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그렇다면 어떻게 이곳에…….”
“발현하자마자 가주와 저택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을 죽이고 도망친 곳에서 형님을 만났습니다. 반테온 님의 아버님이시죠. 그분의 의지로 에슬란테 가문에 양자로 들어오게 된 겁니다.”
에스퍼 가문에서 에스퍼를 양자로 들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명맥이 끊긴 직계에서 방계의 자식을 데려오는 경우는 많았어도, 아예 인연이 없던 가문의 자식을 직계의 양자로 데리고 오다니.
어떻게 이런 일을 아무도 모를 수가 있었지?
“당시 가주였던 반테온 님의 할아버지께서도 역시 동의한 일입니다.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 에스퍼로 발현 가능하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기 싫어하였습니다. 혼란을 피하고 싶어 하셨지요. 원로원에도 저를 당시 가주님의 사생아라고 알리고 데려오셨으니, 진실을 아는 사람은 이제 저 혼자입니다.”
“그 말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펠아토가 피가 섞이지 않은 양자라는 사실 때문에 혼란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지금 들은 말이 진짜라면, 펠아토와 아버지가 혈연관계가 아니라면…….
“저와 테아로트는 혈연관계가 아니군요.”
“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지요.”
손에 힘이 풀려 팔걸이에 기대었다. 그 말이 맞다면 지금까지 테아로트의 고민은 무엇이 되는 걸까. 왜 목숨을 걸어가며 그런 짓을 벌였어야 할까.
“왜… 왜 지금까지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테아로트의 마음을 미리 아시지 않았습니까.”
“제가 그걸 말씀드렸다면, 두 사람이 혈연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반테온 님께선 테아로트를 받아들이셨을 겁니까?”
옆에 조용히 서 있던 델로즈의 어깨가 굳었다.
“그건…….”
애써 혼란스러운 마음을 진정시켰다. 만약 테아로트가 핏줄이 아니었다면, 두 사람의 관계에 아무런 법적 제한이 없었다면 반테온이 그를 받아들였을 것인가.
토할 것처럼 메슥거리는 속이 진정되면서 머리가 천천히 차분해졌다. 용암을 삼킨 듯 열이 오르던 속에 얼음을 끼얹은 것처럼 차가워졌다.
“그건 아닐 것 같습니다.”
다시 생각해도 결론은 같았다. 반테온은 테아로트를 그런 눈으로 바라본 적이 없었다. 그의 마음을 알았을 때도, 어서 정리하고 원래의 관계로 돌아가길 바라는 이기적인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알려드리지 않은 겁니다. 혈연이라는 족쇄조차 없으면 테아로트는 원치 않는 반테온 님에게 자신의 마음을 강요했을 테니까요.”
결국, 그 마음은 다른 방향으로 터져버렸다. 혈연이라는 족쇄를 끊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선택을 하고야 말았다.
“테아로트도 제 자식이니 시간이 지나 언젠가는 그 욕심을 접을 거라 생각했지요. 제 선택은 아들조차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아버지의 속죄입니다. 애초에 에슬란테에 저 같은 핏줄이 들어오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
펠아토의 과거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테아로트가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리라는 건 본인조차 예측할 수 없던 일이었을 테니까. 그를 부추긴 로한의 유혹만 아니었어도, 억지로 눌러 담고 수도를 떠나려는 선택까지 하지 않았던가.
“반테온 님. 테아로트를 감쌀 필요 없습니다. 에슬란테의 핏줄도 아닌 저와 테아로트가 이곳에 빌붙어 살았을 뿐입니다. 이제 제자리로 돌아가야겠지요. 저희를 에슬란테의 이름에서 지워주십시오.”
단호하게 이야기하는 말에 고개를 숙인 채 옆으로 저었다. 빌붙어 살다니.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힘들어하던 반테온을 지탱해준 건 어린 시절의 테아로트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반테온은 어렸다. 아무것도 몰라 직계의 역할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던 반테온의 뒤에서 묵묵히 일을 처리한 건 펠아토였다. 그리고 가이드로 발현하여 좌절하던 반테온을 위로해준 것은 테아로트였다. 그 두 사람이 없었다면 반테온은 지금까지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피가 섞이지 않았어도, 범죄를 저질렀어도 반테온에게 고마운 사람들이라는 건 변함이 없었다.
“지금 이야기는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시선을 옮겨 옆을 보자 델로즈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암묵적인 동의였다.
“저는 작은아버지를 전과 똑같이 대할 것입니다. 가주 대행을 그만두겠다는 말도, 직위를 반납한다는 말도 모두 존중해드릴 수 있습니다만, 에슬란테의 핏줄이 아니라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단호하게 말한 의견에 펠아토가 쓰게 웃었다. 이미 반테온의 마음을 예상했다는 듯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90도로 인사했다.
“반테온 님의 착한 성정은 잘 알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릴 뿐입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반테온의 몸은 앞으로 한두 달 정도 더 쉬면 충분히 회복될 것이다. 그때 가주 대행을 내려놓은 펠아토는 어떻게 할 것이냔 질문이었다.
“제 아들놈을 찾으러 가야지요.”
“…….”
“어쩔 수 없이 저도 아버지니까요. 시체가 나오기 전까진 찾아볼 생각입니다.”
허탈하게 웃는 펠아토의 얼굴은 후련해 보였다. 오랜 시간 숨겨왔던 진실을 풀어놓고 홀로 남은 일을 정리하려는 자의 모습이었다.
아버지라…….
반테온은 가졌으면서도,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부정이었다. 저런 마음도 모르고 어리석은 행동을 저지른 테아로트를 떠올리며 혀를 찼다.
“혹시라도 소식을 들으시면 말입니다.”
“네?”
“테아로트를 찾으시면 딱 한 대만 때리고 데리고 와 주십시오.”
예상도 못 한 말을 들었다는 듯 눈이 커진 펠아토는 멍하니 굳었다가 정신을 잡았다. 떨리는 양손을 꽉 잡고 고개를 떨궜다.
“네. 감사합니다.”
대외적으로는 로한에게 조종당했다고 증언하였어도, 테아로트가 지은 죄는 가볍게 여길 수 없었다. 왕국을 흔들 반란의 협력자로 취급될 것이다. 그의 생존이 확인되면 사형을 면하더라도 마지막은 왕성 지하 감옥이겠지.
반테온의 제안에 내포된 의미는 에슬란테로 데리고 오면 안전만은 보장해주겠다는 뜻이었다. 펠아토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지금까지 새로운 가주가 될 반테온을 향한 죄인의 인사였다면, 지금은 아들을 구하고 싶은 아버지의 등이 보였다.
펠아토가 물러가고 적막만 남은 서재에는 반테온과 델로즈가 남았다. 아직도 혼미한 정신에 손의 떨림이 진정되지 않았다.
이렇게 놀란 적이 있었을까. 로한의 정체를 알았을 때도 지금보다는 안정적이었던 것 같은데.
“차를 다시 줄까?”
“미안. 부탁할게.”
이미 식어버린 찻물이 고스란히 버려지고 새로운 액체가 들이부어졌다. 김이 올라오는 모습을 보며 정신을 추스르다가 델로즈와 눈이 마주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게 조용히 있는 모습이 보였다. 테아로트의 일은… 이미 숨기기엔 늦었지만, 델로즈에게 보이기엔 껄끄러운 부분이었다.
가문 내부의 일이라는 점도 있었고, 테아로트를 기꺼이 여기지 않는 델로즈의 입장도 알고 있었으니까.
“신경 쓰지 마.”
그런 반테온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델로즈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조용히 말을 뱉은 델로즈의 눈빛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게 가라앉아 있었다.
“…오늘은 좀 그렇네. 내가 여력이 없어.”
델로즈 앞에서 테아로트의 일로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 테아로트를 향한 마음이 애정이 아니라는 걸 알아도, 델로즈는 그 모습을 마음에 둘 것이니까.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델로즈를 배려하여 숨길 여유조차 남지 않았다. 찻잔을 들려던 손이 떨려 채 마시지도 못하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미 포기하고 사라진 놈이니까. 상관없다.”
감정 한 톨 느껴지지 않는 말이었다. 차갑게 느껴지는 델로즈의 말이 왜 위로처럼 들리는 걸까. 고개를 숙인 반테온은 자신을 조용히 감싸는 손길이 느꼈다. 따뜻한 팔이 몸을 끌어안고 달래듯 토닥였다.
“…….”
아무 말도 없이 아이를 달래듯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손길이 못 버티게 힘들었다. 결국, 델로즈의 커다란 가슴이 축축해질 때까지 그렇게 한참을 울어야 했다.
***
“완료된 서류는 가져가겠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기간 안에 끝났군요.”
옆에서 보조하던 재정관이 턱까지 쌓인 서류 뭉치를 들고 사라졌다. 가주 대행을 하던 펠아토가 인수인계를 마치고 떠난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슬슬 가주 취임식도 해야 하는데, 왕실에 참석하기 어려운 몸 상태라는 이유로 미루고 있었다.
한 달 전, 멀어지는 펠아토의 모습을 보며 느꼈던 씁쓸한 마음도 과도한 업무량에 밀려 천천히 흐려졌다. 완벽하게 가주의 일을 맡아서 하는 건 무리이기에 급한 일 먼저 처리하고 있지만, 그래도 벅찬 건 매한가지였다.
슬슬 북쪽으로 돌아간 동생을 불러와야 할까.
펠아토와 테아로트. 가문의 중요 업무를 맡아 하던 중추 두 명이 동시에 빠지니 그만큼 신경 쓸 내용이 많았다. 새로운 사람을 넣기에는 너무 기밀한 업무가 많았고, 그렇다고 방계에서 데려오자니 그렇게 욕심이 적은 이를 고르기 힘들었다.
처음엔 사라진 그들이 안타깝고 그리웠다면, 지금은 그냥 애타게 필요했다. 과로사는 하기 싫었으니까.
본래 가주를 맡게 되면 저택 내부 일은 안주인이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반테온은 아직 결혼하지 않았고, 만약 한다고 해도 안주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