가 한 뭉치 들려 있었다.
테아로트의 아버지인 펠아토 라데른은 테아로트에 관한 모든 책임을 지기로 했다. 반테온의 건강이 회복되는 대로 가주 대행에서 사임하기로 하였고, 가문과 직위를 그 전에 미리 반납하였다.
반테온이 몇 번이고 만류하였으나, 펠아토는 강하게 자신의 의견을 밀어붙였다.
원래라면 가주 대행인 펠아토가 서류를 들고 움직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지금은 비서로 다루는 사람조차 펠아토보다 신분이 높은 상황이었다.
“인사 올립니다.”
고개를 숙여 깊게 90도로 인사하는 펠아토의 모습을 보며 괜히 불편한 마음을 삼켰다.
“어서 앉으십시오.”
저 불편한 모습을 보느니 똑같이 앉아서 대화하는 게 나으리라 생각하였는데, 펠아토는 꿋꿋이 고개를 숙인 채 미동도 없이 기다렸다. 델로즈가 그가 든 서류를 받아 반테온에게 전하고 나서야 허리를 폈다.
“말도 낮추셔야 합니다. 반테온 님.”
“…이렇게 하실 필요까진 없잖아요.”
테아로트는 로한의 탈주를 돕고, 반테온을 납치한 죄목으로 왕국에서 지정한 범죄자가 되었다. 정신이 돌아온 반테온은 테아로트가 로한의 조종을 받아 그리 행동하였다고 거짓 증언을 남겼다.
로한의 능력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반테온과 델로즈밖에 없었다. 센터장에게도 로한의 능력을 제대로 털어놓지 않았다. 감각을 차단하는 슈트를 만들면서도 진실을 숨긴 보람이 있었다. 반테온과 델로즈. 두 사람만 조용히 한다면 세상이 알 리 없는 거짓말이었다.
반테온은 테아로트의 범죄가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저지른 행위라 주장하였고, 법원도 그 말을 수긍하였다. 테아로트가 돌아오면 징계는 받더라도 사형은 면할 수 있도록 조치를 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펠아토 라데른만은 반테온의 말을 믿지 않았다.
제 아들이라면 로한이 없었어도 그리 행동했을 것이라 주장하면서 말이다.
“불편한 건 없으십니까?”
“저는 그렇게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사람입니다.”
묵묵히 자신의 가치를 낮추는 펠아토를 볼수록 사라진 자신의 옛 친구가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어두워지는 반테온의 안색에 펠아토는 쓰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원래 자신의 것이 아닌 걸 내려놓았는데, 무슨 불편함이 있겠습니까.”
“네?”
“…조금 오래된 이야기를 해도 되겠습니까?”
펠아토는 먼 곳을 보며 회상하듯 조용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이었다.
***
옛날. 50년 전 과거에 명맥이 끊겨 가던 에스퍼 가문이 있었다. 날이 갈수록 가문에서 태어나는 에스퍼의 숫자는 줄었고, 방계조차 사라져 가주 혼자만 그 가문의 유일한 에스퍼로 남아버린 것이다.
흔하디흔한 처지라 동정조차 받지 못하던 불쌍한 가주는 미친 것처럼 사생아를 만들기 시작했다.
에스퍼인 자신이 자식의 수를 늘리면, 자식 중 한 명이라도 에스퍼로 발현하리라 믿었다.
조금이라도 가문의 명맥을 늘리기 위해, 미약하게라도 확률을 올리기 위해 수십 명의 사생아를 만들어 자신의 가문으로 데리고 왔다.
결과는 나빴다. 본처의 자식을 포함하여 사생아 중 그 누구도 에스퍼로 발현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가문은 점차 몰락하고, 고용인조차 제대로 쓸 수 없는 상황이 되자 가주는 마지막 결단을 내렸다.
왕국에는 미신처럼 떠도는 말이 있었다. 에스퍼가 될 기질을 가진 아이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 기적처럼 에스퍼로 발현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속설이었다.
어차피 귀족의 직위를 빼앗기면, 사생아는 본 자식의 재산을 나눠야 할 짐이었다. 가주는 사생아를 한 명씩 몰래 불러 독방에 가뒀다.
-네가 내 자식 중 에스퍼로 발현할 자질이 가장 크게 보이니 도와주겠다.
이런 달콤한 말을 속삭이며, 사생아들을 가두고, 고문하며 한 명씩 죽이기 시작했다.
28명의 사생아가 죽고, 마지막 사생아가 독방에 들어섰다. 가능성이 줄자 점점 미쳐가기 시작한 가주는 피로 얼룩진 방을 치울 생각도 하지 못한 상태로 그 아이 앞에 섰다.
‘네가 마지막이야. 네가. 이제 다 끝났어. 너도 안 되면 우리 다 같이 죽는 거야.’
혈액이 굳어 시꺼멓게 변한 톱을 들고 가주는 미친 듯이 웃었다. 이제 에스퍼 발현 따윈 핑계가 된 지 오래였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원망하며 어리고 약한 사생아에게 원한을 풀었을 뿐이었다.
마지막 아이를 향해 미친 듯이 웃으며 가주는 날이 무딘 톱을 들어 올렸고.
그날, 어리석은 가주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
“그 말은….”
“그 사생아가 저입니다. 이미 이름도 사라져버린 가문의 마지막 에스퍼로 발현하였지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펠아토가 다른 가문의 사생아였다는 말은 흘러가는 풍문으로도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였다. 입을 가리고 굳은 반테온은 겨우 떨리는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