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에스퍼를 피하는 방법 (110)화 (110/112)

#110

“왜 그러지?”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던 델로즈와 눈이 마주쳤다. 역시 그런 업무를 바라는 건 무리겠지.

슬슬 재정관의 업무를 늘리고 그에게 비서를 붙여줘야겠다 다짐하며 도장을 찍었다. 방금 비워진 공간에 새로운 서류가 차곡차곡 쌓였다.

아래를 바라보던 고개가 뻐근하다 느낄 때쯤 델로즈가 다가와 뒤에서 반테온의 목을 쓰다듬었다.

쓰다듬는다기엔 마사지하는 것처럼 꾹꾹 누르면서 힘이 하나도 담기지 않은 손길이었다.

“뭐 하는 거야?”

“마사지. 어느 강도로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몸이 회복되었다 하여도 아직 치료를 받는 반테온은, 정기적으로 마사지와 재활 훈련을 받았다. 그 모습을 보고 어설프게나마 흉내 내려고 하는 것이겠지.

기특한 생각이긴 한데 전혀 느낌이 오지 않았다.

“조금 더 세게 눌러 봐.”

“여기서 더?”

되묻는 델로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더 누르면 터질 것 같은데.”

“사람을 뭘로 생각하는 거야.”

“푸딩보다 단단한 건 확실하더군.”

비교 대상 자체가 틀렸다. 분명 델로즈가 다른 사람을 상대할 땐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유독 반테온을 대할 땐 새끼 고양이보다 더 조심스럽게 다뤘다. 로한 사건 때문에 오래 아프긴 했어도 그 전엔 건강했던 반테온 입장에선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렇게 눌러선 피로가 하나도 안 풀려.”

“…시종을 불러올까?”

조금 풀이 죽어 보인다면 반테온 눈에 뭔가가 잘못 씐 것일까. 어쩔 수 없이 들었던 도장과 만년필은 원래의 자리에 넣었다.

서류를 제대로 정리하고 서랍에 자물쇠까지 채운 후에야 델로즈를 돌아봤다. 그사이 묵묵히 기다리고 있던 델로즈가 어깨를 으쓱였다.

델로즈의 걱정대로 몸이 뻐근하고 슬슬 피곤한 건 사실이다. 팔을 돌리며 뭉친 어깨를 풀었다.

“목욕하고 싶어.”

“시종에게 지시하지.”

“그러지 마. 바쁜 사람들이잖아.”

시종은 당연히 바빠야지. 시종이 한가할 때가 어디 있냐는 델로즈의 시선이 돌아왔다. 어디 있긴, 세상에서 가장 한가한 사람이 반테온의 눈앞에 있었다.

“네가 씻겨줘.”

“뭐?”

“힘들 것 같아?”

그럴 리가 없지. 반테온 100명을 안고 옮겨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을 텐데.

반테온은 납치 사건 이후 오랫동안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정신이 돌아온 이후에도 치료한다고 바빴다. 그동안 델로즈는 눈을 떴을 때부터 감는 순간까지 곁에 있으면서 반테온 곁을 지켰다. 잠시라도 안 보면 큰일 나는 사람처럼 새벽부터 다시 새벽까지 옆에 머물렀다. 긴 시간 동안 이상하게도, 반테온의 몸에 손가락 하나 제대로 대지 않았다.

처음엔 환자라서 조심하는 것일까. 아니면 아직 반테온이 델로즈를 받아들였다는 것에 어색한 것일까 고민했었는데.

이쯤 되면 고의로 피하고 있는 게 뻔하다.

“야외 온천으로 가자. 오늘 날씨가 따뜻해.”

“…….”

“걱정하지 마. 목욕 시중은 처음일 테니 어색해도 이해할게.”

꽉 다문 입매가 곤란하게 일그러졌다. 그걸 알면서도 반테온은 양손을 그를 향해 뻗었다.

야외 온천은 저택 외진 곳에 홀로 떨어져 있어 언덕길을 올라가야 한다. 아직 오래 걷기 힘든 반테온에겐 힘든 곳이고, 휠체어도 이용할 수 없는 자갈길이었다.

델로즈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면서도 순순히 반테온을 안아 올렸다.

두 사람이 복도를 거닐어도 발걸음 소리는 하나밖에 울리지 않았다. 집무실 근처에는 최소한의 인력만 배치하였다. 아직 반테온이 납치당한 일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그 전과 다르게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버릇이 들어 버렸다.

오래된 나무로 그늘진 숲길을 따라 걸어가자 하얀 수증기가 자욱한 야외 온천이 보였다. 오래전 남아있던 유적과 온천의 기틀을 살려 만든 비밀스러운 공간이었다.

에슬란테의 직계만 사용하는 온천이었으나, 지금 저택에 남은 직계가 혼자인 까닭에 자연스럽게 반테온 전용으로 쓰이고 있었다. 새벽과 저녁. 하루 두 번 관리할 때를 제외하면 아무도 오지 않는 조용한 공간이었다.

“다 왔네.”

매끄러운 바닥에 발바닥이 닿자 자연스럽게 어깨에 걸친 것부터 차례대로 벗었다. 조끼를 벗고, 목부터 채워진 단추를 천천히 풀었다. 소매의 커프스까지 빼서 바닥에 던졌다.

하나둘씩 바닥에 옷이 떨어졌다. 늦봄임에도 과보호로 두껍게 걸친 옷이 한 무더기가 되어 쌓였다. 순식간에 하얗게 드러난 살결 위로 뽀송뽀송한 가운이 올려졌다.

“…입어.”

10걸음 앞에 놓인 욕탕까지 가는데 이걸 걸쳐주다니. 아무리 몸이 약해도 이런 걸 입고 물에 들어갈 순 없었다. 물에 젖은 천을 입으면 건강에 더 해로웠다.

반테온은 바닥에 축 늘어진 허리끈을 잡아 올렸다. 입매가 슬며시 올라갔다. 반테온 반대쪽으로 시선을 돌린 델로즈에게 물었다.

“이거 입고 물에 들어갈까?”

“…….”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본인이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행동인 건 알고 있겠지. 이제 고개도 피하고 눈을 마주치지 않는 델로즈를 내버려 두고 거침없이 온천으로 걸어 들어갔다.

10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의무를 다한 가운을 벗어 바닥에 내려놓고 천천히 발을 담갔다. 손가락처럼 하얗게 질렸던 발끝부터 천천히 체온이 돌아왔다.

뜨겁다고 느낄 정도의 물에 종아리까지 담그자 딱 좋은 온도가 느껴졌다. 천천히 앉아서 어깨까지 몸을 넣자, 잔잔한 근육까지 이완되면서 절로 눈이 감기는 포근함이 몸을 감쌌다.

위로는 시원한 바람이 불고, 몸은 딱 좋게 따뜻한 지금이 천국이 아닐까.

뒤로는 묵묵히 목욕 용품을 챙겨 가져오는 델로즈의 모습이 보였다. 해면 스펀지를 뜨거운 물에 불려 부드럽게 만들고 있었다. 제법 제대로 시중을 들려 하는 모습을 흘낏 바라봤다.

“너도 들어올래?”

스펀지를 쥐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직 채 불리지 않아 딱딱할 스펀지가 사정없이 찌그러졌다.

“따뜻하고 좋아.”

발을 들어 흔들었다. 나뭇잎 사이로 떨어지는 햇볕이 맑은 온천수 사이를 여과 없이 통과한다. 집에만 갇혀있어 더 창백해진 피부가 대리석 바닥에 섞여 하늘거렸다.

“…….”

“혼자 쓰기엔 넓잖아.”

“날 가지고 노는 건 알았지만….”

나름 해본 적 없는 유혹을 하는 중인데, 가지고 논다니. 섭섭한 표현에 반테온을 손을 쭉 뻗어 델로즈의 팔을 잡았다. 미끈한 온천수에 젖은 손이 피부 위에서 미끄러졌다.

화들짝 놀라 몸을 뒤로 빼려는 델로즈의 팔을 잡아당겼다. 뻣뻣한 팔이 못 이기는 척 움직였다. 반테온의 제안대로 천천히 옷을 벗자 상체에 깊게 베이고 찢긴 상처들이 보였다.

로한과 전투할 때 다친 상처들이었다.

가슴 중앙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상처를 중심으로 자잘한 자상들이 상체를 덮고 있었다. 어지간한 부상은 남지 않는 몸에 새겨진 흔적은 그때의 치열함을 알려주었다.

정작 납치당해서 정신을 잃었던 반테온의 몸에는 이제 긁힌 상처 하나 남지 않았다.

속옷 한 장만 남긴 채 다 벗어 던진 델로즈가 물에 들어오는 것을 보며 반테온은 슬며시 웃었다.

숨기기 위해 사수한 마지막 속옷도 쓸모없게, 그 위로 흉흉하게 드러난 형체가 보였다. 하긴 이 정도는 반응해줘야 꼬시는 상대도 보람이 있을 것 아닌가.

“상처가 남았네. 많이 힘들었어?”

“지금이 더 힘들어.”

“왜?”

그렇게 힘들 정도로 참을 필요는 없는데. 분명 정신이 돌아온 반테온과 델로즈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니,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반테온은 델로즈를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굳혔고, 저 불안정한 에스퍼를 토닥여 잘 지내볼 생각을 했는데, 정작 델로즈의 행동이 소극적이었다. 편하게 대하는 반테온의 행동에 때론 꿈인가 의심하며, 닿는 것조차 조심스러워 할 때가 있었다.

간헐적으로 보이는 태도에 답답해진 건 반테온이었다. 차갑게 대했던 과거도 있으니 이제라도 잘해 보려는데, 정작 당사자가 꽁무니를 뺀단 말이다. 저렇게 잔뜩 세운 상태로도 끝까지 시선을 외면하면서.

“너 아직 아파.”

“다 나았어.”

“이런 거 좋아하지도 않았잖아.”

애써 유혹하고 있는데 무슨 엉뚱한 말인 걸일까. 델로즈에게 마음을 열었어도 변하지 않는 평가가 하나 있다. 역시 저놈은 말을 하지 않을 때가 제일 좋았다.

반테온은 그사이 조금 길어 목덜미를 덮기 시작한 머리를 넘겼다. 물기가 뚝뚝 떨어지며 목덜미를 쓸었다.

델로즈가 오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분명 그와 좋은 관계를 맺었던 적이 없었지. 매번 오해하고 약을 먹고, 서로 감정을 숨긴 채 이어졌다.

그런데도 웃긴 건….

“그렇게 나쁘진 않았는데.”

기억에 남을 정도로 자극적인 밤이었던 건 확실했다. 델로즈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진 모르겠으나, 반테온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편이었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가벼운 하룻밤을 즐긴 적도 많았고, 나름 어렸을 땐 다양한 경험도 했었다.

다만 자신의 취향이 확실하여 생각도 해보지 않은 방향이었을 뿐이지. 다른 사람과 하라고 하면 질색을 했을 테지만, 다시 델로즈와 그런 밤을 보내는 건… 괜찮을 것 같았다.

“제법 좋았어.”

이래도 안 올 거야?

손을 까딱이니 델로즈의 몸이 홀린 듯 가까워졌다. 눈앞에 다가오니 더 흉흉하게 올라온 그의 성기와 악다문 턱이 보였다. 거봐. 이미 한계에 다다라 흥분한 시선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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